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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은 옷을 입지 않아-71화 (71/201)

제071화 고인물은뒤집었다.

엘리멘탈 소울1에서는 카오가 된 상태로 페널티를 받다보면 레벨 1이 하락이 되는 경우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제작사가 양심이 있었는지 본래 레벨로 복귀할 때까지는 추가 경험치 획득량이 10%가 있었다.

PK패치 이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엘리멘탈 소울2에서는 조금은 달랐다.

소울리스가 엘리멘탈 소울M을 발매할 때부터 우려가 되었는데, 고객을 개돼지로 아는 모바일 게임들이 높은 수익을 거둔 것에 큰 감명을 얻었는지 앞선 추가 경험치 획득의 기능을 위해서는 레벨 대비 꽤나 버거운 금화를 소모해야만 했다.

철홍이 그 비용이 아까울 정도의 경제상황이라는 것은 아니다. 평군적으로 놈은 최소한 한 달에 외제차 하나 정도는 꾸준하게 게임에 쏟을 정도는 되었다.

다만, 경험치를 보장하는 것과 아이템 내구도를 보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라는 거다.

내 무기는 사망페널티가 아니라 단순한 반복사용으로 인해 내구도가 닳았지만, 나머지 이들은 어떨까.

철홍이 아무리 자금이 빵빵해도 지금 자신이 착용한 것보다 뛰어난 서브 아이템을 가지고 다닐 수는 없다.

아이템의 질은 떨어질 것인데 그게 검이 아니라 장비 전체적인 이야기라면 무게감이 달라진다. 심지어 계속 레벨이 떨어지면 착용제한이 걸려서 더 아이템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에 그만하더라도 그런데 나머지 이들은 어떨까.

이미 주요 사냥터 통제를 둘러싼 라이트한 유저들과 시간 혹은 자금을 소모해 온 헤비 유저들의 전쟁으로 모든 템값과 금화 가격이 폭등하고 있었다.

현실적인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랭커도 아니게 된 너를 믿을까? 철홍."

특히 중요한 것은 구심점이었던 철홍의 존재감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천하제일 길드가 악평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유지가 되었던 것은 철홍이 랭커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속하냐 아니냐가 길드의 명망의 큰 영향을 끼쳤다.

300인 랭커의 꼬리칸에 겨우 엉덩이만 걸치고 있던 철홍이었기에 1시간 단위의 갱신시간이 돌아오면 그 명단에서 빠질 것이다.

그때는 과연 어떻게 될까.

지금 철홍을 따르는 다섯 명의 간부들이 계속 붙어 있을까?

"해보자. 네가 레벨1까지 떨어져도 쟤들이 남아 있나."

거기에 궁금증이 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철홍을 필두로 한 천하제일 길드원들은 포기하지 않고 나를 막았다. 필사적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다들 엉망이 된 한 명의 눈치를 보며 억지로 다가오고 있을 뿐이었다.

"저 새끼 안 죽이고 뭐하는 거야! 이제는 네놈들도 배신할 거냐!"

뒤에서 그걸 지켜보는 철홍의 눈이 옹이구멍이 아닌 이상 모를 수 없었다.

괴성을 지르며 검을 휘두르던 그의 검이 동두천호랑이의 등판을 훑고 지나갔다. 정예마법사인 덕분에 후방에 위치한 이유 때문이었다.

"…길마?"

카오 상태라고 하더라도 같은 길드에 속한 이상 서로 피해를 줄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등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각을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동두천호랑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뭘 꼬나봐. 저 새끼 죽이라고 했는데 왜 멀뚱히 있냐고!"

"그래서 동료 뒤를 쳐?"

"쳐? 쳐어? 이 새끼 말 짧은 것 봐라?"

철홍은 부들부들 떨면서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전이라면 다소 위협적이었을 위엄과 풍모는 느껴지지 않았다.

취객이 편의점에 찾아와서 난동을 부리는 정도로 보였다.

"네가 지랄해서 같이 개고생하는데 뭘! 여기서 헛짓거리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고생은 안 했어!"

"헛짓거리? 길드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거야!"

"네 자존심이겠지. 씨발. 살다살다 저런 변태새끼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듣고 겜질은 못하겠다!"

이때까지 억눌렀던 분노가 터지자 동두천호랑이는 철홍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목청을 높였다.

적인 나를 앞에 두고 자신들끼리 싸우다니 아주 진귀한 장면이다.

"그만해라. 동두천아."

"저 새끼 앞에 두고 뭐하는 거야."

갈등이 깊어지고 해소되려고 하지 않자 고려제일검객과 황비룡이 동두천호랑이를 만류하려고 했다.

