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58화 고인물은이겼을까.
쾅!
힘껏 던진 쇠사슬은 신의 곁으로가 걸린 적병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잠깐의 경직과 함께 비틀거렸던 적병은 다시 전진해 왔다. 체력은 벌써 절반 이하로 깎였다. 아무리 버프를 줘도 병사는 병사에 불과하다.
쾅!
두 번째 슬링도 정확하게 머리통에 맞췄다.
부르르르!
체력이 0으로 떨어진 적병사가 몸을 떨었다.
"시, 신의 곁으로!"
허공을 껴안은 자세로 적병사가 고함을 쳤다. 신체 전체가 금이 간 껍질처럼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새어나오는 빛이 주변을 감쌌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진동이 뒤를 찾아왔다.
나는 그 과정을 똑똑히 봤다.
자폭을 한 적병이 이상증상을 보이는 동안, 뒤로 물러나서 아군진영의 목책에 몸을 숨겼기 때문이다.
방금 전의 폭발에 휘말린 병사들은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않고 전멸했다.
피아를 가리지 않고 전멸시켰다. 확실히 걸어다니는 폭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약한데?"
하지만 양쪽의 기사들의 체력은 겨우 절반만 사라졌다. 나처럼 방어력이 전무한 경우를 제외하면 전혀 쓸모가 없는 스킬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약해?"
정작 스킬을 쓴 황금추적자도 실망스럽다는 기색이었다.
[헤이스트를 사용합니다.]
[벽타기를 사용합니다.]
기회를 놓칠 수 없으니 벽을 타고 천장을 달렸다.
머리위를 지나가는 나를 병사나 기사들이 제지하려는 움직임도 없었다.
나조차도 당혹스러웠지만 그걸 만끽할 여유는 없었다.
황금추적자가 피 묻은 광신도의 경전을 펼치며 스킬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다 피하나 볼까!"
비어있는 손에 검붉은 채찍이 생성되어 그걸 나에게 힘껏 휘둘렀다.
광신도가 처음으로 배우는 공격마법이자 초반 딜량을 책임지는 참회의 채찍이었다.
촤아아악!
채찍은 막무가내로 휘둘러졌다.
참회의 채찍은 일종은 마법이지만 엄연히 무기로 판정을 받는다. 그랬기에 백스텝이나 구르기를 통해 피하는 것이 정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이 환경이 문제였다.
좁은 통로에서 채찍을 크게 휘두르면 벽에 부딪혀서 살아있는 것처럼 요동을 치기 때문이다.
1차 공격을 피해도 벽에 부딪혀서 가해지는 2차3차 공격까지 완벽히 피할 수 있을까는 의문이었다.
안전하게 천장에 뛰어내려 바닥에 떨어지거나 다시 벽을 달려 정반대로 피할 뿐이었다.
"어지럽지도 않아?"
"어딜 도망가."
화면이 자꾸 흔들리니 어지러움은 당연히 따르지만 게임조작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었다.
채찍의 유효시간이 끝나고 물러나는 황금추적자에게 슬링을 보여줬다.
슬링을 휘두르는 모션을 하자 황금추적자는 당연히 구르기를 사용했다.
그걸 보자마자 슬링을 놓으며 1인 도발을 사용했다.
[1인 도발을 사용합니다.]
[상대가 도발에 걸렸습니다.]
"이 쓰레기 같은 판정!"
황금추적자도 속은 것을 알고 백스텝까지 사용하며 물러났지만 내가 지정한 범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리고 말았다.
분통을 터트리며 나에게 다가오는 그의 표정은 이때까지의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촤하악!
"제…길!"
단칼에 황금추적자는 쓰러졌다.
랭커들 중에서 탱커가 아니고서는 내 일격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스피어마스터의 소울을 사용합니다.]
황금추적자를 한 번 끊은 것은 좋지만, 앞과 뒤로 적병이 자리를 잡은 상태다. 1초라도 빨리 아군병사와 합류하기 위해 등뒤를 밀어야만 했다.
남은 스태미나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검을 휘둘러댔다.
37 대 33.
점수판을 확인하니 역전은 했지만 점수차이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내가 위를 밀어 버린 만큼 황금추적자가 아래를 밀어 버린 것이다. 점수는 당장에야 내가 앞서지만 앞으로는 모른다.
황금추적자는 나와 다르게 양쪽 라인에 영향력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목숨 하나 때문에 꽤 곤란해졌네."
병사들이 리젠되는 위치로 나타난 황금추적자는 그게 썩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눈앞에 그가 있음에도 감히 나아갈 엄두가 안 났다.
아까 죽였던 것은 슬링을 통한 눈속임이 성공해서다. 같은 수에 또 당할 바보가 아닌 이상 쉽게 다가갈 수 없다.
"그런 것치고는 아직 여유로워 보이는데요."
