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39화 고인물은승리한다.
[대박. 엘리멘탈 소울2 최초 캐삭빵 일어난다.]
[엠페러가 공증인이면 끝났네.]
[변태 VS 병신 더비.]
엘리멘탈 소울2 아웃벤에는 즉각 해당 소식이 올라갔다.
썩이나감이라는 네임드에 헬조선순례자라는 비매너 랭커 중에서 하나는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둘의 대결에서 유리한 것은 누구일까.
한쪽으로 여론이 쏠리지는 않았다.
[썩이나감은 전에 고려제일검객 잡지 않았음? 걔가 헬조선보다 상위랭커임.]
[변태검사한테 근딜로 싸우면 지지. 미쳤다고 그렇게 다이다이 뜨냐.]
[그거 정답. 순례자가 아무리 병신 직업이라고 해도 원거리 스킬있음.]
[헬조선 현질로 도배했던데 개가 그냥 장판 깔면 끝이야. 썩이 어떻게 이겨. ㅋㅋㅋㅋ.]
썩이나감의 전적을 높게 사는 쪽과 함께 치명적인 약점을 지적하는 쪽으로 자유게시판의 여론은 나눠져 있었다.
[섬광 : 님. 이길 수 있음?]
[동대문날파리 : 병신아. 걍 빤스런해라 ㅋㅋㅋㅋ.]
[커피는막심 : 도개자하면 봐준데.]
[불후의명철 : 너도 팬티만 입고 싸워라.]
인게임의 상황은 사뭇 달랐다.
헬조선순례자에게는 일방적으로 자신을 조롱하는 귓속말과 쪽지들을 받고 있었다.
"…병신 억까 악플러 새끼들."
헬조선순례자는 그 역겨움이 가소로울 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지껄이는 놈들을 위한 광대가 될 생각은 없었다.
패배자는 자신이 아니라 썩이나감일 것이다.
"너희들도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하나?"
"아니. 당연히 이기지. 필요한 아이템과 스킬들 맞췄잖아."
"PvP에 맞는 순례자 영상들도 정리해서 드렸잖습니까. 무조건 이깁니다."
막피흥신소와 탐욕인력은 곁에서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 말과는 달리 누가 이기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지금 캐릭터는 헬조선순례자가 투기장에 들어서는 순간 삭제할 것이다.
썩이나감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로 상당한 돈을 뜯어낸 것만이 그들을 기쁘게 만들 뿐이었다.
"흥. 놈을 캐삭시키면 이번에는 독고무적도 생각이 달라지겠지."
헬조선순례자는 비매너 유저였지만 랭커인 덕분에 여러 길드에서 초대가 왔었다. 그중에 꽤 괜찮은 길드도 있었지만 결정을 보류했었다.
몬스터 헌터 진영의 최고라 불리는 엠페러 길드에 역으로 가입신청을 냈지만, 오히려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던 헬조선순례자로서는 불쾌한 일이었다.
"그보다 네놈들은 결백한 것이 맞지?"
그는 블랙리스트 사건 이후로 한 시간 꼴로 반복하는 질문을 던졌다.
"당연하지. 그게 아니면 네가 걸친 아이템과 스킬들을 어떻게 구해."
"문제가 있었다면 거래가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번에 오해를 풀 기회입니다."
"우리가 신경이 쓰인다면 투기장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어."
"어차피 독고무적까지 인정하면 업계도 오해를 풀 겁니다."
막피흥신소와 독고무적은 의심을 받을수록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로 인해 블랙리스트가 되었지만, 정작 원하는 것은 다 제공받았으니 헬조선순례자도 더 따질 수 없었다.
"…그렇게 해."
헬조선순례자는 차라리 주변에 저들이 없는 것이 더 집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투기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이미 많은 유저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헬조선 왔다."
"장비 겁나 맞췄네?"
"와. 싹 바꿨네."
유저들은 홍해처럼 좌우로 물러났다.
수천 개의 입이 마음껏 떠들고 그보다 많은 눈은 난도질을 하듯이 헬조선순례자의 몸을 훑었다.
대부분은 온몸에 도배한 고가의 아이템에 마냥 부러워했지만, 일부는 아니었다.
"재 블랙리스트라며? 용케 거래했네."
"역시 그 배신자들인가."
속사정을 이미 알고 있던 다크게이머들은 신기함을 감출 수 없었다. 블랙리스트가 되었음에도 문제의 두 사람과 계속 거래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투기장에 먼저 진입한 헬조선순례자는 방을 만들었다.
* * *
썩이나감으로 게임을 하면서 주변에 쏟아지는 시선은 익숙했다. 특히 조롱과 모멸은 바람처럼 함께하는 수준이었다.
지금은 그 시선들이 불편하고 낯설다.
