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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은 옷을 입지 않아-15화 (15/201)

제015화 고인물은고생한다.

데엥. 데엥.

도시 전체에 종소리가 퍼진다.  꽃밭처럼 번져 있던 불들이 하나씩 꺼졌다.

뉴 알론은 늦은 저녁이 되면 소등시간을 알린다. 이때부터는 바깥으로의 외출이 극히 제한된다.

순찰을 도는 죄수병에게 걸리면 벌금을 물거나 죄질이 심할 경우 병영일일체험을 한다는 후기가 나왔다.

그러니 병영 앞까지 나와서 기다리는 것은 꽤나 위험한 일이다.

"오래 기다렸나?"

"엄청나게."

게임 시간으로 자정이 되서야 욘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뻔뻔한 새끼는 사람 기다리게 했으면서 미안한 구석이 없네.

"안 도망갔군."

"내가 도망칠 이유가 없으니까. 그보다 어디에 가는 거지?"

"바깥이다. 따라와라."

욘은 후드를 눌러써서 무장을 한 자신의 몸을 숨겼다.

"이 시간에 바깥은 못 나가지 않나?"

"개구멍은 있다. 죄수병들만 사용하는 곳이지."

"형편없군."

"그리고 더럽다."

욘의 경고에 등골이 싸늘해진다. 불안함을 억누르고 그를 뒤따라 3구역의 빈민가로 스며들었다.

거미줄처럼 어지러운 거리는 달과 별조차도 닿지 않는 어둠으로 가득했다.

거기를 제집처럼 걷는 욘은 은밀하고 재빨랐다. 뒤쫓기 위해서 아닌 밤중에 뛰어야만 했을 정도다.

"…여기라고?"

멈춰선 곳에서 역겨운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뉴 알론은 도시의 모든 오물을 성 바깥의 해자로 흘려보낸다. 그 하수도를 욘이 물끄러미 보고 있다.

"오물 때문에 병이 걸릴 수 있으니 나간 후에 이걸 복용하도록."

욘이 준 것은 만병통치약이였다.

와. 그냥 이거 받지 말까. 아무리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오물 더미에 다이빙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숨은 최대한 참아라. 끈은 묶었으니 안심하고 기절해도 된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시간을 달라고 말하려고 하기도 전. 욘이 자신의 허리에 감은 줄을 내 허리에 묶어 버렸다.

"숨 참아라."

"……!"

그 신속한 손놀림에 나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곧 벌어질 사태에 아무리 게임이라고 해도 입조차 벌릴 수 없었다.

저 오물 덩어리의 하수도로 몸이 떠밀렸으니까.

콰과과과과!

번지점프를 한 것처럼 몸이 떨어지는 것도 잠시다.

오물이 방류되는 시간이었는지 폭포처럼 쏟아져 머리와 등을 짓눌렀다. 그리고 몸이 수면으로 떨어진다.

욘이 가는 방향으로 끌려갈 뿐이다. 움직일 수 없을뿐더러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였다.

만약 내 레벨이 높았으면 여기서 멀쩡히 두 눈을 떴겠지? 그랬으면 얼마나 지옥 같았을까.

아직 VR 기기에서 제대로 후각을 구현하지 못해서 다행이다. 잘못했으면 이 역겨운 오물의 냄새를 그대로 맡았을 것 아냐.

"푸하아!"

UI에 보이는 숨이 급박해질 때.

욘이 날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달빛이 두 눈에 들어오고 미약한 바람이 분다.

역겨움과 답답함이 가신다.

똑같이 오물범벅인 욘을 보기 전까지는 딱 그랬다.

"제법이군. 의식을 안 잃고."

"역겹네. 진짜로."

"근처에 강이 있다. 몸을 씻고 움직이지."

욘은 익숙한 투로 움직였다.

뒤를 쫓다가 의문이 들었다.

죄수병 시나리오는 쭉 이런 것만 있는 것일까? 그 생각만으로 소름이 돋았다.

강에서 대충 오물을 씻어낸 후에 만병독치약을 먹었다.

록이 안내한 곳은 버려진 농원이었다.

"여기다. 이곳에 몬스터가 나타나서 황폐해졌지. 그때 내 백인대와 여길 토벌했다."

"그런데 왜 편지 같은 것이 온 거야?"

"모른다. 문제는 여기에 뭐라도 있다는 것이겠지."

욘은 성큼성큼 농원 안으로 들어갔다.

농원에는 아직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여기에서 영원히 농작물이 자라지 않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그때 시네마틱 모드로 시점이 변경되었다.

*       *       *

한때 풍요로웠을 농원에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쏟아지는 몬스터들에게 하나씩 죽었다.

창고에 홀로 숨은 여인은 숨이 끊어질 때마다 절규했고 모든 것을 저주했다.

어둠과 죽음이 찾은 농원에서 여인은 시들어 가는 꽃처럼 변했다.

"욘. 우리 농장의 복수. 네놈이 드디어 왔구나."

