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70화 고인물은30초의사신.
여섯 명과 한 명의 싸움이 누가 유리할 것이냐. 대부분은 전자를 택할 것이다.
10분의 공격과 30초의 공격. 이 또한 대부분의 이들은 전자를 택할 것이다.
현실이 아니라 게임이라는 전제가 붙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후자를 택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특히 장르가 MMORPG라면 더욱 그런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일당백을 넘어 일당천을 할 수 있는 게임이 바로 RPG다.
30초라는 제약이 따르지만 이때의 나라면 독고무적이나 흑군조차도 농락할 자신이 있었다.
"놈이 시작한다! 버프 돌려!"
철홍이 먼저 주요 버프스킬인 성기사의 기도를 올렸다. 동시에 고려제일검객도 전쟁집중을 사용해 파티원에게 버프를 걸기 시작했다.
두 스킬 모두 즉발기가 아니기에 시전시간이 필요했다.
나머지 넷은 스킬시전이 취소되지 않도록 나에게 달려들었다.
"장판부터 깔아!"
"도발 조심하고 스킬만 써!"
"내가 먼저 간다!"
나에게 제법 많이 죽은 덕분에 꽤나 침착하게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팬티 한 장밖에 없는 나이니 장판형 스킬로 데미지를 주는 정공법이다. 물론 그 스킬도 즉발기가 아니라 다른 두 명이 차례대로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장판형 스킬에 스치기만 해도 죽겠지만, 결사항전의 영역은 단 한 번이라도 적을 맞춘다면 장판 위에서 칼춤을 추게끔 만들어 줄 수 있었다.
내가 주는 데미지가 너무 센 것도 있지만, 흔히 말하는 피흡 판정이 포션을 마시는 것처럼 조금씩 들어오는 덕분이었다.
먼저 인중여보의 손에 잡힌 창이 풍차처럼 강한 바람을 내뿜으며 중단에서 한 번, 하단에서 한 번 횡으로 휘둘러졌다.
스피어 유저가 가진 가장 범위가 넓은 공격스킬인 바람 휘두르기였다.
동시에 황비룡이 위로 뛰어올랐다. 그의 뒤로 살짝 배경이 어두워지면서 떨어지는 발뒤꿈치의 궤적은 반월을 그렸다.
권사의 공격스킬인 반월각은 물리공격으로 끝나지 않고 충격파가 3M 정도 뻗어가는 스킬이었다.
종으로도 횡으로도 내 움직임을 제어하는 식이었다.
거기에 대응하는 것은 까다롭지만 어려운 것은 아니다.
바람 가르기의 첫 번째 공격인 중단 휘두르기를 몸을 웅크려 피했다.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강렬한 풍압을 느낌과 동시에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발밑으로 바람 가르기가 바닥을 쓸듯이 휘둘러졌다.
"미, 미친!"
인중여보는 그걸 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위태로워 보이는 도박수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쯤이야 코볼트 감독관이 휘두르던 채찍에 비하면 여유로울 정도다.
"서커스도 거기까지다!"
땅을 박찬 내 몸과 자신의 발이 가까워지자 황비룡은 득의양양하게 소리쳤다. 그걸 보며 비틀어지는 입꼬리를 억누를 수 없었다.
반월각의 공격범위는 폭이 좁고 멀리 나가는 편이었다.
"…안 닿아. 병신아."
"어, 어어어!"
공중에서 고개를 젖힐 필요도 없었다.
황비룡의 발은 아슬아슬하게 내 몸뚱이를 스쳐 지나갔다. 밑에서 승천하듯이 그어지는 일검이 놈을 두동강 냈다.
"이미 다 보인다고."
놈들이 주로 쓰는 스킬을 계속해서 눈에 담았었다.
팬티 한 장만 입고 스치면 죽는 던전공략을 한 나에게는 일정거리만 다가가면 똑같은 스킬만 써대는 유저들이 3페이즈까지 가야만 하는 보스보다 훨씬 쉬웠다.
"커허억!"
땅에 떨어짐과 동시에 인중여보의 등을 베고 땅에 착지했다.
"뒤져라!"
그제서야 동두천호랑이가 바닥에 링거링 파이어를 썼다. 흙색의 바닥이 붉게 달아오르며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위를 걷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길은 지면만이 아니니까.
[벽타기를 사용합니다.]
리젠이 된 목재 구조물을 밟으며 동두천호랑이에게 다가갔다. 놈은 매직미사일이라도 급하게 썼지만, 캐스팅이 끝나 발동되는 것과 동시에 내 검이 상반신을 갈랐다.
"다들 비켜랏!"
뒤늦게 철홍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방패에는 은은한 파란색이 빛났는데 성기사가 탱커로서 역할을 하게 해 주는 신성한 방패였다.
