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69화 고인물은PK한다.
썩이나감이라는 논할 때는 빠질 수 없는 이가 있었다.
바로 고려제일검객이다.
출시 초창기라지만 랭커도 찍은 그가 PvP에서 썩이나감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극공전사라는 메타가 퍼지면서 썩이나감과 유사하게 버서커의 소울을 극대화하기 위해 장비를 줄여서 데미지를 높이는 경우가 종종 나올 정도였다.
그 희생양이 된 후, 고려제일검객은 꽤나 고충을 겪었다.
안으로는 길드장인 철홍의 비난과 질책이었고 바깥에서는 즐겜 관종러한테도 진 올드유저라는 비아냥이었다.
최근에야 썩이나감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다지만, 고려제일검객으로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썩이나감을 죽여서 분풀이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번 통제에서 뒤늦게 합류한 것이 아쉬웠다. 진즉 포위조에 있었다면 더 많이 썩이나감을 죽였을 테니까.
"걱정 마라. 커뮤에도 이미 글을 올렸으니까 놈의 추태는 확실히 박제할거다. 처음에 기세를 꺾고 너 위주로 갈 거야. 알겠지?"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길드장님."
"너 고생 많았어. 그 새끼 진짜 독종이더라. 서른 번을 넘게 죽어도 도망치려고 아득바득 기를 썼었다고."
앞서 썩이나감의 통제지휘 중 일부를 담당했던 철홍은 뒤늦게 접속한 고려제일검객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고려제일검객은 그 신뢰에 오히려 떨떠름함을 느꼈다.
철홍은 언제나 이렇게 살갑게 대했다가 조금이라도 일이 틀어지면 귓구멍에다가 쌍욕을 쏟아붓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천하제일 길드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 날이기를 바랍니다."
"물론이지. 이번에 꾼들이 제대로 깔렸다고."
"…꾼이요?"
"그래. 꾼! 무과금 쌀먹들 중에서 약자 코스프레하면서 커뮤니티 민심을 모으고 일 저지르는 놈들 말이야."
철홍은 궁신과 협력을 한 과정을 설명해 줬다.
현재 게임 안팎에서 통제를 당하는 무과금 유저들을 모아서 흔히 말하는 반왕을 일으키는 휘파람이 일반 유저가 아니라 이런 일마다 나타나는 전문적인 업자라는 소리다.
"미쳤군요. 다크게이머들이 쌀먹이라 불리면 싫어한다더니."
고려제일검객은 혀를 내둘렀다.
엘리멘탈 소울처럼 PK가 활성화되는 게임은 과금러가 가지는 힘이 곧 정의였다.
엘리멘탈 소울2가 비교적 덜 하더라도 PK패치로 인해 그 기류가 이어지던 것 같았다.
그런데 고작 이삼일 만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특히 듣보잡 길드의 통제를 풀고 사과를 받는 것도 엄청난 거대길드가 무너진 것처럼 대대적인 선전이 되는 것에는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흔히 아이템이나 금화를 팔아서 용돈을 챙기는 쌀먹이 하는 일과는 스케일이 달랐다.
"어쩐지 하루 만에 여론이 바뀌더라니."
"엠페러나 흑랑만 아니었으면 썩이나감도 이런 식으로 접게 했을 텐데."
"아. 그 녀석에 대해 좋지 않은 평판들이……."
"그래봐야 푼돈이지. 쳇. 경력이 없는 다크게이머면 아예 일거리가 끊겼을 텐데."
철홍은 썩이나감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을 부풀리는 것에 조금 신경을 썼다고 시인했다.
으득.
'개자식! 어쩐지 썩이나감의 소문이 나빠지면 덜 갈구나 싶었더니!'
고려제일검객은 말없이 이를 악물었다.
철홍은 전형적으로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마인드였다.
전작에서부터 미운정을 쌓지 않았다면 당장 길드탈퇴라도 했을 지도 몰랐다.
"네가 애들 데리고 포위 잘 해라. 난 이제 저 새끼 죽이고 구경할 테니까."
철홍은 모든 수모를 갚을 날이라며 썩의 이름을 부르고 그에게 가까이 갔다.
[동해물밥 : 낙오된 화전민 마을 실화냐? 진짜 썩이나감 통제야? 아직도?]
[멜로디 : 통제는 맞음. 보기는 함.]
[경찰청쇠찰상 : 마을에서 대놓고 PK 한다니 실화냐 ㅋㅋㅋㅋㅋ.]
[통제불가 : 변태검사 접겠누.]
[혈마 : 팬티 벗고 소리 질러어!]
