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14화 고인물은횡재했다.
"아. 그게 저거구나."
슬라임의 수를 너무 줄이면 고블린이 나타난다던 NPC의 말이 기억났다.
고블린들은 수가 줄어든 슬라임들에게 덤벼들었다. 서로 뒤엉키는 것을 가볍게 넘길 수 없지.
"진짜 세력다툼이 일어나네."
같은 몬스터끼리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싸우는 광경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전작에서는 시네마틱 영상에서만 볼 수 있던 장면이었다.
소울리스가 이런 부분까지 신경을 썼을 줄은 몰랐다. 확실히 전작보다 플레이적으로 더 높은 기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키하아아악!]
[키악! 키하악!]
이곳의 고블린과 슬라임 간의 레벨 차이는 없는 수준이다. 개채수는 고블린이 더 많으니 어떤 상황이 이번 전투의 승패는 결정되어 있다.
두 무리의 싸움을 보면 몸이 근질거린다.
고블린이 이기든지 슬라임이 이기든지 중간에서 끼어들어서 이득을 톡톡히 챙기고 싶었다.
서로 싸우더라도 중간에 내게 어그로가 끌리면 최악의 상황도 있으니 지켜볼 수밖에 없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서로 싸우다가 소수의 몬스터를 잡는 거다.
결국 고블린들이 돌팔매질로 슬라임들을 쫓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호수를 벗어난 놈들은 과수원쪽으로 오고 있었다.
혼자서 사냥을 하기에는 수가 너무나 많다.
넓은 필드에서 싸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과수원에서 싸우는 것이 낫다.
아니면 이걸로 추가적인 퀘스트라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로 과수원에 갔다. 일꾼 NPC 하나에게서 느낌표가 보였다.
기대가 현실이 될 수 있다.
"슬라임들이 내려오고 있다. 과수원의 주인은 어디에 있지?"
"그, 그게 정말입니까? 기다리십시오."
일꾼이 사라지더니 곧 과수원의 주인과 함께 나타났다.
"슬라임 퇴치를 맡겼는데 왜 놈들이 내려온다는 말이오!"
"고블린들이 내려왔다."
"고블린이 내려올 만큼 수를 조절하라고 하지 않았소!"
과수원장은 화를 버럭 냈지만, 양심에 찔리는 건 없다.
"난 정해진 수만 처리했다."
"거짓말 같으니!"
"날 믿지 못한다면 이대로 길드에 귀환하도록 하지."
"……."
과수원장은 입을 꽉 다물었다. 그는 저 멀리를 쳐다본다. 일꾼 하나가 급히 다가와 속삭였다.
"나으리. 정말로 슬라임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과수원장은 이를 악물었다.
뉴 알론까지 그리 먼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헌터가 오기까지 기다렸다가는 과수원이 큰 피해를 입는다.
[퀘스트가 등록되었습니다.]
"선금으로 절반을 주지. 여기까지 오는 슬라임을 모두 퇴치하시오."
궁지에 몰린 과수원장은 묵직한 돈 주머니를 꺼냈다.
"얼마든지."
후회하지 않게 바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무려 5은화가 있었다.
슬라임 1마리당 나에게 돌아오는 금액의 평균치를 내자면 거의 10동화였다. 1은화가 1,000동화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이 퀘스트만 끝내면 스킬북 두 개는 더 살 수 있다.
F급 헌터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수다.
[과수원장이 기억할 것입니다.]
"꼭 해내야만 할 것이다. 반드시!"
과수원장의 닦달을 무시하고 퀘스트를 확인했다.
[과수원의 보호.]
-숲에서 빠져나온 슬라임들을 퇴치하여 과수원을 지켜내자.
-완료 조건 : 슬라임 전멸.
-실패 조건 : 슬라임이 과수원에 도착.
"이건 무조건해야지."
얼른 슬라임들이 오는 쪽으로 이동했다. 가만히 세어보니 스무 마리가 스멀스멀 기어오고 있었다.
그 사이에 네 마리가 늘었다.
"여기서 끝내야지."
협소한 숲을 벗어나고 드러난 대지는 넓다.
슬라임들도 일렬로 오지 않았다. 반원형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서 오고 있었다.
저들의 목적지가 과수원만 아니라면 상대하기가 더 편했을 것 같은데.
과수원에 피해가 생기면 안 되니 한 마리씩 싸웠다가는 그대로 퀘스트는 실패다.
"어차피 나는 죽어도 상관없잖아."
불사자의 영혼함을 중간지점에 심는다. 그리고 슬라임들의 동선을 제한하기 위해 슬링으로 좌우에 화염의 구슬을 던졌다.
