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68화 고인물은카오다.(2)
"병신들인가?"
낙오된 화전민의 마을에서 일어난 돌발상황을 들은 궁신은 비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썩이나감에 대한 통제는 잘 이루어지던 상황이었다.
그놈이 카오로 만든 저주술사를 마을에서 역으로 통제를 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어차피 작정하고 통제를 한 이상 카오가 되는 것은 당연했으니까.
문제는 카오가 된 놈들을 구하겠다고 뛰어든 모양새였다.
"그쪽 애들은 힘겨루기 시스템 몰라요?"
궁신은 천하제일 길드원들의 상태에 소름이 돋았다.
전작보다도 천하제일 길드의 형편이 좋지 않다더니 길드원 꼴을 보니 확실하게 느꼈다.
게임 스펙을 떠나 이해도가 매우 불량했다.
"…급하게 모집한 애들이라 그래."
"애들 빼라 그래요."
"그럴 거다. 이제 정예가 올 시간이니까."
낭패를 본 철홍이지만 아직 자신이 있었다. 이번 일에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이가 올 테니까.
[철홍 : 천하제일 길드장으로서 명한다. 지금 낙오된 화전민의 마을에 묶여있는 놈들은 그대로 시간을 끌다가 로그아웃해라.]
이왕 엉망이 된 판에 썩이나감이 묶이도록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초기목적대로 이곳에서 시간을 뺏고 있는 것만으로도 통제가 되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어이. 궁신이."
"왜. 철홍 아저씨."
"대박 떴다."
"그 새끼 밥 먹으러 갔대?"
궁신도 이쯤이면 썩이나감이 한 번 물러날 때가 되지않았나 싶기도 했다.
"그놈이 마을에서 PK를 했다."
"그 신중한 놈이?"
"그래. 지친거지."
철홍은 물론 궁신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썩이나감은 지독한 놈이었다. 경험치와 돈이 썩어나는지 제대로 된 반항도 하지 않고 죽기만 해댔다.
"그렇게 죽었으니 놈의 경험치는 영 퍼센트일거다."
"그리고 카오가 되서 죽으면 레벨다운도 되지."
궁신은 자신이 척살을 당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 원흉에게 모든 것을 갚아줄 때였다.
"우리 애들로 끝내지."
"기분 내려고?"
"커뮤에도 박제해. 천하제일이 복수한다고."
철홍은 계획을 바꾸고 천하제일 길드만으로 썩이나감을 없앨 결심을 했다.
"해 봐. 알아서."
궁신은 굳이 그걸 말리지는 않았다.
전작에서도 철홍이 자그마한 원한도 잊지 않는 쪼잔한 인간임을 잘 알아서였다.
* * *
적들이 후퇴를 한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가뭄의 단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숫자가 줄어드는 만큼 포위망이 옅어질 것이고 최소한 낙오된 화전민의 마을에서 정비를 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나의 경우는 아니었다.
저주술사 두 놈이 로그아웃을 해서 튀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놈들이 그냥 물러나게 할 수 없었다.
바깥에서 미친 듯이 죽은 이유가 단순히 카오를 양산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내 전장은 이곳이어야만 한다.
궁지에 몰린 놈이 최후의 발악을 하는 장소로 보여야만 했다.
[마을에서 해당 스킬을 유저에게 사용할 경우 잠재적 카오 상태로 인식이 됩니다.]
스킬 슬롯을 건드리는 순간,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기꺼이 무시를 하고 1인 도발을 사용했다.
[1인 도발을 사용합니다.]
[상대가 도발에 걸렸습니다.]
사정거리를 벗어나기 전에 쓴 스킬에 적 하나가 걸렸다.
도끼왕찍어라는 닉네임으로 특별하게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냥 머릿수만 채우고 있는 놈이겠지.
"이 비겁한 놈이!"
다른 곳은 몰라도 천하제일 길드의 나부랭이가 할 말은 아니었다.
게임 초기에 날 영입하려고 어거지를 씌운 것도 모자라 직접 통제를 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놈들이 아닌가.
도끼왕찍어는 등에 찬 도끼를 빼들고 힘차게 휘두르려고 했다.
"마흔 명이 넘는 인원이 단 한 명을 통제하는 주제에?"
엑스 유저는 탱딜 캐릭터다. 화려한 스킬은 없지만 묵직한 손맛이 정평이 나 있지만, 느린 동작은 늘 단점으로 꼽혀 왔다.
한 템포 늦게 공격을 해도 내 찌르기가 더 빨랐다.
"저놈이 PK를 했다!"
"귓말 때려! 이러면 이야기가 다르다!"
"마을에서도 죽일 수 있다!"
