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42화 고인물은 진행한다.
"오랜만이오. 당신의 높아진 명성은 귀가 아플 정도가 되었소. 뉴 알론의 존중받는 자여."
오랜만에 대면한 뤼움은 전과 다르게 제법 온화해진 태도로 나를 대했다.
이번에 이벤트 1등으로 인해 명성이 높아진 효과일 터다.
"나를 부른 이유는?"
"곧 당신에게 시련이 닥칠 것이오."
"시련?"
혹시나 하는 마음에 퀘스트창을 열었다. 뤼움의 시험의 완료조건은 아직 물음표 그대로였다.
"몬스터 침공 때 뭔가 있다고 했지."
"그 시련의 정체가 다가왔소. 이 도시를 위해 그것을 쓰러트리시오."
뤼움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지만, 뤼움의 시험의 내용은 바뀌어졌다.
[뤼움의 시험]
-뤼움은 불사자인 당신을 존중하고 있다. 몬스터의 침공 때 뉴 알론을 위협할 존재를 퇴치하자.
-완료 조건 : ??? 퇴치.
-실패 조건 : 퀘스트 포기.
퀘스트 내용도 바뀌었다. 불만인 점은 완료 조건이 아직 완벽하지 않다는 점이다.
"아직 덜 만들었다던가?"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사자는 오로지 나만을 위한 직업이다. 퀘스트 라인 또한 다른 이들도 확연하게 달랐다.
다음날.
그 예상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 * *
[5.04 패치노트]
안녕하십니까. 위대하신 영혼들이여.
금일 진행된 점검에서는 드디어 최초의 필드보스가 공개될 예정입니다.
절망의 산맥을 넘어 뉴 알론을 위협할 필드보스를 기다려 주십시오.
헌터 VS 죄수병이 끝난 후에 곧바로 필드보스가 추가될 줄은 몰랐다.
오픈 초기라서 컨텐츠가 고갈되지 않는다는 점은 좋은 일이다.
문제는 그 대상이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는 정도일까.
먼저 생각이 든 것은 히든레코드 쪽이었다. 아직 홈페이지에는 해당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썩이나감: 필드보스에 대한 정보는 있습니까?]
[빨간약파란약 : 확정은 아니라 상품가치가 다소 떨어집니다.]
판매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렇게 언급할 정도면 꽤나 신빙성은 있다는 뜻이다.
[썩이나감 : 얼마입니까.]
[빨간약파란약 : 어떤 유니크 스킬을 얻었는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썩이나감 : 그건 함구하죠.]
공식적으로 유니크 스킬을 획득한 유저는 현재까지 나뿐이다. 지금도 귓속말로 엄청나게 문의가 쏟아지는데 굳이 정보를 흘릴 이유가 없었다.
[빨간약파란약 : 아쉽군요. 판매가 될 정도가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썩이나감 : 그렇게 하죠.]
[빨간약파란약 : 지금 레벨이 어느 정도시죠? 추가로 의뢰하고 싶은 던전이 있는데.]
[썩이나감 : 현재 37입니다.]
레벨에 대해서는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
랭커의 끝자락이 44레벨이다.
내가 다소 이벤트 포인트에 집착하는 동안 일찌감치 이벤트를 포기했던 랭커들이 레벨업만 몰두한 탓이다.
[빨간약파란약 : 내일이 되기 전에 목록을 보낼 테니 그중에서 선정하시면 됩니다.]
빨간약파란약의 연락이 오기 전까지 나도 마냥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래도 최소한의 정보는 얻었으니 다행인가."
뤼움은 절망의 산맥을 언급했다.
몬스터의 침공이 그곳에서부터 시작되니 당연한 것 같지만,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일단은 침공 때마다 출몰하는 몬스터들을 살폈다.
주로 나타나는 것은 야수계였다. 늑대나 들소와 같은 것이 주를 이었으며 그 뒤에는 오크나 트롤 등이 다수였다.
극히 드문 확률로 와이번과 같은 비룡 무리나 골렘이나 정령도 있었다.
"발품을 팔아야 할까……."
엘리멘탈 소울은 지극히 불친절한 시스템이다.
세계관을 알기 위해서는 유저가 일일이 NPC들을 붙잡고 발품을 팔거나 각 도시의 도서관을 들락날락 거려야만 했다.
이번 작에서는 덜하지만 기본 골조는 같았다.
다른 게임에 익숙한 유저들은 공략 게시글 없이 퀘스트 창만 보고는 깰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각종 커뮤니티 및 히든레코드를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일일이 읽을 수 없으니 키워드는 절망의 산맥과 몬스터의 침공이었다.
대부분은 내가 알고 있던 몬스터의 종류와 공략법 및 관련 퀘스트 정도였다.
"다들 그러면 그렇지."
