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32화 고인물은앞서간다.
[YOU DIED.]
허무하게 잿더미가 되었지만, 곧바로 부활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을 정리할 때다.
여러 가지를 궁리해도 결국 벽타기로 공격을 피한 후가 문제다.
끝까지 버텨도 문제고 멀리 떨어져도 문제다.
마지막 페이즈에서 나이트메어의 폭발적인 공격을 막아낼 방도가 없다는 거다.
최대한 놈에게 붙어서 싸워야만 한다. 고민이 깊어질수록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벽타기가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은 몰랐으니까.
"후속작 참 잘 만들었단 말이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불사자라서 그런 걸까. 두 번의 죽음은 실패가 아닌 투자가 될 테다.
콰르르릉!
세 번째 도전.
다시금 촌장의 집에서 벽타기로 나이트메어의 공격을 피했다. 벽에서 뛰어내려 스피어마스터의 소울과 함께 나이트메어를 공격했다.
비명을 지르를 놈에게서 거리를 너무 벌리지 않고 3M의 거리를 유지했다.
촤하악! 촤악!
나이트메어는 몸에 불을 피우지 않았다. 오히려 힘껏 머리를 휘둘러 뿔로 나를 베려고 한다.
엑스자를 그리듯이 사선으로 두 번 머리를 휘젓고는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췄다가 앞으로 달려오며 찌른다.
공격들이 빠른 것은 둘째 치고 반경이 제법 넓었다.
엑스자 공격은 거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피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 찌르기는 무조건 옆으로 피해야만 한다.
그래도 처음과 두 번째보다는 훨씬 낫다.
공략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거리를 좁혔다가 벌리면서 그 이상의 패턴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터엉!
다시 이어지는 공격패턴을 튕겨내기로 끊는다.
저 훤히 드러난 가슴팍에 그대로 검을 찔러 넣었다.
[크어어어어!]
나이트메어의 체력은 금방 바닥을 드러낸다. 연달아 놈의 목을 쳐냈다.
끝이기를 바랐지만 전투는 다음 페이즈로 넘어간다.
나이트메어가 녹아내리듯이 바닥에 스며들더니 마을 외곽에 다시 나타났다.
화르르르륵!
[이 악몽에서 네놈을 죽이리라!]
그리고 저놈의 몸이 활활 타오른다.
"또 여기군."
쓸데없이 힘을 빼지 말고 처음부터 거리를 벌려두는 것이 좋았을까.
이번에는 가만히 있지 말자.
외곽에서 천천히 좁혀 들어오는 저놈과 당장이라도 더 부딪혀야만 한다.
두두두두두!
나이트메어가 지나간 자리에서 불길이 솟는다. 바람을 타고 풍겨오는 불길이 점점 마을을 불태우고 있다.
"와라."
아직 불타지 않은 길목으로 나왔다.
나이트메어는 유성이 되어서 달려오고 있었다. 온몸에 불이 붙은 모습은 섬뜩하다.
저 기세를 조금이라도 늦춰야만 한다.
퍼억! 퍽!
슬링에 빙결을 구슬을 얹어 힘껏 던졌다.
[크허억!]
이때 생겨난 변화는 놀랍다.
빙결의 구슬에 맞을 때마다 나이트메어의 불길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속도도 그에 비례해 늦어졌다.
저 저렴한 아이템이 극적인 효과를 보이고 있다.
"이러면 나야 좋지."
처음보다도 느려진 속도라면, 만용에 불과했을 내 행동에 근거가 있어지니까.
투두두두두!
나이트메어가 코앞까지 다가온 지금 상황이 낯설지가 않다.
거대수개미 때도 이랬으니까.
차이점이라면 나이트메어가 더 빠르고 더 공격범위가 크다는 점이다.
그걸 고려해서 측면으로 가는 발걸음을 더 크게 뻗어서 스쳐지나갈 놈의 몸을 베어버릴 것이다.
문제는 나이트메어가 단순하게 돌진을 할 것이냐다.
처음에 상대할 때를 생각하면 달리던 와중에 머리를 휘둘러 뿔로 날 베려고 했었으니까.
나이트메어를 끝까지 응시한다. 놈의 고갯짓에 패턴이 달라질 것이다.