"놔! 병신들아. 길드 이 꼴이 났는데 저 새끼 밑에서 비위나 맞춰주고 싶냐? 씨발. 그냥 편하게 혼자 게임이나 하고 말지. 이 병신 새끼 말 믿고 엘리멘탈 소울2로 넘어온 내가 등신이지!"

동두천호랑이는 결국 인내심이 다했는지 욕설과 함께 곧바로 로그아웃을 했다.

"…저 개새끼가."

철홍은 그걸 보면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면 벼락이라도 머리에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나 혼자서 이 새끼 통제한다. 다 꺼져!"

정신이라도 나간 것인지 다 망가진 아이템을 그대로 착용한 상태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역시나 성기사가 믿고 쓰는 돌진스킬인 용맹한 돌격으로 거리를 좁혀왔다. 그 간격에 맞추어 뒤로 물러나자 놈은 기다렸다는 듯이 두 팔을 들어올렸다.

전에 쓰려다가 미처 쓰지 못했던 스킬이겠구나 싶었다.

[1인 도발을 사용합니다.]

[상대가 도발에 걸렸습니다.]

"학습능력 없어?"

천하제일 길드의 통제가 끝이 보이는 마당에 굳이 한 번 차단했던 노림수를 구경할 필요가 없었다.

"이이익!"

다시금 1인 도발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놈을 비웃으며 검을 꽂아 넣었다.

까드드득!

검에 의한 균열이 갑옷 전체에 퍼졌다.

이때까지와 달리 이번 느낌은 확연히 달랐다.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나도 모르게 검을 놓을 뻔할 정도였다.

투두두둑!

"마, 말도 안 돼!"

철홍은 자신의 갑옷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자 경악했다.

결사단의 중갑옷.

성기사 전용 상의 방어구로 이걸 가지고 있는 랭커는 다섯도 되지 않을 정도의 고가 아이템이었다.

현 시점에서 성기사 장비 1티어라 꼽힐 정도였다.

다른 장비보다도 먼저 방어구가 버티다 못해 내구도가 다했으니 철홍의 절망도 이해가 갔다.

[도전과제, 평화적인 행동을 획득하였습니다.]

철홍의 숨통을 끊고 나머지 넷들에게 달려들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덕분에 고려제일검객과 황비룡을 곧바로 죽일 수 있었다.

[YOU DIED.]

그 후속으로 죽이려던 대물에게 옆구리에 정타를 허용하고 죽었다.

즉시 부활해 아직 다급히 방어구 상의를 갈아입는 철홍을 무시하고 인중여보와 대물을 차례대로 죽였다.

내 뒤에 부활해 아직 무적판정인 고려제일검객과 황비룡을 무시하고 조금 전과 달리 형편없는 사슬갑옷 하나를 걸친 철홍에게 검을 뿌렸다.

콰드드득!

"씨바아아알!"

철홍은 백스텝을 쓰고 물러났지만, 습관적으로 들어올린 방패에 검끝이 닿았다. 거듭된 죽음에 내구도가 바닥이 나버린 방패 또한 박살이 났다.

그를 시작으로 나머지 이들도 장비가 하나씩 터져나갔다.

철홍과 달리 인벤토리에 서브장비를 넣어두지 않은 것이다. 카오상태라 새로운 장비를 꺼내지 못했으니 몇 번만 더 죽으면 나처럼 팬티 하나만 걸치고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뭐해! 장비 꺼내라고!"

"카오 상태라서 창고를 열 수가 없습니다."

"…이미 피해가 큽니다."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철홍과 달리 고려제일검객와 황비룡은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심지어 인중여보와 대물은 아직 부활하지 않고 있었다.

죽은 상태에서 사태를 관망하거나 여기에서 떠난 것이 분명하다.

"이 두 새끼들이 진짜……."

철홍도 그걸 알아차렸는지 허공에 창을 띄우며 알 수 없는 욕설과 함께 신경질적으로 삿대질을 했다.

저번 경험을 상기하건데 길드탈퇴 절차로 보였다.

"너네들도 꺼져! 전부!"

예상은 틀리지 않았지만 조금은 빗나갔다.

철홍이 모습을 감춘 두 사람만이 아니라 옆을 지키고 있는 고려제일검객과 인중여보까지 탈퇴시킨 것이다.

"…즐겜하십쇼."

"갑니다."

두 사람은 시원섭섭한지 아니면 기다렸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로그아웃을 했다.

"넌 어쩌려고."

"모든 장비가 부서질 때까지 안 물러난다!"

"그러면 몇 번 안 남았네."

모든 것을 잃고 절벽에 선 철홍은 무의미한 돌진을 거듭했다.

투구가 박살나고 신발이 뜯어져나가고 검이 부러져도 그는 다시금 부활해서 나에게 덤벼들었다.

나를 죽이겠다라는 의지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물러나지 못해 모든 것을 불태운다는 느낌일 뿐이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할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형편없고 추접할 뿐이었다.