"좀 과한 것 같은데요."
"재밌지 않나."
"……."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걷고 있는 독고무적이야 웃고 있지만, 난 압정이 든 신발을 신고 있는 것 같았다.
독고무적과 내 뒤로 엠페러 길드 전원이 오와 열을 맞추고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NPC 병사들처럼 발걸음을 맞추는 모습은 제식훈련을 받을 때를 연상하게 했다.
"엠페러 길드 전원이 나온다고?"
"맙소사. 도대체 무슨 관계야?"
"썩이나감이 그렇게 거물인가?"
"……."
뜻밖의 행진을 지켜보는 유저들의 반응은 단순한 호들갑으로 치부할 수 없다.
역으로 내가 저들의 입장이었어도 같을 것이다.
이벤트 포인트만 높을 뿐이지 아직 랭커도 아닌 내가 몬스터 헌터 세력의 최강길드와 함께하고 있는 거니까.
"이러면 다른 곳과 거래 못합니다만."
"난 모르는 일이지. 나와 좋은 거래를 하고 싶다는 건 너였으니까."
"……."
독고무적은 지금 벌어지는 판 자체에 흥미를 보였다. 어떤 이득도 없는 상황에 길드원들을 전부 소집한 것이 그 이유였다.
"이번 PvP의 공증을 맡은 엠페러 길드가 이곳의 질서를 지키겠다."
투기장의 앞에서 독고무적이 선언을 하자 엠페러 길드원들은 주변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일방적인 행사에도 크게 불만을 드러내는 유저는 없었다.
처음부터 이 대결이 이루어진 것은 순전히 엠페러 길드 때문이었으니까.
"도시의 치안을 지키는 것은 헌터가 아니라 우리들이다. 독고무적"
뒤늦게 이견을 제시하는 이가 나타났다.
보통의 경우라면 어떤 미친놈이 엠페러 길드의 일에 끼어드냐는 말이 나올 것이다.
이번은 예외였다.
엠페러 길드조차도 반발할 수 없었다.
죄수병에도 엠페러 길드와 같은 위상을 가진 길드가 있다.
바로 흑랑 길드다.
죄수병의 구심점으로 한국서버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높은 평균 레벨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었다.
전작에서부터 유명세를 떨치던 흑랑의 길드장인 흑군은 독고무적에 이어 랭킹 2위의 유저였다.
양대세력의 수장이자 서로가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이었다.
저벅. 저벅.
흑군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주변의 이들이 비켜났다. 얼굴을 반쯤 가리는 투구에서 빛나는 눈동자는 오로지 한 사내를 보고 있다.
독고무적. 그는 자신의 경쟁자를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너도 구경왔나?"
"이런 구경 놓칠 수 없지."
둘의 관계가 나쁠 것이라는 전망과 달리 꽤나 친분이 있어 보였다.
"인사를 나누는 건 처음이지? 반갑다. 흑군이다."
"썩이나감입니다."
"기대하지. 잘 보여 달라고. 그 친구는 우리 진영에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흑군은 나에게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헬조선순례자가 비매너 유저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흑군이 직접적으로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헬조선이 병영의 1종 창고라도 털었습니까?"
"신병 털었으면 뒤져야지."
혹시나 하는 물음에 흑군은 냉기가 풀풀 풍기는 답을 할 뿐이었다.
헬조선순례자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걸까.
[썩이나감 : 놈이 흑군이랑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독고무적 : 엠페러 길드에 들어오겠다고 죄수병에게 난리를 친 적이 있었지. 그러면 나에게 잘 보일 줄 알았나 봐.]
[썩이나감 : 아하.]
헬조선순례자의 좁은 속내를 생각하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VIP석에서 지켜보지."
독고무적도 흑군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판은 제대로 깔렸네."
헬조선순례자가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준비를 해 뒀을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투기장 목록을 살폈다.
[1:1 초보자만요 ㅠㅠ.]
[썩이나감. 변태새끼 들어와라.]
[24시간 투기장 초보환영.]
[2:2 태그매치 초보만요.]
여러 방 중에서 나를 거론한 것은 하나뿐이다.
[썩이나감. 변태새끼 들어와라.]
-승리조건 : 5전 3승.
-결투장 제한 : 보조무기 사용 불가. 아이템 사용 불가.
-참여인원 1/2.
-비밀번호 : ****.
변태라는 저 단어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저래 놓고 나에게 진다면 어떤 느낌일지 묻고 싶을 뿐이다.
귓속말로 전달받은 비밀번호로 방에 들어갔다.
[와아아아아아아!]
콜로세움을 연상하게 만드는 투기장의 대부분을 채우는 것은 NPC였다. 서로 다르지만 결국 비슷한 열기에 비하면 유저들은 다소 시큰둥하게 느껴져 눈에 확 띈다.
