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은 옷을 입지 않아-67화 (67/201)

제067화 고인물은카오다.

[YOU DIED.]

우거진 수풀 사이를 벗어나자마자 화살은 정확하게 관자놀이에 박혔다. 생명을 잃었어도 캐릭터는 가속을 잃지 못했다.

앞으로 고꾸라진 몸뚱이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끈이 잘려 내팽개쳐진 목각인형 같은 꼴은 익숙해도 썩 즐거운 모양새는 아니다.

로그를 확인하니 궁신이었다.

몇 번이고 좌우를 찌르니 드디어 놈이 위치를 변경하기 시작했다.

세 번 반복한 결과 원샷원킬도 위치를 바꾼 것을 봤다.

창공의 독수리까지 계속 써서 마지막까지 확인한 결과 궁신과 원샷원킬이 정반대라는 법칙은 변하지 않았다.

궁신이 동원한 것은 천하제일 길드와 스피릿 길드에서 스무 명씩이었다.

길드 건물 레벨에 의해 가입인원이 각각 서른다섯 명인 그들이 전력을 다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전원을 동원하기보다는 일부 병력은 휴식 및 레벨업을 하겠다는 말이다.

장기전을 염두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 나에게 얼마나 지극정성인지 알 수 있었다.

"카오는 스물아홉 밖에 못 만들었네."

궁신을 포함해서 날 통제하는 이들은 마흔한 명이다. 그중에서 스물아홉이라면 내 죽음의 기댓값에는 못 미치는 수였다. 그래도 현장에 있는 스피릿 길드 전원은 빠짐없이 카오가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시작이다."

다시 낙오된 화전민의 마을에서 부활해 북쪽으로 말을 몰았다.

"저 새끼 간다!"

"죽여라. 죽여!"

마을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은 어느새 두 명으로 고정이 되었다. 사실상 대기조는 사라지고 모두 포위조로 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카오들은 그냥 재 죽여버려! 카오 아닌 애들은 길막하고!"

나를 억누르기 위해서는 스피릿 길드에게만 의존할 수 없었다.

천하제일 길드도 카오를 더 늘리지 않기 위해서 먼저 카오가 된 이들이 전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나를 죽이기 시했다.

두두두두두!

"기마전이면 내 특기지!"

천하제일 길드의 포위조에서 유독 눈에 띄던 놈이 왔다.

닉네임은 인중여보.

삼국지의 인중여포 마중적토에서 따온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해당하는 닉이 먹힌 것 같았다.

닉값을 하기 위해서인지 보기 드문 승마스킬도 보유한 그가 보이는 탈것의 이동속도는 버거울 정도로 빨랐다.

"한 번 더 보내주마!"

인중여보는 창을 멋들어지게 휘두르며 다가왔다. 그러나 스킬 특유의 임펙트가 없었다.

즉, 저건 일반적인 공격에 불과하다. 그것도 멋에만 의존해 효율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허점투성이의 동작뿐이었다.

불사자이기에 자주 맞이한 죽음이 놈에게는 승리로만 다가온 것만 같다.

서로 호흡이 다른 유저 상대로 튕겨내기를 쓰는 것은 아주 멍청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멍청한 놈이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터엉!

풍차처럼 힘차게 휘둘러지던 창대를 초라한 나의 검이 튕겨냈다.

"……."

순간 주변의 침묵을 느꼈다.

검신을 타고 흐르는 진동보다도 더 큰 지진이 인중여보의 동공에서 보였다.

"이, 이이익!"

인중여보는 경직에 빠졌다. 흔들리는 말위에서 금방 떨어질 것처럼 보였지만, 안장을 감싼 두 다리로 말의 허리를 강하게 압박하고 말의 고삐를 쥐어뜯듯이 잡아당겼다.

가까스로 균형을 가까스로 잡기 시작한 것이다.

푸히이이이잉!

말은 프로그래밍이 된 대로 앞발을 높게 들어 올리며 포효했다.

인중여보 또한 자신의 말처럼 고함을 치기 위해 입을 벌리려는 순간 나의 검이 목을 그었다.

[당신이 인중여보 님을 PK하였습니다.]

로그에는 한 줄의 짧은 글이 새겨졌다. 카오 상태인 놈이라 죽여도 어떤 페널티가 부여되지 않는다.

"이…놈이!"

"반격한다!"

카오가 아닌 놈들은 무기를 버리고 나를 잡기 위해 달려들었고 카오인 적들이 공격을 해왔다.

"저놈이 또 도망치잖아!"

"연락해! 포위망 좁혀!"

인중여보를 죽여서 다급해진 놈들에게 기꺼이 등을 보였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정직하게 정면이 아니라 지그재그로 방향을 틀었다.

적들의 공격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기 위해서였다.

등뒤로 수많은 스킬들이 작렬했다.

각종 폭음과 진동이 발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다.

죽음이 거듭되도 지치지 않고 날뛰어서일까. 통제를 하는 적들의 공격에서 짜증이 느껴졌다.