게임 초반에 레벨업에만 열중되어 있다. 대부분의 유저의 관심사는 스토리에는 없었다.
히든레코드가 그런 점에서 특이한 곳이다. NPC들과 대화를 통해 세계관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었으니까.
"너무 분류가 많은데."
전작에서는 비활성화가 되었던 지역이다. 그래서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과는 다소 다른 부분도 있었다.
"이건 힘들다."
하나하나 뜯어서 본다면 힌트가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내 시간이 너무 아깝다.
어설프게 대책을 세울 바에는 뭐라도 하나 더 하는 편이 낫다.
몬스터의 침공이 가까워지면 몬스터 헌터 길드의 의뢰가 바뀐다.
높은 등급일수록 전보다 절망의 산맥에 더 가깝게 배치가 되었다. 심지어 절망의 산맥 인근을 정찰하는 것도 있었다.
"우리 길드의 자랑! 자네라면 이 정도는 해 주겠지?"
"……."
문제는 예상하지 못한 불상사가 생겼다는 거다. 길드장 발레인이 불쑥 들이민 의뢰들을 강제로 살폈다.
[절망의 산맥 탐사.]
[평야의 늑대 퇴치.]
[인근 요새 지원.]
[탐욕스런 마적단 퇴치.]
발레인의 의뢰는 네 개였다. 절망의 산맥 탐사는 대놓고 절망의 산맥에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서 이걸 진행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랭커들이 작심하고 원정을 떠나는 것이 아니면 당장은 불가능한 수준이다.
평야의 늑대도 발생지역이 절망의 산맥 쪽이다.
인근 요새가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필드 퀘스트다. 탐욕스런 마적단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발레인이 주는 퀘스트다. 이걸 마냥 거절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이것들 실패해도 괜찮나?"
"시도만으로도 값어치가 있지."
"……."
간혹 높은 등급의 퀘스트는 실패하면 페널티가 있고는 했다. 그랬기에 발레인의 저 말은 최소한의 걱정은 덜어줬다.
[탐욕스런 마적단 퇴치.]
-뉴 알론의 죄수병들이 탈주해 인근을 괴롭히고 있다. 그들의 본거지를 섬멸하자.
-완료 조건 : 마적단 본거지 섬멸.
-실패 조건 : 마적탄 퇴각.
탐욕스런 마적단의 평균레벨은 40 정도다. 그나마 이 의뢰 정도가 괜찮다고 느껴졌지만, 이상하게도 절망의 탐색 탐사가 눈에 거슬렸다.
어차피 실패해도 페널티가 없는 퀘스트다.
레벨을 포함한 스펙없이라면 조금 늦어져도 괜찮다. 어차피 결사항전의 영역을 시험할 곳도 필요했으니까.
[인근 요새 지원.]
-몬스터로 인해 파괴가 된 요새를 재건축을 위한 방어선 구축을 돕자.
-완료 조건 : 요새 사수.
-실패 조건 : 요새 파괴.
"이걸로 하지."
차라리 이게 낫다.
요새 디펜스인데다가 던전형 퀘스트라 남들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팡! 팡!
"좋은 선택이다. 열심히 죽어 보라고!"
발레인은 불편할 정도로 내 등을 두드렸다. 체력이 듬뿍 깎여 무려 30%나 사라졌다. 이럴 때마다 방어구를 착용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푸히이잉!]
필요한 아이템을 보급한 후, 회색말을 소환했다. 거친 갈퀴를 쓰다듬으며 목표지점을 확인했다.
으적. 으적.
"맛있게 먹어라."
뉴 알론을 벗어나자마자 당근을 먹였다. 스테미나와 속도를 3% 높여 주기에 장거리라면 꽤나 쓸모가 있는 소모품이다.
두두두두두!
회색말이 착용한 나이트메어의 말발굽이 요란하게 불꽃을 내뱉었다.
[끼아아아악!]
[끼악! 끼아아악!]
북쪽으로 달리던 도중 시체먹이새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레벨은 25로 썩은 고기를 좋아하기에 몬스터의 침공 후에 나타나는 놈들이다.
튜토리얼이 끝나고 멋도 모르고 뉴 알론으로 오다가 저 놈들에게 죽는 유저가 많아지면서 엊그제부터 붙여진 별명은 초보척살자였다.
그런 놈들이 나에게 눈을 번뜩였다.
"귀찮은 놈들."
말에 탄 상태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것은 무시를 하고 나아가는 일이다.
무기를 슬링으로 바꾼 뒤, 인벤토리에서 쇠구슬을 꺼냈다.
후웅. 후웅.
회색마의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슬링을 돌린다. 아예 투척 마스터리를 배워 전보다 더 익숙해진 슬링은 전보다도 더 명중률이 높아졌다.
퍼억!