창백한 피부에 살가죽만 앙상해진 여인은 짐승의 피로 그려진 육망성에 있었다.

"악마여! 내 심장을 가져가 저 저주스런 놈을 죽여 주십시오!"

여인은 녹슨 단검으로 자신의 팔을 그었다. 단검에 흐르는 피가 육망성에 떨어졌다.

화르르륵!

그 자리에 녹색 화염이 피어오르며 연기 속에서 악마가 얼굴을 내밀며 소리쳤다.

[일어나라. 종속들이여. 인간들을 죽여라!]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연기가 주변에 낮게 깔렸다.

쿠드드득.

목이 떨어져 나간 인간의 시체와 몸통이 날아간 몬스터의 시체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시네마틱 모드가 끝났다.

두 눈으로 몬스터를 보기도 전에 발아래에서 대지의 진동이 느껴졌다.

그 뒤 달빛 아래에서 몬스터들의 모습이 보인다.

[퀘스트가 등록되었습니다.]

빠르게 퀘스트 내용을 확인했다.

[조잡한 강령술]

-욘에게 원한을 품은 이가 악마에게 영혼을 바쳤다. 조잡하고 저급한 의식을 파훼하자

-완료 조건 : 마녀 토벌.

-실패 조건 : 욘의 죽음.

"조잡하고 저급하다는 거지."

마녀라는 것에 위협을 느꼈지만 퀘스트 제목이 조잡한 강령술이라지 않는가. 어렵지 않겠지만 충분히 해결 가능하겠지.

후회하기 전에 불사자의 영혼함을 심었다.

강령술이면 언데드인데 은제무기나 성수를 어떻게 구비해 둘 것을 그랬어.

이놈의 예산이 여러모로 문제다.

"큭. 몬스터인가."

"싸울 겁니까?"

"물론. 내 뒤를 따라라."

욘은 방패와 도끼를 굳게 쥐고 나아갔다. 딱 봐도 탱커다. 좋아. 난 뒤에서 딜러로서 역할만 수행하면 되겠어.

화르르르륵!

[크오오오오!]

화염의 구슬을 슬링으로 멀리 뿌린다.

적들을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규모와 수준을 육안으로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서다.

"나랑 동급이라고?"

맙소사. 레벨 10짜리 언데드들이라니. 동레벨 몬스터 따위가 두렵지 않다. 문제라면 숫자가 열 마리라는 것이니 방심해서는 안 된다.

문제라면 입가에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온다는 거다.

돈 냄새가 나는 퀘스트다. 이걸 끝내면 어떤 달콤한 보상이 날 기다릴까!

"인간. 몬스터. 그리고 마녀."

물론 흥분했다고 이성을 잃지 않았다.

시네마틱 모드에 본 것을 다시 상기하자.

마녀는 강령술과 소환술을 주로 쓴다.

이 농원에 죽어나간 것은 인간 NPC만이 아니다. 욘과 백인대에게 쓸려나간 몬스터의 시체도 있다.

인간형 언데드로 끝이 날까?

2차, 3차 웨이브도 생각해야 해.

"나를 봐라!"

욘이 도발 스킬을 쓰자 몬스터들이 모두 욘에게 달려든다. 그중에서 가장 외곽에 있는 해골병사에게 슬링을 휘둘렀다.

퍼억!

돌멩이가 정확히 두개골에 맞는다.

달그락. 달그락.

해골병사는 나를 응시하며 다가왔다.

욘의 도발스킬이 중급임을 알 수 있다.

상급 스킬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 맞은 놈은 물론 주변 놈들도 여전히 욘을 쫓아간다.

중급은 지금처럼 맞은 놈만 쫓아온다.

마지막으로 하급은 맞은 놈이랑 맞지 않은 놈들까지 나에게 온다.

터앙!

해골병사가 휘두르는 검을 튕겨낸 후, 그대로 검을 찔렀다.

푸욱!

"좋아!"

회심의 찌르기가 적용되어 해골병사의 체력은 20%만 남았다.

스피어마스터의 소울까지 함께했으면 한 방 컷이었겠지.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후속타로 놈을 쓰러트렸다.

달그락. 달그락.

그 어그로가 너무 컸을까.

아니면 욘의 도발스킬의 효력이 끝났던 것일까.

좀비 두 마리가 다가왔다. 거리가 있었기에 슬링으로 견제할까?

아냐. 차라리 바짝 붙어서 더 빨리 끝내자.

터엉!

사선으로 움직여 좀비 하나를 끌어들여 놈의 공격을 튕겨낸다.

좀비는 한쪽 팔을 젖힌 채로 경직된다. 그 드러난 가슴에 힘껏 검을 찔렀다.

해골병사 때처럼 추가타로 숨통을 끊었다.

역시 동레벨의 몬스터는 조금도 무섭지 않다. 스토리를 빨리 진행시켜서 더 강한 놈들을 잡아야 할 텐데.

콰아아앙!

"내가 뉴 알른의 백인장 욘이다. 해골 따위가 날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더냐!"