[내 악몽에 잠들어라. 불사자!]
나이트메어는 고개를 푹 숙인다. 그 끝이 노리고 있는 것은 내 심장이다. 그걸 보며 안심을 했다.
저 모션이면 찌르기다.
스피어마스터의 소울을 사용하며 두 발자국 움직인다. 그리고 허리에 찬 거대공주개미의 검을 뽑았다.
콰아아앙!
[커허억!]
"큭!"
한 차례의 충돌은 더없이 강렬했다. 검을 쥔 팔이 튕겨지고 체력의 3분의 1이 날아갔다. 자세도 무너져서 공격을 피할 수 없다.
이대로 연달아 공격이 오면 즉사다.
나이트메어도 비틀거리며 멀어진다. 그 모습은 더 이상 버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투두두두두!
나이트메어는 다시 불꽃을 피우며 달려왔다. 거대공주개미의 검의 옵션인 출혈로 인해 체력은 꾸준히 떨어지고 있었다.
확신했다.
저건 잡을 수 있다.
퍼걱! 퍼걱!
연달아 쏜 빙결의 구슬이 발을 묵는다.
이번에도 똑같이 심장에 뿔을 겨냥한 채로 오고 있었다. 한 번 성공했으니 두 번째라고 다를 것이 없다.
촤하아아악!
[크하아아아아!]
힘껏 휘두른 검이 나이트메어의 숨통을 끊었다.
콰드드득!
세상에 금이 가며 무너진다.
회색이 무너지고 보이는 것은 그보다는 더 다채로운 창고 안이었다.
나이트메어의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크으…내가…내가…….]
내 그림자에 숨어 있던 나이트메어가 바깥으로 튀어 나왔다. 조랑말처럼 작아진 몸뚱이는 조금씩 흐릿해지고 있었다.
"가라. 그냥."
[불사자여. 너는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나이트메어는 저주와 같은 말을 내뱉고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나온 것은 마석과 나이트메어의 말발굽. 그리고 화염의 망토였다.
[나이트메어의 말발굽.]
-등급 : 매직.
-효과 : 탈것의 이동속도 20% 상승, 탈것의 스테미나 30% 상승, 화염내성LV2.
-설명 : 악몽과 절망을 뛰어다니는 악마에게서 얻은 말발굽이다.
예상외의 물건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엘리멘탈 소울의 맵은 지랄 맞게도 넓다. 웨이포인트도 정해져있기에 발품을 파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탈것은 그 시간을 조금이나마 줄여 준다.
캐쉬템으로 지정되지 않는 아이템이기에 플레이어가 직접 인게임에서 획득하는 수밖에 없다.
나이트메어의 말발굽은 성능도 좋아서 고가에 팔릴 수 있다. 스킬 때문에 미뤄 두었던 탈것을 구매해 쓰고 싶을 정도다.
[화염의 망토.]
-등급 : 매직.
-방어력 : 32.
-효과 : 20% 확률로 화염속성 공격, 피격 시에 10% 확률로 화염방어막 생성, 화염내성LV2.
-설명 : 화염을 기운을 머금은 망토다. 착용하고 있으면 가끔 머리카락이 타고는 한다.
화염의 망토가 가진 방어력은 그렇게 높지가 않다. 이건 화속성의 몬스터를 상대로 특별한 곳일수록 메리트가 있다.
음. 애석하게도 이건 그렇게 비싸게 판매를 하지 못할 것 같다.
[썩이나감 : 퀘스트 끝냈습니다.]
[빨간약파란약 : 징말임이까?]
[썩이나감 : 예상보다 난이도가 낮았어요.]
빨간약파란약은 곧바로 답장을 했다. 다소 놀랐는지 맞춤법도 엉망이다.
[빨간약파란약 : 설마 그보다 먼저 끝날 줄은 몰랐습니다.]
[썩이나감 : 헬조선순례자 말이죠? 그 사람도 같은 곳에서 하던데.]
[빨간약파란약 : 예. 비슷한 퀘스트를 입수해서요. 그와 마찰이라도 있었습니까?]
[썩이나감 : 알면서 보낸 것 같으신데.]
헬조선순례자보다 내가 더 일찍 퀘스트를 끝낸 것이 놀란 일이었던가.