[플레이어가 상태이상 중독에 걸렸습니다.]

[플레이어가 상태이상 암흑에 걸렸습니다.]

[플레이어가 상태이상 실명에 걸렸습니다.]

먼저 걸린 중독은 최대체력대비로 체력이 빠지는 종류였다. 그건 문제가 없지만 시야가 대폭 줄어드는 암흑이나 공격 명중률을 낮추는 실명은 치명적이다.

"…왔다."

파티를 이루는데 있어서 다들 딜러와 탱커, 힐러를 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구성원이 조금만 늘어난다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디버프였다.

상대의 강함을 조금이나마 낮출 수 있음은 높은 딜 만큼이나 매혹적이었다.

엘리멘탈 소울2에서는 그 디버르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직업은 마법사의 1차전직 중 하나인 저주술사였다.

2차전직인 악마술사에서 최종적으로 네크로맨서까지 이어지는 이 직업군이 펼치는 디버프는 어느 구간에서나 까다롭다.

천하제일 길드에 소속된 저주술사는 저 둘이었다. 이들은 포위망의 중심에서 있다가 내 이동경로에 미리 대기해서 지금처럼 너프를 걸어왔다.

카오가 된 녀석들이니 처리해도 된다.

천하제일 길드에서 카오가 된 귀하신 여덟 명 중의 하나니까.

쿵! 쿵!

한정된 시야 속에서 속도를 늦추지 않으니 나무에 온몸을 부딪쳤다.

"빌어먹을! 운 더럽게 좋네!"

"재 스킬 걸린 것 맞아?"

멀리서 보면 희극과도 같은 추태는 오히려 쏟아지는 공격들을 피하게 만들어준 것 같다.

마흔두 번의 죽음에서 이미 다섯 번이나 나온 상황이다. 내 나름대로 요령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등가교환 방패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다섯 번의 유사한 상황에서 등가교환의 방패를 사용한 것은 지금 한 번 뿐이다.

최대한 많은 적을 카오로 만들기 위해 참고 또 참아왔었다.

콰과과과과!

공격력의 30%가 방어력으로 치환이 된 순간, 내 몸을 감싼 얇은 방어막이 주변의 모든 것과 부딪혔다.

스킬 시전 중에 잠깐의 딜레이로 인해 적들의 공격이 정확하게 나를 조준하며 쏟아졌다. 흡사 폭포 아래에 있는 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도 난 목표물을 놓치지 않았다.

"노, 놈이 내게로 오잖아!"

"막아! 막으라고!"

두 놈들이 지껄이는 소리는 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게임 속에서 짧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지루할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눈먼 화살에 맞기만 해도 죽었을 놈이 몇 번의 공격을 맞으면서 달려오고 있다. 이보다 더 무서 수 있을까.

나는 놈들에게 좀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서걱! 서걱!

등가교환의 방패가 끝남과 동시에 한 발자국 다가가 힘껏 검을 휘둘렀다.

처음에 휘두른 검은 건맨의 소울의 효과가 작렬해 두 번의 공격이 들어갔다.

비록 레벨이 낮다지만 천하제일 길드원의 탱커들도 내 일격을 맞으면 빈사상태에 빠지기 일쑤다.

체력도 방어력도 형편없는 저주술사 따위가 감당할 것이 아니다.

푸욱!

두 번째 저주술사가 스킬을 쓰기도 전에 찌르기로 숨통을 끊었다.

퍼버버버벅!

다음 타깃을 노리는 순간에 머리 위에서 화살비가 쏟아졌다. 피할 수 없는 범위공격이었으니 기꺼이 두 눈을 감을 뿐이었다.

[YOU DIED.]

죽은 뒤에 곧바로 마을로 부활했다. 눈앞에는 나한테 죽은 저주술사 둘의 뒷모습이 보였다. 허공에 손짓을 하는 걸로 보아서는 귓속말로 연락을 취하는 것만 같았다.

"네놈이 벌써?"

"제기랄. 도망쳐!"

"바보냐? 여기서 부활을 하네?"

내 죽음을 보고 받고 상황을 파악한 놈들이 당황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PK를 저지른 카오 상태의 유저의 부활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도시인 뉴 알론으로의 부활. 이건 미친 짓이다. 카오 상태의 범죄자를 찢어죽일 유저들은 차고 찼으니까. 심지어 그들에게서 도망을 쳐도 죄수병 NPC들에게 곧바로 제압당한다.

남은 것은 따로 지정한 지점에서 부활하는 거다.

이 주변에서 카오가 가장 안정적으로 부활할 수 있는 곳은 낙오된 화전민의 마을이다.

몬스터의 위협도 없을 뿐더러 이곳의 치안을 담당하는 NPC는 마을입구를 지키는 넷이 전부였다.

누군가가 그걸 대신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서로 멀어져!"

"빌어먹을!"

두 저주술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좌우로 흩어졌다.