동료의 죽음과 붉게 물들어진 내 닉네임을 도망치는 적들이 눈에 담았다.
잠깐 낭패에 빠졌던 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마을 한복판에서 PK를 한다. 이로서 유일하게 안전이 보장을 받은 곳에서도 위협을 받게 된다.
상대를 카오로 만들기에 바빴던 나였기에 명백한 실수라고 보이기 좋았다.
"저 변태새끼 결국 못 참고 터트렸네!"
"마을 안에서부터 통제해 주마!"
나머지 셋은 그대로 물러나는데 뒤에 쳐져 있던 두 명이 다시 나에게 달려왔다.
랭커도 아닐 뿐더러 착용하고 있는 장비를 보니 간신히 40레벨에 턱걸이를 한 것으로 보였다.
길드 내부에서 별로 중요한 위치도 아닌 놈들끼리도 저렇게 의견이 갈리는 상황이 잦다.
철홍이 얼마나 길드를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했는지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예전에 천하제일 길드는 나름대로 군기는 잘 잡혀 있던 편이었으니까.
"내가 먼저다!"
두 얼간이가 오는 사이에 누가 부활을 했나 싶었더니 방금 전에 죽은 도끼왕찍어였다.
잠깐의 무적판정 동안에 그는 아까 전에 못했던 공격을 시도했다.
엑스 유저라면 꼭 배우는 주요 스킬 중 하나인 맹공격이었다. 어깨를 시작해서 도끼날까지 은은하게 퍼지는 이펙트를 굳이 정면으로 받아낼 필요가 없었다.
백스텝으로 최소한의 거리를 확보한 후, 구르기를 연이어 썼다.
방향은 두 얼간이들에게였다.
하나는 블레이드 유저였고 다른 놈은 권사였다.
놈들은 가까이 붙기도 전에 삼연참과 철권난무를 사용했다.
스킬을 뺀 것으로 만족하고 검을 다시 도끼왕찍어에게 돌렸다.
놈은 맹공격 이후에 버프 스킬로 자신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때 생기는 공백이 치명적인 것을 모르는 것 같다.
"헛!"
구르기로 거리를 좁히자 도끼왕찍어는 깜짝 놀라는 소리를 냈다.
도끼도 제대로 못 휘두르고 버벅거리는 놈의 손목을 찌른 뒤, 허벅지를 베어내며 확정적으로 죽였다.
"저 새끼들……."
슬쩍 주변을 훑는 와중에 멀리서 마을로 들어오는 한 무리의 이들이 보였다. 개중의 하나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천하제일 길드장 철홍.
날 통제하고 있는 두 길드 중 한 명이 직접 행차한 것이다.
"저 새끼 도망 못 치게 잡아!"
"길드장이 전원 소집했어!"
심지어 로그아웃해서 도망을 쳤던 저주술사들까지 재접속을 했다.
이건 완벽하게 나 하나를 잡겠다는 거다.
천하제일 길드원 서른 명이 광장 주변을 둘러쌌다. 그중에는 궁신도 없었고 스피릿 길드원도 없었다. 이로써 내 계획은 어긋났다.
"날려먹은 코인 같네."
천하제일 길드원 중에서 카오는 고작 열 명뿐이었다. 기껏 작업을 치고 존버를 때렸더니 떡락하던 코인들이랑 다를 바가 없다.
"써억!"
철홍은 서로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쳤다. 천하제일 길드만이 온 것도 저놈의 결정일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소리 안 질러도 들려."
"지금이라고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해라."
"내가 왜?"
"감히 우리 길드를 우습게 본 죄!"
철홍은 과연 예전 일을 잊지 못했나보다.
날 억지로 데려가려던 고려제일검객이 역으로 진 것이 무슨 문제인가.
"내가 너네 길드 욕 하디?"
그래서 그때 내게 패했던 고려제일검객에게 눈길을 보냈다.
지금은 랭커에서 밀려났으니 나와 비슷한 레벨대로 짐작할 수 있었다.
"……."
고려제일검객은 양심이라도 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날 향한 적의를 보이는 것을 보니 그때 자존심이 많이 상했나보다.
철홍은 내가 자신을 무시하자 얼굴을 붉혔다.
"감히 날 무시하고 다른 놈과 대화를 해?"
"풋! 생각해 보라고. 엠페러 길드도 안 갔는데 너네 길드를 가겠냐? 흑랑 길드도 나한테 관심을 보였는데 너네를 가겠냐고. 대가리에 총 맞음? 지금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도 스카웃될 건데."
일반적인 유저와 난 다르다.
