제072화 고인물은유명하다.
[YOU DIED.]
갑자기 뜬 회색화면에 궁신은 눈앞이 멍해졌다. 나무에 떨어져 기이한 각도로 꺾인 자신의 시체 위에서 원샷원킬이 지껄이는 말에 등골이 서늘했다.
"당했다."
천하제일 길드가 무너지도록 방치한 것만으로도 불쾌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단독행동을 하게 둔 것은 설마 썩이나감이 이런 결과를 낼 줄 몰랐다는 것과 만에 하나라도 스피릿 길드만 있더라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스피릿 길드의 배신은 사고를 멈추게 했다.
"아, 안 돼. 황금추적자가 날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황금추적자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 틀어지는 거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기는 것에는 관대하지만, 팀원의 실수로 인해 벌어지는 일에는 결코 넘어가지 않았다.
궁신이 골드캐시에 합류하게 된 것도 전임자가 연거푸 실수를 해서였다.
"이, 이러면 황금추적자가 날 가만히 두지 않을 텐데."
제1구역에서의 통제 실패로 이미 찍힌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번 일은 반드시 성공적으로 처리해야만 했다.
최소한 썩이나감이 풀려나가는 것만이라도 막아야만 한다.
골드캐시에 나간다면 수익이 얼마나 떨어질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지정한 지점에서 부활.]
[가까운 도시에서 부활.]
그래서 놓인 선택지가 궁신을 숨 막히게 만들었다.
첫 번째는 썩이나감과 배신자인 스피릿 길드가 버티고 있는 낙오된 화전민의 마을이다.
두 번째는 뉴 알론이지만 이곳에 간다는 것은 통제의 포기를 뜻했다.
"대화를 하자."
일격필살의 마음을 돌리면 뭔가 묘수가 나올 수 있다.
궁신은 죽음을 각오하고 첫 번째 선택지를 눌렀다. 시야가 변하며 낙오된 화전민의 마을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몇 번 죽고 싶어?"
썩이나감이 자신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꿀꺽.
궁신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당장은 썩이나감이 죽이려고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이 새끼는 숫돌을 들고 있었구나.'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썩이나감이 본래 쓰던 검이었다. 피 묻은 병사의 검이라는 레어 아이템으로 꽤나 고가에 유통되는 물건이었다.
저걸 다시 꺼냈다는 것은 무기의 내구도를 조금이나마 올려 주는 숫돌을 썼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저놈은 더 싸울 수 있다.'
어떤 말을 해야만 할까. 머리를 굴리며 주변에 눈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푸욱!
"다시 부활할 때는 대답 먼저 해라."
썩이나감의 검이 목을 꿰뚫었다.
궁신은 화를 삭이며 부활하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똑같은 자리에서 썩이나감이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대화가 가능할까…요?"
"몇 번 죽고 싶냐고."
"먼저 이야기를……."
불리한 것이 있기에 궁신은 저자세로 나아갔다. 그럴 때마다 썩이나감은 매정하게 검을 휘둘렀다.
몇 번이고 지속되자 궁신은 반항을 하려고 했지만, 그건 쉽지 않았다.
[황금추적자 : 팀에 남고 싶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썩이나감 붙잡아라.]
마치 지금 상황을 곁에서 보고 있던 황금추적자의 귓말 때문이었다.
"대답."
"거…래를 하지."
"어쩌라고."
어렵게 꺼낸 말에 썩이나감은 기계적으로 검을 그었다. 같은 작업이 거듭되자 저자세를 일관했던 궁신은 버럭 화를 냈다.
"빌어먹을! 죽이지 말고 이야기를 들으라고. 개새끼야!"
"내가 말한 거에만 답해."
"알겠다고."
궁신으로서는 계속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좋아. 네가 지금 몇 번 죽었지?"
"…어?"
"계산해 와."
반면에 썩이나감은 반쯤 장난기를 머금은 태도를 유지했다. 엉뚱한 질문을 하면서도 끝은 죽음에 대한 것이었고 답을 하지 못하면 죽었다.
"씨발. 백 원 주고 빵 사오라던 새끼도 아니고……."
도저히 셀 수 없는 상황에서 착용하고 있던 장비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부활하기 직전에 궁신은 통제 중에 자신이 죽은 횟수를 세어 봤다.
로그 상으로는 열세 번이나 죽었다.
"존나 죽였네."
이가 부득부득 갈렸지만 칼을 쥔 쪽은 썩이나감이었다.
궁신은 부활하자마자 소리쳤다.
"열세 번!"
"병신."
썩이나감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제1구역에서 독고무적, 흑군과 함께 통제당하면서 죽었던 때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 * *
"너 재미없네."
궁신의 뜬금없는 행동은 다음에 숨겨졌을지도 모르는 황금추적자의 계획에 대한 호기심을 가져다주었었다.
하지만 그 관심에는 유통기한이 있었다.
