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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은 옷을 입지 않아-47화 (47/201)

제047화 고인물은 산화한다.

그그그그그!

사거리에 들어오자 필드보스가 발을 들어 올렸다. 이미 공격범위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처음에 각오했던 대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분노의 전투를 사용합니다.]

단 10초지만, 나는 모든 죽음을 피해낸다.

[눈앞의 개새끼들의 멱을 딸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아. 크하하하하!]

고막이 터질 것 같은 호탕한 웃음소리.

핏줄은 나무뿌리처럼 불거졌고 그걸 버티지 못한 피부는 찢어지기 직전처럼 팽팽해졌다.

쿠우우우웅!

필드보스의 발이 머리를 짓밟았다. 추가로 충격파가 작렬했다.

술에 취한 것처럼 몸이 휘청거렸다.

죽지 않았다. 그 사실을 상기하며 하단의 UI에 시선을 보냈다.

남은 시간 9초가 너무나 소중하다. 이걸 헛되게 보낼 수 없다.

뉴 알론이 부서졌다가는 그 여파를 감당하기 힘들다.

[스피어마스터의 소울을 사용합니다.]

[결사항전의 영역을 사용합니다.]

"와라."

그러니까 모든 걸 쏟는다.

카가가각!

머리를 떠나는 발바닥에 크게 검을 휘둘렀다. 불똥이 튐과 동시에 두 번째, 세 번째 공격을 가했다.

시야를 채운 것은 검의 궤적이 남긴 임펙트와 충격파가 남긴 먼지구름뿐이다.

물론 필드보스의 거구를 가릴 수 없었다.

먼지구름 속에서 유독 검게 물든 부분을 향해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쿠우우웅!

[절망인가!]

자욱한 먼지가 다 가라앉기도 전에 절망하는 산맥의 고대정령의 몸이 뒤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거구의 보스를 공략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약점공략이다. 흔히 부위파괴라고도 불리는데 산과 같은 크기의 보스는 역시 다리였던 모양이다.

쿠우우웅!

필드보스가 주저앉았다. 그로 인해 생긴 충격파에 몸이 뒤로 쭉 밀렸다. 물에 빠진 맥주병처럼 그 상황에도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빗나갈 줄 알았던 공격은 무려 건맨의 소울이 함께 들어갔다.

콰드드득!

이때까지와 달리 필드보스의 피부가 움푹 파이면서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내 순수 딜량이 높아서만은 아니다.

정확한 공략법을 밟아 나가고 있어서다.

남은 시간은 3초. 공격을 멈춰서는 안 되지만 스태미나가 슬슬 바닥을 보인다.

불사는 죽지 않을 뿐이지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한 번의 숨을 가다듬고 힘껏 검을 휘둘렀다.

콰앙!

[절망하라.]

고대의 정령이 가시처럼 자란 나무 한 그루를 뽑아 내 몸을 찍었다.

[YOU DIED.]

새로운 공격패턴을 확인함과 동시에 불사가 끝나면서 사망했다.

회색으로 변한 화면과 익숙한 문구. 곧바로 부활하지 않고 등을 돌려 움직이는 필드보스를 봤다.

죽음은 항상 익숙하지만 이번은 특별하다. 칠죄종 스킬 남용으로 능력치 버프가 너무 사라졌다.

부활을 하자 뉴 알론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눈에 띄었다. 광장을 돌아다니는 유저 숫자가 줄어들었을 뿐더러 그마저도 다소 불안한 기색으로 전황을 논하고 있었다.

실제로 공식홈페이지나 엘리멘탈 소울2 아웃벤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썩이나감 : 지금 전황은 어떻게 됩니까.]

독고무적이나 흑군은 바쁠 것이 뻔하니 빨간약파란약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답이 오는 것은 조금 뒤였다.

[빨간약파란약 : 필드보스의 범위공격을 우려해 재편에 들어갔습니다.]

빨간약파란약은 레이드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 줬다.

먼저 백 명 단위 이상으로 해 둔 부대의 구성부터 해체했다. 필드보스의 살벌한 범위공격 때문에 20인 레이드 파티 위주로 각기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몬스터 헌터쪽은 독고무적과 엠페러 길드 위주의 지휘권을 포기했다. 그걸 대신해서 가장 원거리 딜러의 숫자가 많으며 그 수준도 높은 스피릿 길드에게 상당한 전권을 줬다.

저번 천하제일 길드에게 낭패를 본 적이 있었기에 스피릿 길드장인 원샷원킬은 그걸 거부하지 않았다고 한다.

[썩이나감 : 원샷원킬의 지휘가 괜찮은 겁니까?]

원샷원킬도 뛰어난 실력의 랭커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너무 독특하게 게임을 풀어나가는 사람이었다. 비슷한 성향의 길드원이면 몰라도 다른 길드와 함께 엮일 때는 항상 좋지 않은 결과를 보였다.

독고무적이 그런 원샷원킬에게 전권을 준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빨간약파란약 : 명목상입니다. 사실상 가장 중요한 파티들에는 엠페러 길드원이 다 속해 있죠.]