방어력 30% 상승 및 체력 대비 20% 쉴드 생성이라는 엄청난 스킬이었다.
스킬 효과를 찬란하지만 그걸로도 철홍의 초라한 꼴은 감추지 못했다.
그 스킬로도 감추지 못하는 것은 움푹 파이고 끝이 갈려나간 방패의 형상이다.
콰드드득!
"커허어억!"
효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철홍의 체력이 겨우 4분의 1만 깎여나가는 것에 그쳤다. 뒤로 밀려나간 놈의 숨통을 끊으려고 했지만, 고려제일검객이 방패를 들이밀고 질주해 왔다.
"뒤져라. 썩!"
이를 악물고 달려들고 있지만, 기사와 성기사 등 탱커들의 동작은 너무 거칠고 직선적이었다. 적당하게 시선을 둔다면 스킬이 발동한 뒤에 피하더라도 늦지 않을 정도였다.
한 발자국 옆으로 물러나며 손에 쥔 검을 역수로 쥐었다. 그러고 힘껏 뻗었다.
그그그그극!
고려제일검객의 두터운 방패와 갑옷에 내 검이 부딪혔다. 불똥이 튀는 것과 함께 육신이 흔들렸지만, 더 높은 근력 수치 보정으로 인해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것은 고려제일검객이었다.
[도전과제 일도양단을 달성하였습니다.]
오랜만에 뜨는 알림이 시야를 가리자 얼른 손을 저어 없앴다.
"빌어…먹을!"
순례자를 직업으로 가진 대물이 높게 들어 올린 다리를 바닥에 찍었기 때문이다.
쿠우우웅!
그를 중심으로 부채꼴로 땅과 하늘이 흔들렸다.
순례자의 각성기 지면 구르기.
나에게 캐삭빵을 당한 헬조선순례자가 저걸 중심으로 썼었다. 그 파훼법이 뻔히 들켰음에도 쓴 이유는 간단했다.
앞서 벽타기를 써서 쿨타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헤이스트를 사용합니다.]
"해 봐."
지면 구르기는 순례자가 초반에 얻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스킬이라고 할 수 있다만, 그 판정은 지면에서 발만 떼면 피할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쿠구구구구!
들썩 거리는 지면을 그대로 밟았다.
한 걸음을 내딛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뚝뚝 떨어졌다. 본래라면 2초도 되지 않아 죽겠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감사하게도 고려제일검객을 죽이고 남은 체력회복 효과가 있었다.
"왜 안 죽…!"
"네가 죽으면 되잖아."
체력이 떨어질 것처럼 보이다가 다시 차오르기를 두 번 정도 반복하자 대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놈은 다급히 스킬들을 펼쳐댔지만, 이미 헬조선순례자를 상대하느라 진즉 외우던 것들이었다.
앞선 두 사람의 것보다 더 여유롭게 피해 죽였다.
"제기랄! 너희들이 몸으로 막아!"
홀로 남았던 철홍의 다급한 외침으로 보건데 앞서 죽은 황비룡과 인중여보가 부활한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잠깐은 무적판정이니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위풍당당한 기세는 어디 갔지?"
"웃기지 마라. 이제 20초도 남지 않았으니까!"
"네가 그 20초 버텨 보든가."
철홍에게 던진 물음은 단순한 도발 따위가 아니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철홍의 장비는 처음과 달리 여기저기 파이고 금이 가있었다.
착용한 장비의 내구도가 점차 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증상은 인중여보도 도드라졌다.
남은 여섯 명의 잔당 중에서도 이 둘이 오랫동안 날 포위하면서 죽인 축이었기 때문이다.
카오 수치도 중첩이 되었을 것이니 다른 이들보다 죽음에 대한 페널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내구도가 저런데 과연 레벨은 어떨까.
철홍은 그런 것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는지 용맹한 돌격으로 거리를 좁혀 왔다. 스킬에는 정면으로 대응할 수 없기에 옆으로 몸을 돌리자마자 그가 두 팔을 하늘 높이 올렸다.
내가 알던 용맹한 돌격의 마지막 동작과는 달랐다.
"너만 잔기술을 쓰는 줄 알아!"
내가 쓰던 평캔과 유사하게 스킬의 연계를 이어가려는 것이다.
[1인 도발을 사용합니다.]
[상대가 도발에 걸렸습니다.]
"응. 차단."
스킬을 쓸 줄 아는 것은 그만이 아니다. 나도 상대를 괴롭힐 수 있는 스킬이 있다.
"제기랄! 이 따위 스킬에!"
철홍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나를 공격해 왔다. 스킬이 시전 중에 캔슬이 되었으니 그마저도 형편이 없을 정도로 느렸다.