단 일격에 시체먹이새가 날아오던 그대로 죽어 버렸다. 뒤따라오던 나머지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좋아. 괜찮네. 이 정도면 더 말 위에서 싸우기가 더 좋아졌어."
불사자라서 조작에 대한 보정치가 0에 가깝다. 그랬기에 스킬로 인한 약간의 보정만으로도 체감상 슬링을 다루는 실력이 엄청 늘어난 것 같았다.
역시 웨폰 마스터리와 같은 패시브 스킬로 더 투자해야만 한다.
필드 몬스터에게 쓸데없이 어그로가 끌려 두 번의 사냥을 한 후, 퀘스트 장소에 도착했다.
작은 산에 자리한 반쯤 무너진 요새는 30명의 죄수병 NPC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렙들이 찾는 높은 난이도. 그에 더해 몬스터 헌터 길드에서 높은 평판을 가져야만 받을 수 있기에 눈에 보이는 유저들은 모두 랭커들이었다.
"썩이나감이다. 쟤도 여기에 왔네."
"도시 바깥이면 진짜 팬티바람으로 다니는구나. 비쥬얼 미쳤네."
"저 사람 꼭 솔플만 하더라. 그것도 던전만 들리고."
전보다 나를 향한 조롱과 혐오는 줄었지만 의문은 깊어진 모양이다.
[무너진 요새에 입장하시겠습니까? Y/N]
얼마든지 떠들어도 나에게 해만 없으면 된다.
무너진 요새에 입장하자 주변 풍경이 바뀐다.
방금 전까지 가만히 있던 죄수병 NPC들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요새는 피와 불길로 범벅되어 있었다.
먼저 불사자의 영혼함을 바닥에 심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정지! 신분을 밝혀라!"
NPC 둘이 나를 향해 창을 들이 밀었다.
"이곳을 지원하러 왔다."
"당신이 썩이나감이란 말인가?"
"뉴 알론의 존중받는 자!"
NPC들은 나를 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 역시 높아진 명성만큼의 반응이다.
책임자인 솔도 헐레벌떡 다가왔다.
"내가 이곳을 재건하는 솔이다. 우리를 지원하러 온 것이 맞는가?"
"맞다."
"그러면 먼저 목책을 재건해 주시오. 우리 병사들은 너무 지쳤으니."
솔의 부탁과 함께 우측 상단에 목표가 생겨났다.
[목책을 보수하십시오. 0/3.]
요새 주변에 널브러진 목책의 잔해들을 모아서 수리 아이콘만 누르면 된다.
하지만 이걸로 수비를 해야만 하니 아무거나 수리해서는 퀘스트를 다시 시작해야 할 정도라고 한다.
일단은 요새 주변을 훑어봤다.
입수한 정보와 달리 요새의 무너진 부분이 다르다.
남들은 벽이 두 군데나 무너졌는데, 나는 혼자라서 그런지 남쪽 성벽만 무너졌다.
혼자라서 퀘스트 난이도가 다소 조정된 것이라 이건 편하다.
이러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남쪽 성벽에 두 개의 목책을 고치고 성문에 하나를 고쳤다.
"몬스터가 온다! 모두 정신차려!"
"반으로 나눠져서 성문과 무너진 남쪽 성벽을 지켜!"
첨루의 감시병의 말에 솔은 재빠르게 지휘를 내렸다.
[몬스터를 처리하십시오. 0/2.]
총 마흔 마리의 몬스터가 두 무리로 나눠졌다. 공격방향은 당연하게도 성문과 남쪽 성벽이다.
[키헤에엑!]
[크르르릉!]
남쪽 성벽으로 오는 것은 강철어금니 늑대였다. 레벨은 40으로 절망의 산맥으로 가는 곳의 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몬스터다.
"재네들은 좀 힘든데."
지금 시점으로는 랭커들도 꺼려하는 놈들이다.
짐승 특유의 공격성과 늑대들의 조직성을 통한 수적 우위를 통해 금세 유저를 둘러싸고 공격해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굳이 싸울 엄두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앞에는 목책이 있고 옆은 NPC들이 지키고 있으니 부담은 덜하다.
퍼억! 퍽!
[케헤엥! 캥!]
스피어마스터의 소울을 쓴 뒤, 슬링에 쇠구슬을 먹여 힘껏 던졌다.
나보다 레벨이 3이나 높음에도 한 방에 체력이 80%는 사라졌다. 큰 충격에 주춤거릴 때 두 번째 슬링샷으로 죽였다.
콰앙! 쾅!
두 마리를 제거하니 강철어금니 늑대는 어느새 코앞에 위치했다.
머리로 목책을 들이박고 강철과 같은 어금니로 물어뜯으니 내구도는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처럼 썰려 나갔다.
검은 짧고 슬링은 느리다.
목책이 무너지기 전에 내가 나가서 싸워야만 할 것 같다.
아니면 그걸 써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