놈의 스펙이 내 생각보다 높았나보군.
[썩이나감 : 이 물건을 팔려고 합니다만.]
[빨간약파란약 : 거래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게임거래도 되고 동등한 가격의 아이템도 가능합니다만.]
음. 이런 식으로 거래를 트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 과정에서의 흥정도 당연히 따르겠지.
문제는 상대가 빨간약파란약과의 거래가 순조로울 것인가다.
이번에 헬조선순례자와 부딪힌 것이 괜히 마음에 걸린다. 의도적이라도 봐야만 한다.
랭커라는 그와 나를 경쟁시키려는 그림으로 보였다.
[썩이나감 : 제시하시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알아서 처분하겠습니다.]
이러면 내 쪽에서도 좋게 나갈 필요는 없지. 공략으로 인해 떨어지는 금액은 아쉽지만, 꿍꿍이가 구린 놈들과 거래를 계속 틀 수는 없지.
빨간약파란약에게서는 잠시 뒤에 귓속말이 왔다.
[빨간약파란약 :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고객에게 요청이 와서요.]
[썩이나감 : 설마 헬조선순례자입니까?]
[빨간약파란약 : 거기에 대해 답변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만큼 고객님의 정보를 판매해야할 수 있으니까요.]
[썩이나감 : 그러셔야만 할 겁니다. 나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나한테 헬조선순례자에 대한 언급을 슬쩍 흘렸다는 것은 반대도 가능하다는 소리다.
빨간약파란약은 생각보다 주제를 모르는 놈이었군.
[빨간약파란약 : 저는 오히려 고객님을 보호하고 있는 편입니다. 계속 당신을 신경 쓰는 사람이 생겨 버렸으니까요.]
[썩이나감 :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건지 모르겠군. 앞으로 히든레코드와의 계약은 깊게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빨간약파란약 : 우려하는 바를 알겠습니다. 가벼운 언행으로 오해를 산 것에 사과를 드립니다. 지금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흥. 눈치는 빠른 놈 같으니. 재수 없지만 이쪽으로는 타고난 놈인 것 같다.
뉴 알론으로 귀환해 하수도 근처에서 그와 접촉했다.
빨간약파란약은 전처럼 유들유들한 태도를 버렸다.
"먼저 제 태도에 불편함을 느끼셨다는 것에 사과를 드립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시던가."
이미 무게추는 나에게 기울었다.
빨간약파란약은 어설프게 간을 보다가 내 화를 진정시키기 위해 안달이 나있었다.
저번의 복수. 제대로 해 주지.
"난 여기 없어도 되거든."
"썩이나감 님이 옳습니다. 그보다 공략에 성공하신 것이 확실하신지요."
"맞아. 거기서 나온 전리품이지."
신뢰성을 위해 증거를 위한 스크린샷도 첨부해서 보여 주었다.
상대가 저자세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할 것은 해야만 한다. 약점을 잡았다고 기본적인 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건 프로가 아니라 진상이니까.
"그렇군요. 나이트메어의 말발굽은 판매의사가 없으신 겁니까?"
역시 빨간약파란약이 욕심을 내는군. 미안하지만 그건 팔 용의가 없다. 그건 애간장을 타라고 보인 거니까.
"나도 탈것은 필요하니까."
레벨이 높아지면서 사냥장소는 점점 뉴알론에서 멀어진다. 당장의 생활비가 궁하지만 살 것은 사야한다. 하루에 라면 하나만 먹으면 대충 매워질 테니까.
"그러면 제가 추천하는 스킬은 이 세 가지입니다."
빨간약파란약은 스킬북 목록을 띄웠다. 하급 방어막, 배쉬, 독침이었다.
음. 이중에서 구미가 당기는 스킬은 없다.
그나마 하급 방어막이 나은 정도다. 다만, 무턱대고 구매를 할 수는 없었다.
얼핏 본다면 하급 방어막은 내 빈약하기 그지없는 방어력을 채워줄 좋은 스킬로 보일 것이다.
자세히 파본다면 전혀 아니다.
저건 배워봤자 돈낭비다.
첫 번째 이유는 하급 방어막은 즉시 시전 스킬이 아니라는 거다. 약 3초 정도의 캐스팅 시간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저걸 사용하는 동안에는 움직일 수 없었다.