"물론이야. 변수가 없다면 내가 유리하지. 하지만 이제 3분이 남아서 곤란해."
황금추적자는 머리 위를 가리켰다. 그의 말마따나 상단의 UI에 적힌 시간은 이제 3분 2초 밖에 남지 않았다.
양쪽의 보스인 록과 자닐이 어느 라인으로 진격할까.
서로 한 라인에서 부딪히는 걸까. 아니면 서로 다른 라인으로 가는 걸까.
쿠구구구구!
"갑자기 무슨……!"
"맵이 변한다!"
3분이 되는 순간 지진이 일어났다. 막혀있던 가운데 벽이 내려앉으며 통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새로운 통로의 끝에서 록과 자닐이 나타났다.
"덤벼라. 자닐!"
"죽어라. 록!"
시청앞에서와 달리 그들의 뒤에는 병사가 없었다.
지하감옥 맵에서는 병사는 병사끼리 붙고 보스는 보스끼리 싸우는 셈이었다.
"…귀찮아졌는데."
보스의 점수가 7점이니 여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다른 라인에 개입할 수 있는 황금추적자가 유리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체크메이트."
황금추적자가 피 묻은 광신도의 경전을 높게 들어올렸다. 위와 아래로 가는 병사들에게 걸던 버프가 자닐에게 쌓이기 시작했다.
공격력. 방어력. 체력 등등 어지럽게 쌓이는 버프들 중에 있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다.
"신의 곁으로."
예상보다 약해서 머릿속에 지워뒀던 스킬이 온갖 버프를 받은 보스에게 머금어졌다.
포인트를 위해 자닐을 죽인다면 그 뒤의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다.
"하. 곤란하네."
자닐을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 후폭풍이다. 그렇다고 외면하고 다른 라인에 갈 수도 없었다.
"망설이면 나야 좋지. 승부는 졌어도 승리는 가져갈 테니까."
황금추적자는 마나포션을 아끼지 않고 남용했다. 쿨타임이 돌 때마다 써 대는 스킬은 광신도가 기본적으로 지급받는 것을 상회한다.
경매장이든지 업체를 통해서든지 미리 스킬들을 입수해 뒀던 것이 분명하다.
"일대일로 싸워서 승부도 챙길 생각은 없나 봐요?"
"자존심이야 조금 버려도 괜찮아. 게임은 길다고. 한 번 져도 다음에 이기면 되니까."
"죽을 때 표정이랑은 다른데?"
"이기고 웃으면 되니까."
어설픈 도발을 했지만 역시 응하지도 않는다. 캐삭하고 사라진 헬조선순례자도 아니고 닳고 닳은 베테랑답다.
카앙! 캉!
그 사이에 자닐과 록이 부딪혔다.
버프로 인해 높아진 능력치만큼 자닐은 이전에 본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선택지는 두 개다. 자닐과 함께 지금 죽어서 패배하거나. 그냥 지켜만 보다가 패배하거나."
뒤에서 관망하는 나를 황금추적자는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아직 나에 대해 평가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건 사람이 아닌 물건을 보는 눈빛이었다.
평가를 당한다.
이 표현이 이토록 불쾌할 수 없다.
"좀 역겹다는 소리 듣죠?"
"제법 듣지."
"세 번째 손가락도 피게 해 주지."
상대가 제시한 두 가지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선택지를 이끌어낼 뿐이다.
병사 셋이 다닐 길도 록과 자닐의 거구로 인해 비좁게 느껴진다.
슬링을 던지고 싶어도 각이 나오지 않으니 도저히 맞출 자신도 없었다.
저기에 끼어들기 위해서 일단은 록의 뒤에서 기회를 노렸다.
파바밧!
자닐이 록에게 세 번의 찌르기 공격을 사용한 후.
[벽타기를 사용합니다.]
스킬을 사용해 벽을 밟고 천장에 우뚝 섰다.
"어딜."
황금추적자는 곧바로 스킬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모두 범위형 공격으로 날 공격하기보다는 주변에 다가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록과 자닐을 등 뒤에 둔 상태로 난 진퇴양난에 빠진 꼴이다. 그리고 기다리던 상황이기도 했다.
"끝까지 너의 무기를 감추면 넌 일류다. 하지만 지금 드러내면 이류지."
황금추적자에게서는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나에게 관심이 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에 대해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확인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고작해야 시가전이라서?"
"다 털어놓지 마. 그러다가 내 관심이 식어 버리잖아."
"다 네 장난감 같나 보구나."
"Emagician이 관심을 보였다며. 그러면 내 기대치는 충족시켜. ZI존짱짱맨처럼 도망치지 말고."
"음?"
순간 귀를 의심했다.
Emagician은 그렇다 쳐도 왜 ZI존짱짱맨이 언급된다는 말인가.
