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은 옷을 입지 않아-31화 (31/201)

제031화 고인물은퇴마한다.

"나머지는 패턴."

레이스가 보이는 패턴은 손톱으로 할퀴는 것이 첫 번째였고 3M 부근까지 도망가서 비명을 지르는 것이 두 번째였다.

전자는 별로 거슬릴 것이 없다.

이때까지 경험한 몬스터에 비하면 쓸데없이 느릴 정도다.

문제는 후자의 비명소리다.

공격범위는 레이스를 반경으로 방사형으로 퍼진다. 비명을 지르기 전에 크게 숨을 들이시는 동작 때 옆으로 파고들어서 공격을 해야만 한다.

동시에 두 마리가 상대할 수 있는 한계치였다. 그 이상을 시도했다가 오히려 두 번이나 죽었었다.

주된 이유는 레이스가 움직이는 것이 특별히 소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마리가 측면이나 후면으로 다가와서 공격하면 조금도 대처를 하지 못했다.

내 부족한 게임센스인가 싶어서 플레이영상을 돌려봤지만, 캐릭터 스펙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인칭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3인칭으로 둘러보면 명백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근력 위주의 캐릭터이기에 생기는 일이리라.

지금부터는 반복이다.

공사장에서 벽돌과 시멘트를 옮기는 것보다 더 재미있고 덜 괴로운 이 작업만이 지금 내게 남겨진 전부다.

"여기까지."

할당량까지 레이스를 처리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정까지 아직 시간이 있다. 혹시 모르니 주변을 살피며 질주하는 악몽에 대한 힌트가 필요하다.

먼저 이곳에서 나오는 적들을 보자.

무덤가 입구에는 부패한 좀비와 구울이 있다. 중심에는 레이스가 돌아다니고 맨 뒤에는 미쳐버린 무덤지기가 버티고 있다.

미쳐버린 무덤지기는 이곳의 필드보스다.

질주하는 악몽이 저놈일까 싶지만 그러면 예상 난이도는 말도 안 되게 낮아진다.

빨간약파란약이 공략을 부탁할 정도는 절대 아니다.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하고 마을로 돌아갔다. 레이스는 다 잡았으니 조사를 할 시간적 여유는 있다.

레이스를 잡고 나온 전리품을 보이며 여기저기 찔러보지만 뾰족한 답은 없다.

예외가 있다면 창고에 있던 미친 사람이다.

"흐…흐아아아!"

미친 사람은 땅에 머리를 박고 비명을 질렀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길을 막아서 사냥한 부패한 좀비의 살점을 보였다.

"흐으응. 흐흐흥."

미친 사람은 아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처음처럼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걸 보며 확신을 했다.

질주하는 악몽은 레이스와 같은 유령이다.

"그러면 다 끝났네."

다시 레이스 출몰지역으로 이동했다.

자정이 다가오자 공동묘지는 더 어둡고 음산하게 변한다. 음기가 짙어졌기에 언데드는 더 수가 늘어나고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인벤토리에 재고가 남은 무음의 신발과 은형의 외투를 사용해서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

절망의 산맥에서도 효과를 발휘했으니 이곳의 언데드에게 들킬 일은 없다.

무덤의 중심에 불사자의 영혼함을 숨긴다.

자정이 되어도 변화는 없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도 같았다.

음. 내 판단이 틀렸나. 다른 곳이 있었나? 촌장은 희생자들이 이곳을 찾아왔다고 했었는데.

"희생양이 없어서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마을로 돌아갔다.

희생양으로 누굴 쓸 것인가에 대답은 간단하다.

창고에 있는 미친 사람. 이미 미쳤으니 다른 희생양보다는 원망이 덜하겠지. 그 생각에 들어간 창고에서 보이는 광경은 예상을 빗나갔다.

으드득. 으득.

줄이 엉킨 꼭두각시 인형처럼 기괴한 각도로 온몸이 꺾인 이가 있다.

아까 전만 하더라도 머리 위에 있던 이름은 미친 사람이었건만, 지금은 붉은색 물음표가 전부다.

"이놈이네."

아예 목표물이 마을 안에서 대기하고 있을 줄이야.

"악몽. 말 그대로 나이트메어네."

물음표가 된 NPC의 발밑이 심상치가 않다. 은은한 달빛에 보이는 그림자가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지금 시야로는 명확히 볼 수 없어 횃불을 든다.

그러자 창고의 바닥부터 천장까지 그림자로 가득 채워졌다.

두두두두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난다. 시야가 흔들리며 보이는 것은 역동하는 그림자였다.

방금 전까지 아지랑이 같던 그림자가 점점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다.

[푸히이이잉!]

머릿속에 울려 펴지는 짐승의 울음소리. 그림자는 말이 되어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처럼 역동적이다.

"나이트메어."