다크게이머라고 이미 알려졌어도 변태검사라고 불리던 처음보다 평판이 떨어질 일도 없었다. 또한 돈으로 움직이는 이 바닥 덕분에 단순한 길드 합류를 떠나 현실적으로 좋은 조건을 제시 받았다.
다크로얄이나 히든레코드만이 회사가 아니고 골드캐쉬만이 팀이 아니니까.
"이이익! 우리 길드가 어디가 어쨌다는 거냐! 전작에서부터 전통을 이어온……."
"전통은 개뿔. 네가 개지랄해서 길드원들 하나씩 나간 걸로 유명했는데. 그러니 신작으로 넘어올 때 길드가 두 동강이 나지. 유구한 갑질과 인성논란이 전통이면 전통이겠네."
"……."
철홍은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저 반응을 보니 내가 다른 게임을 하다가 시작한 뉴비로 여겼나 보다.
"…뒤에서 내 정보를 샀구나!"
"그걸 돈 주고 사겠냐?"
"건방진 놈. 게임을 접을 때까지 통제해 주마!"
"해 봐. 누가 이기나."
밥상이 차려졌다면 수저를 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지금부터 이곳은 일반적인 마을이 아니다.
개미무리들을 죽음으로 이끌 개미지옥이다.
죽음에 대한 모든 페널티를 빗겨나가는 불사자인 나와 달리 카오가 된 천하제일 길드는 경험치 감소를 떠나 레벨까지 내려가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가 잃을 것은 시간뿐이었다.
"내가 직접 죽여 주마!"
독고무적과 같은 성기사 클래스인 철홍은 용맹한 돌격을 사용했다.
성기사가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주요한 이동기로 10M를 돌격함과 동시에 물리방어력을 높여 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성기사들이 공통적으로 배우는 스킬로 개인적으로 탐이 나던 스킬 중 하나였지만, 매물이 나오지 않아서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구할 수 없다면 익힐 수 없다.
직업에 관계없이 모든 걸 배울 수 있다는 불사의 큰 단점이기도 했다.
[결사항전의 영역을 사용합니다.]
[헤이스트를 사용합니다.]
"30초 동안 몇 번 죽을 것 같아?"
피할 곳은 없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아까 전처럼 구르기나 백스텝은 써봤자 날 포위한 다른 적에게 죽을 뿐이다.
이곳에서 전황을 뒤집는다.
그래서 꺼낸 것은 결사항전의 영역이었다.
불사자 전용스킬인 칠죄종 스킬을 제외한 최고이자 최강의 스킬. 고작 30초라는 시간과 반경 5M가 유효범위라는 것이 아쉽지만, 그걸 뛰어넘을 정도의 성능이 있었다.
"뒤져라!"
거리를 폭발적으로 좁힌 철홍은 먼저 배쉬를 사용했다.
견습기사 때부터 익히는 기사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창을 힘껏 휘두르는 스킬로 넉백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낮은 확률로 상태이상인 기절까지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결사항전의 영역을 쓴 이상 뒷걸음질을 칠 필요가 없다.
기꺼이 맞서 싸울 것이고 저놈의 두 눈에 YOU DIED라는 글자를 박아 버릴 것이다.
퍼엉! 푸욱!
놈의 방패가 내 머리통을 후려치자 휘청거리는 시야에서도 내 검은 정확하게 어깨를 찔렀다.
"…안 죽었다고!"
"그러게."
철홍은 뒤로 밀릴 뿐 멀쩡하게 서 있는 나를 보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배쉬가 생각보다도 조작에 방해가 컸다. 본래라면 평캔으로 찌르고 베었을 테니까.
놈이 잠깐 머뭇거리는 놓칠 수 없었다.
헤이스트가 끝나지 않아 빨라진 발을 내밈과 동시에 검을 찌르려고 했다.
그때 철홍의 시선이 내 검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네놈만 튕겨내기를……!"
"병신이냐?"
의심이 확신이 되는 것은 그 잘난 입을 나불거릴 때였다.
내가 튕겨내기를 애용하는 것은 누구나 아는 바였다. 검보다는 방패가 면적이 더 넓어서 튕겨내기가 더 용이했다.
내 장점을 역이용하겠다는 속셈이었겠지만, 지금의 찌르기는 평캔을 위한 예비동작에 불과했다.
검끝을 가슴팍이 아니라 허벅지로 비틀었다.
후웅!
"허억!"
철홍의 방패가 허공을 휘저었다. 전작의 단순한 조작에만 익숙한 올드유저답게 신작의 기본적인 조작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푸욱! 촤악! 촤악!
허벅지를 검끝이 찌르는 것에 성공한 판정이 느껴지자마자 우측으로 검을 베었다.
마지막에 건맨의 소울의 효과가 터져서 철홍은 그대로 죽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