소모 마나량에 비해 빈약하게 상승하는 방어력을 제외하고서라도 저걸 사는 것은 과소비다.
내가 뉴비라면 모를까 고이고 고인 고인물이라 멍청한 짓을 하기는 싫었다.
"차라리 여기에 조금의 금액을 더해서 탈것을 구하시겠습니까?"
"그건 흥미롭군요."
스킬보다는 그게 더 낫다. 예상보다 지출이 커졌지만, 빨간약파란약은 시세보다 저렴하게 회색말을 판매했다. 그와 나에게 있어서는 이보다 확실한 사과는 없겠지.
"그러면 즐거운 사냥 되십시오."
빨간약파란약은 다음 고객을 만나기 위해 물러났다.
"불사자면 분명히 승마 때도 보정이 없겠지?"
혼자 남으니 찝찝한 점이 남았다. 아무도 없을 때 확인을 하는 편이 낫겠지.
[푸히이이잉!]
등록을 마친 뒤에 소환한 회색마는 나름대로 큰 울음소리를 터트렸다.
평범한 말이지만 탈것을 갖추지 못한 유저가 더 많은 현실이다. 존재만으로도 이목을 끌 수밖에 없다.
거기에 특별함을 더해 주는 것은 지금 착용시킨 나이트메어의 말발굽이다.
어둠을 묻힌 말발굽에 새겨진 문양은 화염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룩템으로서도 좋네."
흔히 나오는 유령마라던가 해골마와 같은 것에 장비하면 더 멋들어질 거다.
본격적으로 시중에서 물량이 풀리기 전에 팔아서 이득을 봐야겠지.
언제까지 살펴보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길."
시작부터 예상했던 문제가 생겼다.
남들은 멋들어지게 말에 올라타서 자연스럽게 달려간다. 그건 게임에서 정해진 모션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모션이 없다.
"이것도 연습해야 되네."
목장에서 일한 것도 아니니 말을 탄 적이 있을 리가 전무하다. 요령 없이 버둥거리다가 관련영상을 눈대중으로 본 뒤에 말위에 올라탔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현실과 달리 게임에서는 말이 목석처럼 고정되어 있으니 금방 익숙해졌다.
"일단 사냥터로 가 볼까."
말안장에 달린 등자에 발을 걸고 허벅지에 힘을 줬다. 고삐를 쥔 손을 어색하자 흔들자 회색마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말 왼쪽에 뜬 게이지는 속도, 오른쪽에는 스태미나였다.
도움말에 따라 고삐를 더 굳게 쥐고 몸을 앞으로 숙이자 속도가 빨라진다.
반대로 몸을 뒤로 향하면 속도가 줄어든다.
실제 승마처럼 어렵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저건 무슨 아이템이지?"
"벌써 탈것 장비 나왔어?"
하수도에서 벗어나 성문으로 이동하자 지나가던 유저들이 날 주목했다.
초반에 탈것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다. 지금 시점에서 이런 전용장비를 가진 이는 더 적을 수밖에 없었다.
도시를 벗어난 뒤, 본격적으로 속력을 높였다.
두두두두두!
회색마가 착용한 나이트메어의 말발굽이 어둠이 서린 땅을 두드렸다.
스태미나가 떨어지자 고개를 푹 숙이고 털레털레 걸었다.
"좋네. 이런 것도."
주변이 그제야 두 눈에 들어왔다.
높아진 시야로 보이는 지평선은 어두운 하늘과 땅이 닿았다.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끝에 다다르는 것은 허무할 것이다.
"돈 벌어서 부모님 제주도라도 보내드려야지. 죽기 전에 비행기 한 번은 태워 드리자."
칠대악룡 세트를 판매하고 상상도 못한 목돈을 쥐었던 시절에도 비행기 한번 탄 적이 없었다.
아니, 부모님에게 그 흔한 명품 하나 사 드린 적이 없다.
병신 같은 새끼 같으니.
꽈아아악.
"돈 벌자."
후회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음에 감사하자. 그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전화라도 드릴까."
갑자기 부모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지만, 무슨 낯으로 연락을 드려야 할까.
아. 도저히 게임이 손에 안 잡힌다.
오늘 딱 하루만 일찍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