중세에서였던가? 악몽을 이끄는 악마가 말의 형상을 띄고 있다고 했었다.

그러면 말이 된다.

질주하는 악몽.

그 설명에 가장 잘 부합하는 몬스터다.

사아아아.

스산한 바람이 뒷목을 스치는 것만 같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눈에 담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실수다.

꽈아아아악!

"큭!"

발밑에서 내 그림자들이 몸을 옥죈다.

[오라. 악몽으로.]

나이트메어는 어느새 내 그림자에 들어왔다. 놈을 뿌리치기도 전에 그림자로 몸이 빨려 들어갔다.

쿠웅!

"빌어먹을."

추락하는 감각은 잠깐이다.

내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일어난 곳은 메마른 강 마을이었다. 차이점이라면 색채를 잃어 흑백뿐이다.

"악몽이라. 공포게임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짙은 안개에 음산한 마을은 공포게임들을 연상하게 한다.

[인간. 새로운 제물이로구나. 너는.]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다.

달이 있어야할 자리에는 짙은 어둠을 뱉어내는 검은달이 있었다.

그 검은달에서 나이트메어의 모습이 보인다.

빨간약파란약이 대단하군. 어떻게 이런 짜증나는 퀘스트만을 골라서 주는 거지.

마석을 처분해서 신성마법을 하나 제대로 익혔어야만 했나.

[최악의 악몽 속에서 죽어…어?]

의기양양하던 나이트메어의 목소리가 떨린다.

[치, 칠대악룡이 왜…….]

아. 그렇군.

악몽은 현실에 기반한다.

불사자로서 겪은 최악의 악몽은 무엇인가. 너무나 당연하게도 칠대악룡일 수밖에 없다.

나이트메어 따위가 감당할 것이 아니다.

"내가 죽였거든."

[마, 말도 안 된다! 네놈이 불사자라는 거냐!]

"정답."

예상과 다르게 스토리가 진행되려고 한다.

모두 내가 불사자인 탓이다.

[거짓말이다! 불사자가 다시 깨어나다니!]

나이트메어가 당황하는 만큼 그가 만든 악몽 또한 크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사방에 퍼진 악몽이 억지로 형태를 갖춘다.

감히 칠대악룡 중 하나가 되려다가 그대로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으으으으! 불사자라고 하더라도 이곳은 나의 공간이다. 네놈은 내가 죽이겠다!]

나이트메어가 소리를 치자 주변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어어어어.]

[그르르르르.]

마을 NPC가 있던 자리에는 그들을 빼닮은 언데드들이 나타났다.

창고 쪽에서는 미친 NPC 대신에 나이트메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트메어의 레벨은 25.

공동묘지에서 봤던 묘지기와 같은 수준이다.

"이게 1페이즈겠지."

아직 나이트메어가 달려들지 않는다. 먼저 다가오는 언데드들을 쓰러트린다. 레벨만 높을 뿐 특별한 패턴이 없어서 스태미나만 소모될 뿐이었다.

[힘을 되찾기 못한 네놈을 소멸시키고 칠대악룡을 되돌리리라!]

그 뒤에 나이트메어가 바닥을 박차고 달려든다. 엄청난 박력에 감히 상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두두두두!

나이트메어의 첫 공격은 돌진이었다. 머리를 살짝 숙이자 칼날처럼 날카로운 뿔이 도드라진다.

악마는 악마인가.

튕겨내기 같은 걸로는 저걸 감당할 도리가 없다.

구르기를 통해 한 차례 피했지만 놈은 그 속도를 유지한 채로 선회한다.

이번에는 백스텝으로 피했다.

콰르릉!

나이트메어는 그대로 집에 처박혔다. 놈은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은 채로 다시 달려왔다.

방금 전보다 머리를 더 숙인 상태다. 아예 땅에다가 눈을 맞춘 상태로의 질주였다.

나를 응시하지 않았기에 옆으로 물러나면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촤아아악!

"큭!"

놈이 나를 지나치며 머리를 크게 휘둘렀다. 칼날 같은 뿔이 나를 베어온다.

다시금 백스텝으로 물러났다.

구르기를 할 여력 따위는 없었다.

[피하기만 할 것이냐. 불사자.]

나이트메어는 멀찌감치 떨어져 나를 조롱한다. 거기에 신경을 쓸 정신이 없다. 그보다는 방금 전의 공격들을 어떻게 대응해야만 할까.

무기 슬롯을 바꾸며 슬링을 들었다.

원거리에서 견제할 유일한 수단이다. 어떤 속성에 약할 것인지 몰라서 각종 구슬들을 하나씩 던졌다.

퍼억! 퍽!

나이트메어는 달려들기 전까지 꾸준히 데미지를 입었다. 그나마 피해를 입은 것은 빙결의 구슬과 전기의 구슬이다.