터어엉!
나에게는 정석적인 튕겨내기 이후, 평캔으로 찌르고 베는 것으로 목숨을 끊었다.
"이 지긋지긋한 놈!"
"네놈의 시간은 이제 끝이다!"
30초의 시간은 벌써 12초밖에 남지 않았다.
상대 또한 나름대로 경력이 있는 유저들이니 알게 모르게 내 움직임을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안 된다니까."
천하제일 길드 여섯 명은 아직도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고 있었다. 활성화된 결사항전의 영역에서 누구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마치 오망성을 그리듯이 서로 찢어져서 나를 대하는 것이 우습기만 했다.
먼저 고려제일검객의 십자베기를 사용해 투박한 검으로 거칠게 공간을 찢었다.
그 옆에서 인중여보가 삼단찌르기를 사용했다. 같은 지점으로 찔러 오는 창 또한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의 공격은 매섭지만 두렵지 않았다.
난 공격범위에 항상 가깝게 붙어있었기에 스킬이 끝난 후의 틈마다 그들의 숨통을 끊었다.
"30초 끝났다. 이 개새끼야!"
30초에 두 번의 죽음을 골고루 가져간 뒤에 부활할 철홍은 여전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다만, 그의 모습은 전보다 더 초라해 보였다. 장비의 내구도가 더 떨어져서 완전히 사용불가가 되기 일보직전으로 보였다.
"그래서?"
천하제일 길드원 대부분이 이탈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이전처럼 무기력하게 죽어 줄 마음도 있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서 좀 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선택은 탁월했다. 뜻하지 않게 천하제일 길드가 무너졌고 내 집중력도 돌아왔으니까.
"흥. 내가 가장 약해 보였다는 거냐!"
먼저 타켓으로 잡은 것은 순례자인 대물이었다. 각성기인 지면 구르기가 빠진 놈은 내가 가까이 오자 신성의 빛갈래를 사용했다. 기도를 올리기 위해 맞닿은 두 손바닥의 틈에서 빛을 뿜는 스킬이었다.
치지지직!
빛은 위에서 아래로 그어지며 나를 쫓아왔다. 판정이 좋은 스킬은 아니기에 자세를 낮추며 놈에게로 다가갔다.
신성의 빛갈래가 나쁜 스킬은 아니지만, 저 스킬에 단점은 움직이는 대상에 취약하다는 거다.
이때까지 나를 상대로 쓴 적이 없어서 추정이 되지만 저건 너무 멍청한 짓이다.
신성의 빛갈래가 제대로 딜을 보이려면 나보다는 훤씬 느린 탱거들에게 써야만 했다. 이 애매한 스킬들로 인해 순례자가 이도저도 아닌 취급을 받는 이유였다.
"왜 안 맞는……."
"너 그거 유저한테 쓴 적 없지?"
숨통을 끊어 말을 잘라 버린 뒤, 다음 표적에게로 달려들었다.
스킬을 준비하던 동두천호랑이를 죽이고 인중여보의 공격에 스쳐 죽어 버렸다.
그 다음에 부활한 뒤에는 무적판정을 이용해 철홍에게 다가가 놈의 숨통을 끊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왜 안 맞지? 따로 스킬을 쓴 것 아냐?"
"아냐! 밑에 장판 사라졌잖아!"
"저 움직임이 스킬이 아니라고?"
"미, 미친 소리 하지 마!"
다시 돌아온 10분에 복수를 꿈꿨을 천하제일 길드 여섯 명은 적잖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결사항전의 영역이 주는 단 30초와 그 이후의 10분에서 보여주는 무기력함이 너무나 상반되었던 탓에 내 움직임도 스킬로 인식을 한 것이다.
단체로 스턴이라도 걸린 것처럼 버벅이는 놈들을 죽이고 또한 죽었다.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쓰던 검의 내구도가 대폭 줄어들어서 판매하지도 못해서 인벤토리에 쟁여 둔 여분의 무기를 꺼내야만 했다.
[영리한 사냥꾼의 검]
-등급 : 매직.
-공격력 : 227~244.
-효과 : 체력이 10% 남은 적에게 50의 고정데미지 추가.
야수형 몬스터 추가 데미지 2% 증가.
출혈LV1.
절단LV1.
상점에 판매를 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구매처를 찾을 수 없다. 나야 조건이 충족되어서 보이지 않지만 착용레벨 40에 근력이 60의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길마님. 지금 정비를 해야겠습니다. 장비가 지금 깨지려고 하는데요."
"입 닥치고 저 새끼나 잡아!"
"레벨도 다운 되셨어요."
내가 새 검을 꺼내자 대물이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
예상을 하지 못했는지 철홍도 쩍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