탱커로만 생각했던 욘은 강렬한 모습을 보였다.

방패로 적을 밀어내고 도끼로 적을 박살내며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모두 한 방 컷이었다.

고인물로서 견적이 보인다. 이건 욘이 캐리하는 버스고 나는 뒤에서 버스비만 지급하면 편하게 끝낼 수 있다.

인간형을 다 없애니 예상대로 2차에 나타나는 것은 몬스터의 사체들이었다.

어그로 관리를 위해 욘의 뒤에 바짝 붙었다.

"내 뒤에 붙어라!"

"이미 그러고 있다고."

솔직히 죽어도 다시 살아나면 되잖아? 그래서 몸이 근질근질하다.

2차의 언데드들은 나보다 레벨이 1에서 2씩은 높다.

욘은 그것들조차도 한 방에 없애니 그 강함은 추정할 수 없을 정도다.

쿠웅!

"우오오오!"

욘이 크게 방패를 휘둘렀다. 가격당한 놈이 공처럼 날아간다. 뒤에 바짝 붙어 있던 놈들이 거기에 맞고 뒤로 밀려났다.

콰득! 퍼걱!

욘의 도끼가 풍차처럼 휘둘러진다.

퀘스트 진행 속도는 빠르다. 가만히 있으면 금방 끝나지만 깨알같이 검을 언데드들에게 찔렀다.

"뒤에 있어라. 위험하니까!"

"웃기지 말라고. 저 경험치들을 그냥 놓칠 것 같아?"

욘과 나는 파티상태였지만 다른 게임처럼 경험치를 완전히 공유하지 않는다.

딜러라면 데미지를 얼마나 입히냐에 따라 경험치를 받는다.

즉, 고렙유저가 저렙유저에게 버스를 태워 주는 행위가 꽤나 비효율적이라는 거다.

손만 빨고 가만히 있어서는 좋을 일이 없다.

최대한 공헌을 해야만 한다.

퀘스트를 깨도 레벨 하나 올리지 못한다면 똥물에 뛰어든 보람이 있겠냐고!

콰득!

욘의 도끼에 남아 있던 마지막 적이 무너졌다.

"빌어먹을!"

나름대로 틈이 날 때마다 공격을 했지만 욘이 압도적으로 날뛰어서 경험치는 티끌만큼만 얻었다.

[복수하겠다. 욘! 내 가족의 원수!]

거칠 것 없이 마녀가 있는 육망성에까지 다다랐다. 그나마 다행일까?

언데드들을 일으킨 악마는 없다.

"방심하지 마라. 악마가 몸을 빼앗았으니."

욘은 경고와 함께 신중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마녀는 시네마틱으로 보던 것과 달라졌다. 이미 악마화가 진행되었다. 피부는 검게 변했고 앙상한 팔에는 사신이 쓸 법한 거대한 낫이 들려 있었다.

[일어나라. 원혼이여!]

벌려진 입에서 튀어나오는 소리는 마녀와 악마의 이중창이었다.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갈 곳을 잃은 수많은 원혼들이 하나의 시체에 향한다.

쿵! 쿵!

농원의 가장 중앙이 들썩였다. 지면이 일부 부서지며 거대한 시체 하나가 천천히 일어났다.

무려 4M가 넘는 거구의 사이클롭스였다.

[그워어어어어어!]

붉은색 글자로 적혀진 이름은 거대 구울. 30레벨에 달하는 놈의 포효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지금의 나로서는 감히 범접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냉정하게 저놈이 발만 굴려도 그 여파에 뒤질 것 같은데.

"저놈은 내가 감당한다. 썩이나감! 성수를 바르고 저 악마를 정화해라!"

답답한 부분을 긁어 주듯이 욘은 은은한 빛을 발하는 병을 넘겨줬다.

이 퀘스트를 끝낼 핵심 아이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광채가 옅은 반딧불과 같기에 실망이 먼저 나왔다.

"하급 성수구나."

순도가 높은 성수에 다른 것을 섞어서 만든 보급품이지만, 이게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차이다.

성수가 있으니 악마가 되어 가는 마녀에게 유리해진다.

"재밌겠네. 아주."

마녀의 레벨을 보며 의욕이 샘솟는다.

남들은 무려 12나 된다고 하겠지. 미안하지만 나는 아니다. 겨우 레벨 2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먼저 공격할 수 있으면 된다.

선공필승. 그 단어보다 내게 어울리는 전투 방식은 없겠지.

[다가오지 마라!]

그때 마녀가 비명을 질렀다. 뭘 하려는 거지? 혹시나 마법을 쓸까 봐 전력으로 달려갈 때.

"……어?"

뭐지? 두 발이 움직이지 않아. 그리고 내 몸이 앞으로 쏠리는데?

달리던 그대로 넘어졌다.

땅을 짚고 일어나려고 할 때.

촤하아아악!

마녀의 낫은 추수를 하는 농부의 것처럼 길게 휘둘러졌다. 구르기로 피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허리 밑으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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