정작 난 황금추적자와 마주친 기억이 없었다. 도망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 사람 손 씻었다며. 아는 사이였나?"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세트로 맞춘 아이템을 팔고 도망쳤지. 자신의 가치를 알기 전에 설치지 말라는 거다."
눈살을 찌푸리며 설교를 하는 황금추적자를 보니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떠드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화에 눈이 멀어서 벽타기 스킬도 끝났군. 어수룩한 부분이 많아."
"……."
천장에서 떨어진 나를 보는 두 눈이 호선을 그렸다. 장난이라는 어투였지만 절반의 진심이라 느껴졌다.
"재수가 좀 많이 없네."
불사자를 가급적이면 숨긴 것은 나보다 더 큰 힘에 휘둘리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하지만 그건 잠깐일 뿐이다.
난 이미 충분히 강해졌다.
그랬으니 천하제일 길드와 시비가 붙어도 그냥 넘어갈 수 있었고 엠페러 길드의 달콤한 제안도 거절할 수 있었다.
그때의 마음가짐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귀찮음에 가까웠다.
황금추적자의 말에 동감하는 바가 있다면 ZI존짱짱맨 때 칠대악룡 세트를 마음껏 누리지 않고 팔았다는 정도일 뿐이다.
"네가 날 평가할 위치가 아냐."
난 충분히 강하다.
상대가 황금추적자라고 하더라도 이건 엘리멘탈 소울2다.
업계의 경쟁자한테 고개를 숙일 마음은 없다.
나는 골드캐시가 무서워서 알아서 고개를 조아리는 겁쟁이가 아니다.
혼자서 그들보다 높게 설 인간 오석일 뿐이다.
[결사항전의 영역을 사용합니다.]
"반대로 시험하지. 날 이기면 골드캐시를 받아주마."
칠죄종의 스킬을 제외하고 내가 꺼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스킬.
절망하는 산맥의 고대정령에게 죽지 않고 끝까지 딜을 넣게 해줄 수 있던 최강의 창이자 방패.
"우워어어!"
나의 결사항전의 영역에 영향을 받은 록이 크게 도끼를 휘둘렀다. 그걸 막은 자닐이 힘에 부쳐서 휘청거릴 정도였다.
"저 위력은……!"
"숨겨둔 것을 꺼내면 이류다? 그 이류에게 지는 넌 삼류야."
당혹스러워하는 황금추적자에게 기꺼이 등을 내줬다.
모든 공격력 및 공격속도의 20% 상승. 거기에 더해 피해량의 10%만큼 체력을 회복한다.
자닐을 공격하는 동안은 절대 죽지 않는다.
콰앙! 푸욱!
"크하악!"
록의 도끼가 앞에서부터 밀어붙이고 무방비가 된 등은 내 검이 헤집었다.
황금추적자의 마법이 나를 습격했지만, 자닐을 공격하면서 회복되는 체력을 깎아내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딜이야!"
황금추적자의 당혹스러움이 들렸다.
앞서 나를 견제하기 위해 공격스킬을 쓰기도 했던 탓에 쿨타임이 돌아버린 것 같았다.
"신의 곁으로!"
끝내 자닐의 체력이 0이 되었다.
앞서 보았던 병사와 같은 상황이 연출이 되었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황금추적자에게 달려들었다.
촤르르륵!
"어딜!"
그는 뒤로 물러나며 먼저 쿨타임이 돈 참회의 채찍을 사용했다.
맞을 타이밍에 구르기를 쓰며 앞을 좁히자 혼돈의 추적자는 아까 전에 사용했었던 범위공격 스킬을 자신의 발밑에 깔기 시작했다.
"이래도 올……!"
"가야지."
내가 물러날 줄 알았던가.
등뒤에서는 이미 자닐의 자폭이 시작되고 있었다. 처음부터 같이 죽는 것이 아니면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 같이 죽은 뒤에 누가 먼저 킬을 하냐는 거지."
지금의 포인트는 박빙이다.
자닐의 폭발에 모두 다 죽어서 살아난다면 순간적인 폭딜을 자랑하는 나일까. 아니면 각 라인에 버프를 주며 개입을 하는 그일까.
콰아아아앙!
[YOU DIED.]
폭발이 터지고 곧바로 죽음이 찾아왔다.
점수는 52 대 51. 록과 자닐은 물론이고 나와 황금추적자까지 확실하게 죽었다.
부활 후에 남은 시간은 30초도 되지 않았다.
[헤이스트를 사용합니다.]
완전히 무너진 아랫라인으로 부활을 하자마자 달려나갔다.
미니맵에는 같은 생각을 했는지 윗라인에서 황금추적자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스피어마스터의 소울을 사용합니다.]
하나. 둘.
리젠이 된 아군병사와 뒤엉킨 적병사를 베어내고 적 기사의 머리통까지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