내가 알던 것과 다르게 낮은 자세를 유지하는 궁신을 보며 기대를 했지만, 결국 시간 끌기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황금추적자라는 놈에게 난 궁신이면 충분하다는 거였으니까.
"시간은 다 끌었지?"
"나, 나는……."
"슬슬 질려서 말이야."
계속 이 녀석에게 붙어있기에는 내 시간이 너무 아깝다. 나도 사람인지라 피곤하고 배도 고프니까.
궁신이 착용하고 있던 장비가 두 개 정도 박살났다는 것만으로도 제법 만족스럽기도 했다.
"골드캐시에서도 버릴 놈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네놈이 골드캐시를 알기나 해?"
"나한테 스카우트 제의 왔거든. 아마 너 대신이었을 것 같은데?"
"……."
궁신은 그건 잘 몰랐는지 완전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골드캐시가 오래 간 것은 사실이지만, 멤버는 한 번씩 바뀌었다.
당사자들은 억울하다고 말하지만 행적을 조사하면 그놈들이 연달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거다.
"골드캐시도 아니면 굳이 널 잡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꺼져라. 수입이 줄어들어서 당분간은 라면 든든하게 잘 먹고."
팀이 좋은 것은 고정수입이 생긴다는 것이고, 골드캐시만큼 확실한 팀은 없었다.
버는 돈이 늘면 그보다 늘어나는 것은 씀씀이였다.
과연 궁신이 통장 잔고를 든든하게 지킬 수 있는가 모르겠다.
"아. 배고프다."
오랜만에 로그아웃을 하는 느낌인지라 VR게임기기에서 나오자마자 기지개를 폈다. 녹이 슨 관절이 부러질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막노동으로 제법 씨알이 굵어진 팔뚝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 죽겠네."
대충 12시간 가까이 게임에 접속했었다. 눈을 뜬 시간은 14시간이 넘었고 공복은 20시간 가까이 될 것이다.
거울을 보면 수염도 덥수룩한 전형적인 게임폐인의 모습이지만, 내가 어떤 꼴이라도 남에게 보일 필요가 없는 것이 자택근무의 장점이지 않나 싶다.
언제나처럼 라면에 손을 뻗다가 최저가로 떠서 구매한 해장국 레트로 제품을 끓였다. 얼려놓은 대파와 다진 마늘, 땡초를 조금 넣은 것만으로도 제법 그럴 듯 해졌다.
"이게 사람 사는 낙이지."
얼마 전까지 골방에서 라면 하나만 먹던 나였다. 이제는 해장국에 야채를 넣고 밥까지 말아 먹을 수 있다.
배도 부르니 아예 이부자리에 몸을 눕혔다.
해가 저물어 붉게 물든 하늘에 눈이 부셔서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니 새벽이었다.
"와.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물에 젖은 솜이불처럼 몸이 무거웠다.
도저히 이 피로를 가지고 일어날 자신이 없기에 차라리 이 무기력함마저 즐기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펴자 이불 바깥으로 노출이 된 팔다리에 새벽의 한기가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아직 춥네."
초여름에 다가온 계절이건만 아직 시간은 겨울에 머무른 것만 같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뒹굴거리다가 베개 옆에 눕혀 둔 스마트폰을 들었다.
누워서 뒹굴 거릴 때의 국룰은 지켜야 옳다.
먼저 찾은 것은 인터넷 쇼핑물이었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것들이 저가로 올라와서 돈을 아끼면서 나름대로 사치가 가능한 유일한 장소였다.
"갈비탕 싸게 파네. 이거랑 고기랑……."
몸이 부실한 것을 보니 보다 더 많은 단백질이 필요한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한 갈비탕과 함께 오랜만에 고기라도 구워먹게 최대한 싸게 올라온 대패삼겹살을 골랐다.
추가로 영양제도 질렀는데 하루에 정량보다 좀 과하게 먹으면 유통기한 내에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멀티비타민이랑 밀크시슬 보조제를 구매했다.
"빚 갚으니까 약도 사네."
전에는 허리띠를 작정하고 졸라맬 때라서 고정지출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이 월세였고 그 다음이 휴대폰 요금이었다.
지금은 식비가 두 번째를 차지할 정도로 나름대로 먹는 것에 제한을 푼 셈이다.
이 다음에는 침대를 사거나 컴퓨터라도 새로 맞춰야겠다.
뭔가 사고 싶은 물건이 생기니까 다시 게임을 하고 싶은 의욕이 생겨났다.
"그 전에 상황 좀 볼까."
궁신 따위에게 발목이 붙잡혀서 외부상황에 대해 무지했다.
먼저 평소에 들어가던 아웃벤의 엘리멘탈 소울2 게시판에 들어갔다.
단신으로 그 지독한 통제를 부서트린 것은 분명히 놀라운 일이다. 그러니 날 싫어하는 헤이러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날 찬양할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나에게 30초의 사신이라는 그럴 듯한 별명이 붙었다.