슬쩍 전채채팅을 보니 커뮤니티에 올라간 썩이나감에 대한 천하제일 길드의 입장문이 화제가 된 것 같았다.
그 사이에 썩이나감과 철홍의 결투가 시작되었다.
철홍은 천하제일 길드의 유일한 랭커였다. 또한 과금도 아끼지 않아서 그의 장비는 대부분의 같은 성기사 랭커들 중에서도 돋보일 정도였다.
'나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아.'
고려제일검객의 기사와 철홍의 성기사는 모두 견습기사의 1차전직이다. 유사 직업군으로 기사가 탱커성향이 짙다면 성기사는 보다 아군의 버프와 간략한 치유 정도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썩이나감에게 좋은 먹잇감일 수 있지만, 철홍이 두른 아이템은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것이다.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고려제일검객은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봤으니 철홍이 같은 실수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예상을 빗나갔다.
썩이나감은 감히 철홍에게 정면대결을 선택했다.
서로의 일격이 교환되는 것을 보고 고려제일검객을 포함한 모두는 동귀어진 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쓰러졌어야할 썩이나감은 휘청거릴 뿐이었다. 반대로 우뚝 섰어야 할 철홍의 체력만이 깎인 상태였다.
결판이 이루어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
'저건 스킬인가!'
짧은 찌르기 후, 곧바로 이어지는 베기.
철홍은 죽었고 썩이나감만이 서있었다.
"다음."
"……!"
그리고 썩이나감이 고려제일검객을 보며 움직였다.
[YOU DIED.]
고려제일검객은 반응하지 못했다. 방패를 들거나 뒤로 물러나기도 전에 몸통을 썩이나감의 검이 베어 지나갔다.
"아."
뒤늦게 소리를 낸 것은 회색으로 변한 화면 속에서 보이는 것은 자신의 시체를 밟으며 주변을 쓸어가는 사신의 모습이었다.
* * *
결사항전의 영역의 유지시간 동안 날 포위한 모든 적들에게 공평한 죽음을 안겨 주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무리였다.
고려제일검객을 죽인 시간도 1초가 마치 1분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야! 왜 다 한 방이야!"
"길마 새끼랑 고려 새끼 뒤진 것 몰라?"
"죽기 전에 죽여! 팬티 한 장이잖아!"
랭커인 철홍이야 두 번 정도 견뎠지만, 당장 그의 아래라고 평가를 받는 고려제일검객마저도 한 번의 공격으로 무너트렸다.
레벨도 아이템도 그보다 훨씬 떨어지는 놈들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없다.
30초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 나에게서 도망치며 유린당하는 버러지들뿐이었다.
양떼가 되어 뛰어노는 늑대가 된 상황은 이때까지 죽으면서 버텨온 모든 것을 날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남은 시간이 10초도 남지 않았을 때부터는 노선을 다르게 했다.
철홍을 비롯한 간부진만을 노린 것이다.
"씨바아아아알!"
세 번째 부활과 함께 욕설을 내뱉으며 철홍이 내게 달려들었다.
무적상태인 놈을 무시하고 내게서 도망치는 천하제일 길드원 하나를 노렸다.
콰앙!
"나를 무시하지 마라!"
어떤 스킬인지 모르겠지만 철홍에게 한 대를 맞자 시야가 어두워졌다가도 내 검에 죽은 길드원 덕분에 피가 고스란히 차올랐다.
"도대체 무슨 스킬이야!"
"무적 동안 떠들어라."
"몇 번이고 죽어 주마. 끝까지 가지는 않을 테니까!"
철홍과 적당히 대화를 하면서도 내 검은 쉬지 않고 다른 간부들을 노렸다. 그러고 무적판정이 끝난 그를 죽였다.
"다음. 고려제일검객."
30초가 끝나기 전에 죽는 순서는 오로지 내가 정한다.
나에게 호명을 당한 고려제일검객은 기꺼이 도망치려고 했지만, 사실상 뚜벅이 챔프인 기사가 나를 피할 수 없었다.
"다음은 인중여보."
"자, 잠깐. 말에만 타고!"
세 번째는 포위조를 하면서 날 실컷 괴롭혔던 인중여보였다. 무적상태가 끝나고 말을 소환한 그였지만, 말에 올라타던 동장 그대로 등을 베어 죽였다.
"황비룡."
"사, 살려……!"
네 번째는 천하제일 길드의 부길드장이었다. 차례대로 죽여 놓았기에 무적이 풀리는 순서도 다르지 않았다.
"나머지 놈들 뭐하는 거야! 우리를 지키라고!"
"우리보다 네놈들이 죽어야지!"
