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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은 옷을 입지 않아-44화 (44/201)

제044화 고인물은 준비한다.

쿠웅! 쿠웅! 쿠웅!

[크워어어어!]

외눈박이 트롤1이 나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왔다. 일반 몬스터임에도 저 압박감은 보스 몬스터를 보는 것 같았다.

외눈박이 트롤1이 머리 위로 몽둥이를 들어올렸다.

패턴은 횡으로 휘두르기 종으로 찍기 두 개 뿐이다. 이때까지 봤던 것보다 종 패턴이 더 쉽다.

[헤이스트를 사용합니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두 발에 조금의 속도를 더한다.

콰아아앙!

외눈박이 트롤의 몽둥이가 내가 지나간 지점을 찍었다.

폭음과 함께 지면이 울렸다. 박살난 대지의 파편이 등을 두드려 체력을 일부 깎았다.

촤하아악!

[크허어엉!]

훤히 드러난 품에 검을 휘둘렀다.

외눈박이 트롤이 큰 충격에 휘청거렸다. 역시 체력에 몰빵이 된 놈이라 절반 이상이 남아있었다.

촤하아악!

[크아아아아!]

버겁지는 않다. 두 번 공격하면 될 뿐이다.

푸욱!

고통에 몸부림치던 외눈박이 트롤은 마지막 찌르기로 모든 체력을 잃고 쓰러졌다.

남은 것은 세 마리.

미니맵을 보니 반대쪽에서 다가오는 몬스터들이 있었다.

시간을 따지자면 저것들이 마지막일 것이다.

외눈박이 트롤 세 마리를 최대한 빠르게 제거해야만 한다.

[스피어마스터의 소울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게 필요하다.

결사항전의 영역도 헤이스트의 영역도 쿨타임인 지금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니까.

터엉!

외곽을 파고들자 체력이 80%인 외눈박이 트롤이 나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앞서 봤던 내려찍기를 과감하게 튕겨냈다.

몬스터마다 AI가 달라도 기본적인 부분은 같다. 한 번만 봐도 충분히 이해가 될 정도로 너무나 단순한 동작이니 튕겨내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근력 차이가 났을까. 아니면 중소형으로 취급받는 인간과 중대형으로 취급받는 트롤의 차이일까.

한 번의 튕겨내기에 온몸이 휘청거렸다.

푸욱!

[크어어어어!]

하지만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올곧게 뻗은 검은 조금도 망설임없이 폐부를 찔렀다.

튕겨내기 다음에 항상 적용되는 회심의 찌르기.

외눈박이 트롤의 체력이 10% 가량 남자 검을 뺌과 동시에 옆으로 그으며 숨통을 끊었다.

쿠웅!

[크어어어어!]

[우어어어어!]

하나가 죽어 바닥에 쓰러졌다.

남은 둘에게 어그로가 끌려 나를 향해 포효했다.

"…이건 좀 힘든데."

외눈박이 트롤들이 횡으로 몽둥이를 휘둘렀다. 입에서 욕이 절로 나올 엇박자로 내 주변을 휩쓸었다.

아까 전의 전투에 이어 연달은 구르기와 백스텝으로 스태미나는 금방 바닥을 보였다.

인벤토리에서 얼른 마나와 스태미나 포션을 꺼내 마신 뒤, 스킬의 쿨타임을 확인했다.

1인 도발의 재사용에는 아직 시간이 걸린다.

스피어마스터의 소울도 마찬가지다.

후웅! 후웅!

이러면 별 수 없이 멀리서 어그로를 끌 수밖에 없다.

퍼억! 퍼억!

전력으로 슬링을 휘둘렀다. 안에 얹힌 쇠구슬이 정확하게 외눈박이 트롤들을 가격했다.

[그워어어어!]

개중에서 충격을 많이 받은 개체가 날 향해 울음을 터트렸다.

"트롤은 단순하구나."

걸어오는 동작부터 무기를 움켜쥐고 휘두르려는 준비동작까지 너무나 눈에 익었다.

두 손. 그리고 두 발.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 개체의 공통적인 움직임. 거기에 더해 트롤이라는 체력만 높고 AI가 낮은 멍청한 특징은 난이도가 너무 낮았다.

[쿠어어어어!]

외눈박이 트롤이 몽둥이를 내려찍었다. 응시하며 나에게 떨어질 순간을 기다린다.

몽둥이의 속도가 엄청 빠른 것은 아니다. 다만, 저 엄청난 크기에 이질감을 느꼈을 뿐이다.

그런데도 외눈박이 트롤을 상대로 튕겨내기를 자제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패치 후부터 튕겨내기에 대한 판정이 이상해졌다는 이야기가 고렙유저의 사이에서 불거지고 있다.

눈앞의 트롤과 같이 거구의 개체가 무기를 휘두를 경우, 일반공격임에도 튕겨내기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튕겨내기는 확률에 영향이 없는 조작이기에 의혹이 커졌다.