"애는 치킨 기프티콘이라도 보내 줄까."
영상이 워낙 잘 찍힌 탓에 스킬빨이라는 개소리보다는 타고난 실력이라는 쪽으로 무게가 실렸다.
다만, 2시간 전부터의 게시글을 보니 다른 사이트의 이야기가 많았다.
공통적인 것은 찌라시였다.
"찌라시가 올라왔다라……."
씨디인사이드의 엘리멘탈 소울2 갤러리에 올라온 개념글로 뭔가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것 같다.
어쨌든 화제가 되었다면 확인은 해봐야 한다.
[무과금로 해방전쟁 찌라시 정리. 거대길드 편.]
개념글 1페이지에서 혼자 10만대 조회수에 추천도 5천에 달하는 글이었다. 댓글도 1천 개를 넘었기에 제법 관심이 갔다.
사이트 특성상 아무나 책임감 없이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으로 인해서 항상 걸러듣지만, 흥미위주의 글이라면 확인하기에 좋다.
어차피 히든레코드를 통해 교차검증하면 되니까.
1. 독고무적이 통제 중인 길드가 아닌 랭커길드만 모아서 회의.
2. 전작부터 한 틀딱 올드 유저와 다른 게임을 하고 온 씹뉴비로 갈라짐.
3. 전자와 후자에서 입장이 커짐. 한쪽은 걍 막피로 썰자고 다른 하나는 자기들 밥그릇만 지키자임.
먼저 적혀진 1번부터 4번까지의 내용을 보고 느낀 것은 찌라시의 최초 유포자 및 정리글을 올린 놈이 나와 같은 업계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이래서 고오오급 VPN을 썼구만."
굳이 이런 내용을 쓸 정도면 보통 관종은 아닐 것이다.
회의록이 퍼진 것은 아니니 당사자가 아니라 이야기를 전해들은 제3자일 것이다.
작업을 하기 전에 가볍게 읽으려고 했지만, 직업본능에 스위치가 켜졌다.
반쯤 감겼던 눈을 부릅뜨고 뒷내용을 읽었다.
4. 서로 의견이 다르지만 인정해 주는 분위기임. 아마 중위권까지는 무과금한테 당하더라도 누가 도와주지는 않을 걸로 보임.
뒤이은 내용도 그럴 듯했다.
엘리멘탈 소울의 유저들이 유독 페이 투 윈에 집착하는 경향이 심했다.
다른 게임에서 왔다면 분명 충동할 수밖에 없을 거다.
5. 휘파람 저거 엘소1만이 아니라 다른 게임에서도 저지랄 자주하는 꾼임.
6. 이번 사태에 이득을 보는 것은 템만 파는 쌀먹이 아님. 다크게이머들이 뒤에 있음. 즉, 휘파람 저거도 사실상 다크게이머라는 거.
이 부분들에서는 깜짝 놀랐다.
찌라시의 증거로 제시된 화면에는 휘파람이 썼던 다양한 게임 아이디와 커뮤니티에 남긴 글들이 캡쳐가 되었다. 그때마다 동일한 아이디가 추천과 댓글을 남겼는데 다른 글에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는 사실상 유령계정이었다.
"게임 판도가 흔들릴 정도면 얼마나 쓴 거지?"
내가 궁금한 것은 이 부분이었다. 증거라고 나온 정황은 고작해야 스무 명도 되지 않았다. 랭커도 아닌 그들로 인해 커뮤니티를 떠나 게임 전체적인 흐름이 바뀌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닌가. 오히려 목소리만 크니까 선동당하는 건가."
당장에 건설현장에 가도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놈은 목소리 큰 놈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커뮤니티에는 첫 댓글이 그 게시글의 반응을 결정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골드캐시와 다크로얄이 협동하지 않았을까라는 의심이 짙어졌다.
"꽤 재밌었네."
간질나게 딱 거기에서 끝난 본문 때문인지 댓글은 보통이 아니었다.
ㅇㅇ : 학생 글 내려.
ㅇㅅㅇ : 여긴 ㅇㅅㅇ가 없네.
ㅋㅋ : 님 누구임?
ㅇㄱㄹㅇ : 업계 친구네. ㅎㅇ.
ㅋㅋㄹㅃㅃ : 개소리하네. 휘파람이 니 친구노?
1111 : 다음 소설 언제 내주시나요. 선생님.
ㅅㅅ : 개추.
어쨌든 꽤나 재미있는 글이었다. 이게 파급력이 커진다면 나에게는 나쁘지 않다.
휘파람이 의심을 받을수록 나는 반사이익을 받으니까.
뭔가 더 재미있는 글이 있지 않나 새로고침을 하다가 방금 전에 본 것과 똑같은 아이피로 올린 글이 보였다.
[썩이나감에 대한 업계 찌라시 정리.]
예상하지 못한 글에 순간 눈살이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