무기력하게 죽어나가는 것에 다음 사냥감들이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상대적 고렙인 그들보다는 저렙인 일반 길드원들이 더 효율적인 것은 맞다. 아이템 복구비용도 저렴하고 요구되는 경험치도 적을 테니까.
하지만 저런 식으로 말을 꺼내면 맞는 말이 아니라 그냥 처맞는 말이다.
"왜 그러지? 즐겨. 나한테 하던 짓거리잖아."
게임을 하면서 제일 재미가 없을 때를 꼽자면 아무것도 못하고 죽을 때와 다시 살아나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였다.
난 저놈들을 마을에 끌어오기 위해 몇 번이고 죽었었다.
그런데 고작 몇 번도 죽지 않았다고 이렇게 징징거릴 줄은 몰랐다.
"저 새끼 스킬 끝났다! 죽여!"
"……."
다시 부활한 철홍은 내 스킬을 보고 소리를 쳤다. 전이라면 덤벼들었을 길드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간부 아닌 애들은 길탈하고 가라. 이곳보다 좋은 곳 많다."
"길드장 말 들어. 이 병신들아! 이 새끼 게임 접을 때까지 담군다고!"
철홍도 무언가 수상함을 눈치를 채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에 응하는 이들은 없었다.
"…저녁 시간이라 이만 가 볼게요. 실례합니다."
그때 천하제일 길드원 하나가 로그아웃을 해 버렸다.
"아. 나도. 인강 들어야해서."
"통제 그만할래요. 그 시간에 렙업이나 하려고요."
처음이 어려울 뿐, 다음부터는 아니었다. 다른 길드원들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로그아웃을 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레벨이 낮다는 점이었다.
"쿨타임 동안 죽여 봐. 그 뒤는 알지?"
이변은 일어났고 나는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으득!
철홍은 이를 악물었다. 말이 좋아 로그아웃이지 사실상 길드탈퇴까지 이어질 것도 뻔했다.
길드가 와해가 되고 있지만, 그걸 막을 수단은 나와 계속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레벨 1을 찍을 때까지 죽어 보자."
물론 내가 그렇게 될 일은 없다.
"몇 시간이든지 죽여 주마. 그리고 이 자리에서 나간 병신들까지 모조리!"
철홍은 열불을 토하며 메이스로 날 후려쳤다.
[YOU DIED.]
회색 화면과 함께 10분의 죽음이 나를 기다렸다.
철홍은 악에 받쳐서 내가 부활하기 바쁘게 죽였다. 얼마나 답답했는지 내가 무적판정을 받는 동안에도 공격을 해올 정도였다.
죽어 나가기 바쁜 와중에 주변을 둘러보면 그 모습에 질려하며 떠나는 천하제일 길드원들이 보였다.
"후우. 후우. 저 새끼 지친 것 보여? 별것 없어. 죽이라고!"
아직 스태미나가 바닥이 났는지 잠깐 휘청이던 그는 남은 이들을 재촉했다. 그제야 고려제일검객을 비롯한 간부들이 돌아가면서 나를 죽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온 가축과 같아 보였다.
"네들만 있으면 된다. 다 길드 탈퇴 시키고 처음부터 우리는 시작한다."
철홍은 신경질적으로 허공에 삿대질을 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라진 길드원들을 일방적으로 쫓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결사항전의 영역을 사용합니다.]
그 모든 것을 보며 세는 것을 포기한 부활을 했다. 그러고 기계처럼 나에게 무기를 들이대는 적들에게 다시 30초의 죽음을 고했다.
* * *
[천하제일 길드 봄?]
왜 쟤네 길드원 6명밖에 안 남았음?
엘리멘탈 소울2 아웃벤의 자유게시판에 짧은 글이 올라왔다. 한창 썩이나감을 통제중이었을 길드원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댓글에는 신분세탁을 하는 것 같다던가 관심 없다는 짧은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천하제일 길드 망했음.]
아. 진짜 병신 같은 길드 들어가서 개고생했다.
썩이나감 통제는 개뿔.
한 명한테 30초 동안 다 썰렸다.
길드장이랑 간부 새끼들 지들 대신에 죽으라고 지랄하는데 X 같아서 나옴.
뒤이어 천하제일 길드원이었던 유저가 통제에 대한 실상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레벨도 낮은 일반적인 길드원이었기에 자세하게 풀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간단한 인증이 커뮤니티를 들끓게 했다.
바로 썩이나감이 천하제일 길드를 학살하는 장면이었다.
30초의 사신.
썩이나감을 보며 한 유저가 남긴 댓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