[썩이나감 : 바지사장입니까?]

[빨간약파란약 : 지분을 나눠줬다는 정도로 보면 됩니다. 어쨌든 스피릿 길드는 지독한 원거리 딜러들이니까요.]

그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른 길드라면 명목상의 전권이임에 불쾌했을지는 몰라도 지금의 스피릿은 그걸 따질 처지는 아니다.

독고무적이 독단적으로 움직일 사람은 아니기에 죄수병도 비슷한 움직임일 것이다.

[빨간약파란약 : 그보다 필드보스가 2페이즈에서 상처를 제법 입은 상태로 나타났더군요.]

[썩이나감 : 정보 드립니까?]

[빨간약파란약 : 전멸한 선발대에서 마지막까지 필드보스와 싸우신 것이 맞다면요.]

히든레코드의 정보는 상당히 빠르다. 그러고 보니 이쪽 업계의 1등인 다크로얄 직원에게도 연락이 왔다.

[썩이나감 : 양질의 정보는 아닙니다. 그저 힌트 정도라서 다크로얄에게도 팔지 못했던 거라서요.]

[빨간약파란약 : 그쪽과도 거래하십니까?]

[썩이나감 : 제의가 오더군요. 아무래도 돈냄새는 잘 맡는 친구들이니까요.]

히든레코드와 나는 독점이 아니다. 서로의 필요에 따라 우선거래를 할 뿐이다.

어디와 무엇을 하든지 그건 내 소관이다.

[빨간약파란약 : 무조건 구매하겠습니다.]

[썩이나감 : 2페이즈 보스 공략법입니다.]

내 플레이 영상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근거가 필요하다. 스크린 샷을 찍어서 공략패턴에 대한 짤막한 설명을 적어 보냈다.

[빨간약파란약 : 귀한 정보군요.]

[썩이나감 : 가격은 잘 쳐주시겠죠?]

[빨간약파란약 : 이 스크린샷까지 공개해도 되겠습니까?]

[썩이나감 : 해도 됩니다.]

히든레코드가 정보를 유료로 판매할 수 있던 것은 단순한 찌라시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증거를 같이 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보낸 스크린샷 정도는 필요하다.

문제는 이때까지 내가 거래의 대상이라는 것을 대놓고 드러낸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2페이즈에 살아남았던 선발대 중에서는 누가 맨 뒤에 있는 것인지 알고 있을 테니까.

어설프게 숨기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난 너무 주목을 받았다. 그만한 대가를 얻었으니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빨간약파란약 : 최대한 노출을 꺼려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썩이나감 : 숨을 수 있다고 숨어질 것 같지는 않는데요.]

[빨간약파란약 : 원하신다면 본사 차원에서 도울 수 있습니다.]

[썩이나감 : 아뇨. 괜찮아요. 정당한 평가를 받을 시기가 된 것 같으니까.]

ZI존짱짱맨 시절에서는 내가 조금이라도 불리한 정보는 공개하지 않았다.

길드의 용병노릇으로 선발대에 끼어있다 빨리 죽은 뒤에 생색이나 냈을 거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기회만 노리고 성공했지만, 결국 끝은 실패였었다.

젊다고 말할 수 있는 나이도 이제 몇 년 남지 않았다.

다음은 없을 수 있다.

처음에 각오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ZI존짱짱맨처럼 모두의 눈치만을 살피며 움직이지는 않을 거다.

조롱은 변태검사라는 컨셉으로 받은 것으로 충분하다. 헌터 VS 죄수병 이벤트로 주목을 받은 것도 결국 모자랐다. 오히려 갈증만 남을 뿐이다.

헬조선순례자 때도 증명했음에도 그 뒤의 기부를 핑계로 날 인정하기 싫어하는 랭커들도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 잘난 이들은 모두 절망하는 산맥의 고대정령의 존재감에 위축된 상황이다.

독고무적이나 흑군이 표면상으로 살짝 뒤로 물러난 것만 해도 그렇다. 공헌도 1등에 목을 매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는 계산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똑똑히 보여 줄 수 있다.

아무도 측정할 수 없는 공격력을 지닌 유저이자 다크게이머.

누군가에게는 공포지만 누군가에게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자.

이번 필드보스 레이드에서 공헌도 1등을 내심 확실하고 있는 상황인 내가 업계의 거물로 다시 올라설 기회다.

*       *       *

절망하는 산맥의 고대정령은 최초의 모습보다 확실히 줄어든  상태였다. 어째서인지 하반신에 상처가 크게 남았기에 우려보다 좋아진 상황에 다들 큰 걱정을 던 상태였다.

독고무적은 예외였다. 오히려 그는 더 가슴이 무거워졌다.

선발대가 1페이즈가 끝나고 대부분 전멸한 것을 들었다. 그 소수의 인원으로 유의미한 상처 따위를 남기는 건 불가능했다.

"…썩이나감일까?"