어떤 유저가 넣었던 고객문의에 버그가 아니라는 짧은 답변이 왔다고 했다.

그랬기에 찾아온 혼란은 금방 진정되었다.

같은 덩치라고 하더라도 저렙 몬스터의 경우에는 그런 현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현 시점의 고렙유저들이 상대하는 레벨의 몬스터에게만 판정이 달라진 셈이다.

전처럼 편하게 무기의 끝부분을 쳐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튕겨내기는 실패해 즉사하고 만다.

최소한 3분의 2지점을 목표로 튕겨내기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안전하게 공격을 한 번 흘리고 반격을 하는 쪽으로 플레이를 했지만, 시간제한이 걸린 지금에서는 튕겨내기를 다시 꺼낼 수밖에 없다.

몽둥이의 2분의 1 지점에 검을 휘둘렀다.

터엉!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묵직한 충격이 온몸에 퍼졌다. 몸뚱이가 휘청거리며 시야가 흔들렸다.

이때 외눈박이 트롤에게로 구르기를 썼다. 시야가 3인칭으로 변하며 아까 전의 흔들림이 적용되지 않는다.

몽둥이를 움켜쥔 채로 팔이 위로 젖혀져있다.

경직상태가 된 트롤은 품에 검을 선물했다.

푹! 촤아악!

[크허어엉!]

검이 조금 들어가자 적용되는 스킬 치명적인 찌르기의 효과와 함께 팔을 비틀어 옆으로 휘둘렀다.

찰나의 순간에 두 번의 공격이 들어갔지만 아직 외눈박이 트롤의 체력이 남아있다.

서걱!

망설임 없이 세 번째 공격으로 숨통을 끊은 후, 남은 외눈박이 트롤에게 달려들었다.

[그워어어어!]

놈은 홀로 무쌍을 찍고 있었다.

몽둥이 한 번을 휘두르면 병사들 셋은 기본으로 나가떨어졌다.

촤하악!

뒤로 다가가 등판에 길게 상처를 남겼다.

[크허어엉!]

외눈박이 트롤은 곧바로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NPC들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데미지에 어그로가 곧바로 나에게 쏠렸다.

터엉!

인사와도 같은 몽둥이 공격을 튕겨내기로 받아쳤다. 그래도 NPC들이 데미지를 입힌 덕분에 이어진 두 번째 공격에 숨통이 끊어졌다.

푸히히히잉!

전리품을 회수할 시간도 없다.

회색마를 소환해 곧바로 성으로 질주했다.

[꺄아아악!]

[카악! 카아아악!]

요새를 위협하던 것은 하피무리였다. 레벨 43이기에 외눈박이 트롤보다는 낮지만 비행형 몬스터는 항상 상대하기에 까다롭다.

[도발적인 허수아비.]

-등급 : 매직.

-내구도: 100/100.

-효과 : 비행 몬스터에게 광역 도발.

-설명 : 곡식의 지킴이이자 파수꾼의 기운을 받았다. 공중에서 유독 눈에 띄어 적들의 공격을 받는다.

NPC에게 구매할 수 있는 일회용품 중에서 가장 비싼 것 중 하나다.

이번 퀘스트에 비행몬스터가 오기 때문에 사 둔 것을 이렇게 쓸 수 있을 줄이야.

하피들이 인부들을 덮치기 직전에 요새에 도발적인 허수아비를 설치했다.

[키하아아악!]

하피들이 일제히 선회하여 허수아비에 달려들었다. 그 꼴은 황금빛 물결을 쫓는 메뚜기 떼와 같았다.

콰득! 콰작!

하피들의 맹공에 허수아비의 내구도는 금방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촤아악! 촤아악!

"…1분."

먼저 한 마리의 등을 난도질했다.

외눈박이 트롤보다 낮은 레벨에 체력이 낮은 개체였기에 평타 두 번으로 충분했다.

또 다시 하나. 그리고 둘을 벨 때 허수아비가 박살났다.

남은 하피 두 마리가 나를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스태미나는 30% 밖에 없지만, 이미 병사들이 합류한 뒤였다.

"저놈들을 물리쳐라!"

"요새를 지켜라!"

병사들이 하피 두 마리를 붙잡고 있는 동안에 뒤로 물러나 스태미나를 채웠다.

5분은 이미 지났다.

창공의 독수리의 유효시간도 끝났기에 추가적인 적의 합류는 알 수 없지만, 무너진 벽의 수리는 마무리가 된 상황이었다.

저 두 마리만 잡으면 된다.

[끼아아악!]

다 죽어가는 병사들의 사이에 숨어서 하나씩 숨통을 끊은 후, 성벽 위로 올라갔다.

드넓은 황야에 펼쳐진 지평선.

그 모든 곳을 가리고 하늘 끝에 닿을 듯이 높게 솟은 절망의 산맥이 보였다.