"…졌다."

철홍은 30분 정도를 무식하게 죽기만을 반복했다.

내가 통제를 당한 시간에 비하면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속에 있던 앙금은 조금이라도 풀렸다.

"내가 배신당할 줄이야……."

"뭔 배신 드립이야. 주접 그만 떨고 꺼져."

"너는 모른다. 천하제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철홍은 마치 비련의 주인공처럼 회한에 차있었다. 저대로두면 이세계로 환생해서 구국의 영웅이라도 될 기세였다.

"관심 없다니까. 꺼지라고. 시간 아까워"

악의적으로 통제를 하다가 오히려 나한테 영혼까지 털렸으면서 무슨 정신승리를 하겠다고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저런 망상에 어울릴 필요가 없다.

"네놈도 언젠가 죄값을 받게 될 거다!"

이를 악물고 사라진 철홍을 보며 비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벌써 받았어. 등신아."

치가 떨릴 정도로 아주 제대로 받았다.

서울에 아파트 한 채는 사고도 남을 돈으로 헛짓거리를 하다가 다 날리는 멍청한 놈이 몇이나 될까.

들숨을 쉬면 맥주가 날숨을 쉬면 소주를 마시던 나날은 혈관에 피가 아니라 알콜로 돌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다음이 문제인데."

천하제일 길드가 아작났어도 아직 나에게는 서른한명의 적이 있었다.

궁신과 스피릿 길드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은 이들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는 거다.

[창공의 독수리를 사용합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공의 독수리로 주변의 시야를 밝혔다.

마을 바깥에 붉은 점이 여섯 개 정도 보였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스피릿 길드일 것이다.

과연 저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인벤토리에 쟁여둔 숫돌을 꺼내 내구도가 떨어진 본래의 검을 수리하며 전의를 가다 듬었다.

*       *       *

커뮤니티만이 아니라 게임 내의 채팅에서 천하제일 길드와 썩이나감의 상황에 정신없이 중계가 되고 있었다.

궁신은 지정된 자리에 있으려고 했지만, 참지 못하고 스피릿 길드장

"이 멍청한 새끼. 어깨에 힘줄 때부터 알아봤다!"

궁신은 천하제일 길드의 정원이 단 한 명 남는 순간에 욕설을 참지 못했다. 그러고는 높은 나무에 올라 망원경 아이템을 써서 마을을 살폈다.

어떤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 모르지만, 철홍은 한쪽 무릎을 꿇고 있다가 사라졌다.

"흥, 저런 멍청이가 없다면 오히려 더 편하지. 그렇지 않아?"

"……."

"원샷원킬. 내 말 안 들려?"

궁신은 아래에서 뭔가를 보며 생각에 잠긴 원샷원킬을 불렀다.

천하제일 길드가 사라졌어도 아직 스피릿 길드가 남아있다.

썩이나감을 통제하는 것에 있어서는 후자가 더 나았다.

"아. 들려요."

건성으로 답하는 원샷원킬이 보고 있던 것은 커뮤니티에 퍼진 썩이나감의 30초 전투영상이었다.

'이건 못 이겨.'

결국 단신으로 천하제일 길드를 무너트렸다. 이런 놈을 적으로 돌렸다는 사실에 원샷원킬은 식은땀이 흘렀다.

역시 천하제일 길드 따위와 손을 잡는 것이 아니었다.

"애들한테 준비하라고 할 거라서 잠시만요."

"스피릿이 훨씬 낫군."

궁신은 그 말에 의심을 거두었지만, 원샷원킬은 은밀한 귓속말을 보냈다.

[원샷원킬 : 썩이나감님. 혹시 협상을 하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만약에 썩이나감이 이걸 거절한다면 원샷원킬로서도 난감해진다.

[썩이나감 : 어떤 협상?]

[원샷원킬 : 선물을 보낼 겁니다.]

[썩이나감 : 그게 끝임?]

[원샷원킬 : 보고 만족하면 정해줘요.]

원샷원킬은 그 말을 한 후에 궁신의 뒤통수에 화살 한 대를 날렸다.

"저 새끼면 만족할거잖아."

궁신도 어차피 카오 수치가 높았다. 그가 돌아갈 장소는 정해져 있다.

썩이나감이 사라질 때까지 게임 밖에서 나가거나 혹은 낙오된 화전민의 마을에서 부활하는 거다.

"설마 골드캐쉬가 썩이나감이 무서워서 튀겠어? 쓰던 검도 아작났는데."

죽은 상태에서 대기 중이면 지금의 말 정도는 들릴 것이다.

[원샷원킬 : 택배 보냈습니다.]

[썩이나감 : 좋네. 봐주죠.]

원샷원킬에게는 다행히 썩이나감은 선물을 받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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