1페이즈에서 생존한 선발대가 죽음을 각오하면서 까지 필드보스에게 시간을 끌었다.

그때 마지막 멤버가 썩이나감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절망하는 산맥의 고대정령의 공격은 단순해도 그 범위가 막대했다.

근접공격이 주된 수단이 썩이나감은 다가가다가 죽는다고 봐야 무방했다.

제3의 세력이 공격을 했다고 봐야 무방했다.

"길드장님. 이거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뭘 말하는 거지?"

"히든레코드에 방금 올라온 정보입니다."

원샷원킬에게 지휘권을 양보하면서 옆을 지키게 된 척준경이 귓속말로 링크 하나를 보냈다.

그걸 클릭하자 히든레코드에게 구매한 정보가 떴다.

절망하는 산맥의 고대정령의 2페이즈의 패턴과 해당하는 공략법이었다.

"…역시인가."

거기에 올라온 스크린샷이 어떤 의미인지 독고무적은 모를 수 없었다.

썩이나감은 홀로 필드보스에게 큰 데미지를 줄 수 있다.

"그 유니크 스킬이 원거리 공격이 아니면 무적 관련이겠군."

먼저 생각난 것은 두 가지였지만, 무게를 싣는다면 후자였다. 보스의 코앞에서 찍힌 사진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독고무적 : 다리에 공격을 받다가 기울어지면 피하게.]

[원샷원킬 : 무너지면 공격을 더 하는 것이 맞지 않나요?]

[독고무적 : 무너질 때 충격파가 있다고 하더군.]

[원샷원킬 : 주의하죠.]

원샷원킬은 그의 말을 굳이 거스르지 않았다. 빡빡하게 딜을 넣던 공격에 틈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쿠구구구구구!

"보스가 기울어진다!"

"모두 대피해!"

"원거리 딜러만 공격해!"

3분의 줄다리기 끝에 필드보스가 천천히 뒤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미리 명령을 전달받은 공략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선발대와 달리 서로 엉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쿠우우우웅!

"빌어먹을! 저 범위는 뭐야!"

"미친 것 아냐? 왜 저렇게 넓어!"

필드보스가 바닥으로 쓰러지자 생기는 충격파는 발걸음 따위와 비교할 수 없었다. 안심하고 피했다고 생각했던 후미의 이들이 휘말려 싸그리 전멸해 버렸다.

"죽은 놈들은 신경 쓰지 마!"

"공격해! 지금이 공략의 기회다!"

이때까지 어그로만 끌고 다니던 근접 계열의 직업군들도 두 팔을 걷고 맹공을 가했다.

절망하는 산맥의 고대정령은 이때까지와 달리 몸뚱이가 흔들리며 상처가 깊게 새겨지기 시작했다.

쿠그그그!

[절망하라.]

필드보스는 자신의 머리 위에 난 나무를 뽑고는 그대로 집어 던졌다.

원거리 딜러 중에서 가장 화력이 좋았던 일격필살 파티가 있던 쪽이었다.

쿠우우웅!

화살처럼 날아간 나무가 바닥에 박히면서 충격파가 일어났다.

"이, 일격필살이 뒤졌잖아!"

"빌어먹을! 왜 저렇게 멀리 던지는 건데!"

지켜보던 이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일격필살은 약삭빠르게도 넘어질 때 생기는 충격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상황이었다.

"귀찮은 패턴이군."

충격파는 근접공격을 못하게 만들더니 원거리 공격의 중심을 무너트렸다.

[독고무적 : 일격필살이 죽었다고 들었다. 자네는 괜찮나?]

[엘보우 : 전 있습니다.]

[독고무적 : 그러면 부길드장이 책임져주게나.]

독고무적은 스피릿의 부길드장인 엘보우에게 다음을 맡겼다. 남들이 보기에는 흔들림이 없어 의지가 되지만, 척준경의 눈에는 아니었다.

"답답하신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그래도 2페이즈가 곧 끝날 것 같다. 도시가 파괴되기 전에는 공략이 가능해."

"역시 보스가 문제는 아니셨습니까."

척준경은 감히 그를 대신하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 순간에도 독고무적은 쉴 새 없이 귓말을 보내고 있었다. 피아니스트와 같은 타자솜씨 덕분에 중요 파티들이 큰 피해가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 녀석이 궁금하다. 이곳에서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곤란하다."

"…데리고 오겠습니다."

"아니. 유사시에는 너와 내가 한 번은 죽어야 한다."

독고무적은 당연히 자신의 죽음도 각오하고 있었다. 선발대를 죽인 스킬이 다시 한번 쓰이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실언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군요."

그때 척준경이 뒤를 가리켰다.

단기필마가 후속으로 합류하고 있었다.

평범한 회색마였으나 일렁이는 불꽃같은 말발굽이 눈에 띄였다. 그조차도 검 한 자루를 허리에 차고 팬티만을 입은 유저에게는 빛이 바랬다.

"녀석이 왔군."

썩이나감. 그의 두 번째 등장에 독고무적의 눈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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