드드드드드!

"…지진?"

그때 발밑이 흔들렸다. 잘못하면 떨어질 뻔했기에 성벽에 매달려 그 진동이 끝나기를 바랐다.

"…산이 움직인다?"

절망의 산맥. 그 일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운명을 거부한 자여. 내 땅에서 네놈을 쫓아내리라.]

"큭!"

벼락과 같은 목소리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산은 요새로 다가오고 있었다.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퀘스트는 성공했다.

"…필드보스다."

방금 전에 보인 압도적인 크기와 형태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특히 나에게만 반응한 것은 그야말로 확실한 증거였다.

필드보스는 거대한 산이다. 그리고 저런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다.

"고대정령이다."

전작과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으니 저런 굵직한 몬스터가 새로 나타날 수는 없다.

정령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정령은 자연 그 자체였다.

전작에서 유저들을 괴롭혔던 용암의 정령이나 바다의 정령 등이 대표적인 예였다.

이번에는 산맥의 정령인 셈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뤼움의 시험 퀘스트를 확인했다. 물음표로 되어있던 완료조건은 이제 절망하는 산맥의 고대정령이라고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혹시 이 정보가 올라왔을까?"

먼저 찾은 것은 히든레코드다. 거기에는 여전히 필드보스에 대한 추측글만 난무했다.

[첫 번째 필드보스 배팅.]

심지어 이걸 이용하는 배팅도 열렸다. 본래는 이런 것은 애용하지 않는다.

배팅이 제일 많이 걸린 것은 언데드였다. 아무래도 튜토리얼 때 임팩트가 제일 커보였다.

그 다음에는 뉴 알론에서 주요한 역할인 인간과 오크, 드워프들이 있었다.

이건 심심하면 주요 인물들을 타락과 배신을 시켜 버리는 제작사의 유구한 전통을 유저들이 기억하는 탓이다.

"정령은 일곱 번째인가."

그 다음부터는 몬스터 침공 때 자주 출몰하는 쪽이었다. 정령도 순위권이지만 그 아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배당금은 내가 만 원만 걸어도 오만 원으로 돌아오는 수준이다. 이미 고대정령이라고 확정지은 나에게는 그야말로 돈복사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

통장을 확인해 당장 쓸 수 있는 돈을 봤다. 당장의 생활비와 월세까지 끌어 모아 대충 오백 만원까지는 구할 수 있었다.

"이건 해야지."

하루나 이틀만 수돗물만 마시고 있으면 이 지긋지긋한 골방에서 이사할 돈까지 마련이 된다.

정령에 모든 걸 배팅한 후, 필드보스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뿌우우우우우!

갑자기 도시 전체에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모든 죄수병은 병영으로 귀환하라!"

"모든 헌터들은 길드로 귀환하라!"

길거리 곳곳에 헌터와 죄수병 NPC들이 나타났다.

"필드보스인가?"

드디어 기다렸던 시간이다.

유저들이 붐비는 길거리를 뚫고 지나가 몬스터 헌터 길드로 들어갔다.

내부는 지옥철을 연상할 정도로 유저들이 밀집했었다.

콰앙!

"조요오오오옹!"

그리고 잡음이 커지자 길드장 발레인이 고함을 쳤다. 그는 책장 위로 뛰어 올라 말을 이었다.

"절망의 산맥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우리는 죄수병과 합류해 다가오는 위협을 배제하기 위해 절망하는 산맥의 고대정령을 토벌한다!"

발레인의 말과 함께 눈앞에 퀘스트가 떠올랐다.

[다가오는 절망.]

-뉴 알론에 절망이 다가오고 있다. 모든 이들과 합세하여 그 절망을 제거하자.

-완료 조건 : 절망하는 산맥의 고대정령 토벌.

-실패 조건 : 뉴 알론의 파괴.

뤼움의 시험 퀘스트처럼 완료 조건에 절망하는 산맥의 고대정령이라 명시되어 있다.

"고대정령이라고?"

"미친 것 아냐? 난이도 너무 높은데?"

"뒤졌다. 이거."

벌써 탄식하는 유저들이 속출했다.

모두 전작을 해 본 이들이다.

필드보스에 고대정령이 나타나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 시기다.

이번 작에서의 스펙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본래 고대정령은 만렙 기준으로 10인 파티가 국룰이었다.

지금은 만렙은커녕 50레벨을 찍은 유저도 없다.

모든 유저가 합심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 이 페널티 뭐야!"

"미쳤다. 우리 조지는 거야?"

뒤이어 경악하는 유저들의 말에 급하게 페널티를 확인했다.

[페널티 : 도시의 파괴.]

도시가 파괴되면 물가 상승 20%, 보상 하락 30%, 경험치 획득 및 아이템 드랍율 10% 하락이 됩니다.

"미친."

나도 욕지거리를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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