둘 다 상태이상이 터지면 속도가 느려지니 천만다행이다.

두두두두두!

방금 전에 본 공격들이 이어진다. 제자리에서 피하는 걸로는 한계가 있다.

마을 건물과 벽을 최대한 이용할 수밖에 없다.

콰르릉! 콰르릉!

벼락이 치는 것처럼 나이트메어가 벽들을 박살낸다. 거기서 발견한 것은 나무벽은 아무런 효과가 없지만 돌로 된 벽이나 담장에는 순간적으로 경직상태에 걸린다는 거다.

저걸 노려야만 한다.

[도망치지 마라!]

"닥쳐. 시끄러우니까."

놈의 추적에 벅차 스태미나가 바닥을 보인다.

구르기는 쓸 수도 없고 달리다가는 탈진에 걸린다. 결국 천천히 걸어 촌장의 집에 등이 닿았다.

[끝이다. 불사자!]

나이트메어는 나를 죽일 생각에 들뜬 모양이다. 그래. 일반적으로는 벗어날 도리가 없겠지.

인벤토리에서 지구력 포션을 꺼내 마셨다.

그리고 내가 택한 것은 하나.

[벽타기를 사용합니다.]

이때까지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바로 벽타기다.

콰르르릉!

벽에 발을 닿자 평지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붕에 닿을 듯이 올라가자 나이트메어가 벽에 부딪힌다.

그 경직 상태가 나에게는 최고의 기회다.

스킬을 취소하고 나이트메어의 몸에 올라탔다.

[스피어마스터의 소울을 사용합니다.]

임기응변이지만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이 빈틈을 놓칠 수 없지!

푸욱!

[크어어어어!]

놈의 뒷목에 검을 찔렀다.

치명적인 일격으로 인해 최대로 올라간 데미지는 놈의 체력을 절반이나 깎아버렸다.

[떨어져라! 떨어지란 말이다!]

나이트메어는 나를 떼어내기 위해 이리저리 뛰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몸에 박은 검에 필사적으로 매달릴 뿐이다.

출혈효과로 데미지로 꾸준히 주고 있다.

이대로 버티면 답이 나온다.

"어?"

그때 예상외의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하늘과 땅이 뒤바뀐다. 나이트메어가 옆으로 몸을 굴러버린 것이다.

쿠당탕탕!

[YOU DIED.]

놈에게 떨어지지 못해 같이 바닥을 뒹군다. 육중한 몸에 깔려 그대로 즉사해버렸다.

내 검은 완전히 몸을 꿰뚫었지만 놈의 체력은 40% 정도가 남아있었다.

"그래도 답은 나오네."

벽타기 스킬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처음의 죽음으로 인한 피드백은 오래 가져갈 필요가 없다. 똑같은 대화는 스킵하고 곧바로 언데드들을 죽인다.

창고에서 나오는 나이트메어의 공격을 피하며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

두두두두두!

나이트메어는 그대로 달려든다.

방금 전처럼 벽타기로 공격을 피한 뒤에 등에 올라탄다. 스피어마스터의 소울까지 사용해 그대로 공격을 한다.

그 뒤에는 검을 뽑고 그대로 물러났다.

아까 전처럼 버티고 있다가는 또 죽게 된다.

[허튼 짓을 하는구나. 불사자!]

나이트메어의 두 눈에서 적의가 물씬 풍겨진다. 검었던 눈동자에 붉은빛이 감돌았다.

화르르르륵!

대지를 질주하는 말발굽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이 천천히 발목을 타고 온몸을 뒤덮는다. 그렇게 달려오는 자태는 마치 유성과 같았다.

질주하는 악몽. 그 이름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투두두두두!

나이트메어가 마을을 크게 돌기 시작했다. 속도가 붙을수록 놈에게서 피어나는 불꽃은 더 강렬해진다.

화르르륵!

마을의 건물들이 일제히 불타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다가 화상을 입어 체력이 크게 깎였다. 이러면 건물 위에서 놈을 공격할 수단이 없다.

콰아아앙!

나이트메어의 동선이 점점 조여진다.

불길이 마을 곳곳에 번져서 서있을 곳을 찾기가 힘들어질 정도다.

마을에 가만히 있어서는 답이 없다.

내가 실수했다.

나이트메어가 바깥에 돌기 전에 잡아야만 했다.

화르르륵!

결국 마을 전체에 번진 불길이 날 뒤엎었다.

"제기랄."

피할 곳이 없다. 어설프게 아이템을 써봐야 돈을 낭비할 뿐이다.

[겁을 먹어서 덤비지도 못하는가. 불사자여!]

체력이 0에 수렴하는 순간까지 두 눈을 뜨고 주변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패턴 하나라도 더 파악한다면, 다음 승리는 나의 것일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