지혜와 마력에 대부분이 투자를 한 마법사들이 전력으로 달려도 날 뿌리칠 수는 없다.

좌측으로 달려가는 놈의 등판을 검으로 벤 뒤에 슬링으로 다른 하나의 머리를 터트렸다.

"저 새끼 앞으로 막어!"

"저주술사 빼네!"

멍하니 보고 있던 대기조 둘이 내게 달려들었다. 서로 카오가 될 수 없으니 길막이라도 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어쩌라고."

길막은 게임방해에 중요한 요소다.

엘리멘탈 소울1는 이 길막기와 무한 PK로 사냥터를 통제했었다. 그게 심해져서 약간 밸런스 패치를 해줌으로서 숨통을 트여줬던 일이 있다.

통제는 기본적으로 유저들간의 힘으로 결정되니 그 힘으로 질서를 정리하라는 의도였다.

그래서 생긴 것이 힘겨루기다.

순수하게 근력이 높은 유저가 밀면 미리 자리를 점령한 유저는 밀려나는 것이다.

발생하는 조건은 이러하다.

첫 번째. 서로 대치상태일 것.

두 번째. 3초 이상 접촉되어 있을 것.

마을 바깥에서야 통제하는 적들을 카오로 만들기에 바빠서 도망만 치기에 바빴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치이이이익!

"뭐, 뭐야. 이건!"

"밀리지마. 막아!"

앞을 가로막는 두 녀석은 너무나 쉽게 밀려났다.

근력이 더 높아도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시스템의 판정 때문이다.

힘겨루기는 여러 명이 겹쳐있을 경우 가장 근력이 강한 한 명을 기준으로 움직였다.

즉, 내 근력을 넘지 못한다면 몇 백 명이 몰려와서 힘겨루기를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이다.

눈앞의 두 명은 체력이 높은 탱커와 움직임이 빠른 도둑일 뿐이었다.

순수한 근력으로 나를 압도할 수 없었다.

다시 달라붙는 적들을 밀어내고 부활한 저주술사들에게 검을 들이밀었다.

"이,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왜 우리가 밀려!"

나를 둘러싼 적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웠다. 힘겨루기의 판정도 모르면서 통제를 한다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홀로 초등학생 사이를 누비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네 번째 죽음에 들어서자 저주술자들은 부활도 하지 않았다.

"저 새끼 마을에서 끌어내!"

"개자식 여기서 버티고 있어?"

마을 바깥에 있던 천하제일 길드의 포위조가 넷이나 돌아왔다. 덩치가 좋은 탱커들이었는데 저주술사가 움직일 시간을 벌 셈인 듯싶었다.

"너네 학습능력이 없냐?"

머릿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탱커가 중점을 두는 것은 체력이다. 딜탱을 하는 놈도 있으니 근력에도 투자를 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나를 압도할 수는 없다.

저들보다 내가 레벨이 높아서 근력에 투자할 포인트가 많다. 또한 권장레벨보다 높은 곳을 들쑤신 덕분에 관련된 도전과제를 많이 달성해서 보상도 적지 않았다.

내 움직임을 보고 민첩과 지구력에 많은 투자를 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이, 이게 뭐냐고! 왜 우리가 밀려!"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돼!"

네 명이 달라붙어도 판정은 일대일이다.

앞으로 밀고 가는 발걸음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을 보고받을 천하제일 길드장 철홍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천하제일 길드의 카오는 대부분 딜러들이다. 그중에는 랭커인 철홍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피릿 길드는 모두 카오 상태인데다가 민첩 위주로 투자한 캐릭터가 대부분이라 지원도 불가능하다.

"다른 놈들 데리고 와!"

허수아비와 같은 놈들을 밀어낸 틈을 파고들어서 다시 한 번 저주술사들을 죽였다.

"빌어먹을! 우리 좀 구하라고!"

"경험치랑 템 내구도 다 깨지잖아!"

일방적으로 사냥감이 된 저주술사들이 욕지거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에 불만이 많겠지만, 답답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냥 여기서 담구면 되잖아!"

날 막아선 천하제일 길드원 중 하나가 참지 못하고 공격을 해왔다. 당연히 반항을 하지 않았다

[YOU DIED.]

죽음이 찾아온 순간과 함께 광클로 부활해 방금 전에 죽인 놈과 도망치는 저수술사 둘을 또 죽였다.

"…그냥 다 버려! 길드장님 명이다!"

"카오가 된 놈들 로그아웃해!"

결국 나머지 놈들이 카오가 된 동료들을 버렸다. 뭘 하더라도 참는 것은 힘들고 버리는 것은 쉽다.

일반적인 통제는 결국 약자를 위해 강자가 자신의 시간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 약자가 하나에 강자가 다수라면, 불만이 쌓이는 것은 후자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소수의 약자가 아닌 강자다. 한번 생긴 불신과 불안함을 놈들에게 더 깊숙이 심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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