물론 그중에서 시선이 절로 가는 것은 독고무적과 흑군이었다. 존재감이 독보적인 랭킹 1위와 2위가 같이 앉아 있으니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다.
헬조선순례자는 그런 내 꼴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흥. 한 눈을 팔 여유가 있나?"
"물론."
자신이 있게 답을 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헬조선순례자는 저번과 사뭇 달라져있었다. 레벨 43으로 나보다 9나 높아서만이 아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놈의 장비다.
이전에는 메탈베어를 잡기 위한 장비로 맞추어져 있었다. 야수계 몬스터에게 추가 데미지를 더 주거나 퍼센트 데미지를 주는 쪽이었다.
지금은 철저하게 썩이나감이라는 캐릭터를 위한 장비였다.
헬조선순례자가 착용한 가시넝쿨 갑옷이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저 레어 방어구의 특징은 일정한 확률로 데미지를 반사하는 것이다.
방어력이 전무한 내가 공격하다가 죽으라는 뜻이다.
"지면 캐삭이다. 각오가 되었나?"
"겨우 캐삭으로 되겠어? 그걸로 아쉽잖아. 서로 이득이 있어야지. 아니야?"
"……."
헬조선순례자는 슬쩍 독고무적 쪽을 봤다.
"엠페러 길드에 관심이 있지?"
"어쩌라는 거냐."
"내가 지면 저기에 추천해 주지."
"네놈 따위가?"
"거기에 제의받았거든. 날 이기면 끼워주겠지."
"……."
헬조선순례자는 답을 하지 않고 있지만 흥미가 동한 것처럼 보였다.
"네놈의 조건은?"
"캐삭하기 전에 네놈의 아이템 전부를 토해내."
"흥. 얼마든지."
그리고 놈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머리 위에서 숫자가 카운터 되기 시작했다.
10에서 1까지 천천히 숫자가 떨어진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놈의 움직임이다.
순례자는 엘리멘탈 소울2에서 가장 독특한 직업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전직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걸 대신해서 각성기라는 스킬을 배우게 된다.
첫 번째 각성기는 지면 구르기다.
순례자가 스모 선수를 연상하게 하는 동작으로 바닥을 찍으면, 시전자를 중심으로 전방 30M에 부채꼴의 형태로 지진을 일으킨다.
순례자의 다소 부족한 광역딜을 책임지는 스킬로 몰이사냥에 특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론상으로 저 스킬은 나에게 가장 치명적이다.
콰아아앙!
"죽어라!"
헬조선순례자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지면 구르기를 사용했다. 무조건 나올 것이라 예상했기에 망설임 없이 뒤로 물러났다.
드드드드드!
헬조선순례자에서 시작된 진동이 지면을 들썩거리며 나를 향해 퍼져왔다.
공간만 더 넓었다면 좋았겠지만, 투기장의 벽이 더 도망갈 수 없게 가로 막았다.
어디를 보아도 내가 도망칠 공간은 없다.
"이미 거리계산은 끝났다!"
"……."
헬조선순례자가 왜 말을 걸면서 조금씩 거리를 좁혀 왔는지 알 것 같다.
놈은 정확하게 거리를 계산했다.
이 섬세함은 막피흥신소와 탐욕인력의 짓이겠지.
"아. 첫 판 끝났네."
"방어력도 없는데 범위공격 어떻게 막냐."
"변태 때문에 쌩돈 날렸네."
머리 위로 관중들이 내뱉는 한탄이 쌓였다. 말의 무게가 날 짓누르지는 않는다.
먼지처럼 가벼운 그것들은 피할 필요도 없다.
가벼운 손짓에 날아갈 테니까.
타다다닥!
스킬 벽타기.
내 두 다리는 90도의 벽을 평지처럼 밟게 해준다.
중력을 거슬러 벽에 높게 타오른 내가 있던 바닥은 완전히 초토화가 되었다.
스킬 임펙트 상으로는 나까지 휩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 스킬의 판정은 지면에 발이 붙어있을 때뿐이다.
약 5초에 달하는 시간 동안만 공중에 있으면 피할 수 있다.
"오오! 저거 무슨 스킬이지?"
"벽타기다. 저거 있었구나!"
"저걸로 피할 수 있네? 판단력 보소?"
귓가를 어지럽히는 관중들의 말은 무시했다.
내 시선은 오로지 헬조선순례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놈은 스킬을 쓴 후에 당혹스러워할 뿐이다.
"크윽. 저렇게 피할 수 있다고?"
"멍청한 놈."
자기가 쓰는 스킬에 대해 제대로 파악도 하지 못했다면, 이 PvP에는 조금의 변수도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