화르르륵!
불길이 번져 짧지만 벽을 형성했다.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던 슬라임들이 체력이 깎이고 일렬로 나에게 온다. 이렇게 어그로를 관리하면서 싸우는 것도 오랜만이다.
"좋아. 해 보자고."
선수금만 5은화다. 총 10은화를 주는데 위험 따위야 얼마든지 받아들여야 한다.
오픈당일인 지금 기준으로 1은화에 현금 1만 원으로 거래가 될 정도다.
이 퀘스트 한 번이 내가 하룻동안 공사판을 나가던 돈보다 더 많이 들어온다.
"벌 수 있을 때 벌어야지."
화염의 구슬도 아끼지 않고 사방에 뿌린 덕분에 다가오는 슬라임들 중 일부는 체력이 절반 가까이 깎였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 없다. 아직 멀쩡한 슬라임들도 태반이다.
퍼억! 퍽!
뒷걸음질치면서 슬링을 힘껏 휘둘렀다.
퍼걱!
전력으로 던진 슬링 두 번에 한 마리가 터졌다.
"민첩도 조금 높여야 할까."
슬링이 조금 더 데미지가 나으면 사냥이 편할 텐데. 그 갈등을 지구력포션을 들이키며 억눌렀다.
슬링에 아쉬워하지 말자.
이 퀘스트가 끝나고 들어올 돈만을 생각하자.
* * *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이었지만, 몸에 밴 안전한 사냥은 죽음 없는 승리를 가지고 왔다.
차라리 두 번 정도 졌어야 했나 싶을 정도로 가지고 있던 소모품들을 탈탈 털어 넣은 탓이다.
일반적으로는 훌륭한 전과라고 평할 수 있지만, 불사자로서는 훌륭하지 못하다.
불사자의 특징이 무엇인가. 죽어도 페널티 없이 살아나는 것이다. 특히 불사자의 영혼함으로 전투장소에서 살아날 수 있지 않은가.
체력이 부족하거나 스태미나가 부족하면 과감하게 죽는 것이 낫다. 괜히 비싼 포션을 소비할 필요가 없었다.
결국 예전 플레이가 남은 탓이다.
"지금은 피드백이라도 되니까 다행이지만."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째부터는 고의다.
지금의 나는 후자에 속한다.
꿀꿀한 마음도 잠깐이다.
퀘스트를 완료하고 인벤토리에 마지막 5은화를 받으니 입이 찢어질 것 같았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네."
과수원장은 두 번은 없다고 덧붙여 말했다. 반복적인 행위는 차단하는 건가.
당분간은 이 근처에서 사려야겠군.
곧장 뉴 알론에 복귀해 몬스터 헌터 길드로 가려다 요한과 만났다.
평상복이라서 머리 위의 글자가 아니면 못 알아봤다.
"일은 잘 끝난 거야?"
"여관으로 오십시오.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지."
10레벨이면 본격적으로 직업레벨을 배웠었지.
불사자도 전용 스킬이 드디어 열리는 걸까? 마냥 스킬들을 구매할 필요가 없다면 다행이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요한은 쓰게 웃었다.
"일이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이곳을 벗어나 더 안전한 곳으로 갈가 싶었지만 당분간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이유는?"
혹시 알퐁스 교주가 브라이크 지역을 벗어난 건가?
"근방의 몬스터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습니다. 주변을 정리하지 않는다면……."
"아. 그런 이야기인가."
"월권입니다만 이곳에서 불사자로서의 능력을 일부 되찾도록 돕고자 합니다."
그 말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거절할 것도 없이 흔쾌히 허락했다.
방에서 바로 해도 되지만, 요한은 굳이 지하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바닥에 처음 보는 마법진을 그렸다.
흔히 볼 수 있는 육망성진을 기반으로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중앙에 서십시오."
"뭘 하는 거지."
"불사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깨달은 자입니다. 그리고 그걸 자신의 것으로 정립하였지요."
요한은 아련한 눈은 부담스러울 정도다.
"흠. 그래서?"
"육신이 기억할 것입니다. 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역했기에 그들의 것은 배울 수 없지만, 인간이 쌓은 것은 다시 배우실 수 있습니다."
"그건 알고 있는데. 배우는 것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는 것 아니었나?"
"그걸 열어 준다는 것이군."
"신의 굴레에 벗어난 인간이기에, 오로지 인간의 힘만으로 신과 싸워야만 합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한 지금은 그 경계가 희미한 것이 있지요."
요한의 말은 묘한 어감을 주었다.
"정확히 뭘 말하는 거지? 예를 들면 내가 강림 같은 걸 쓸 수 있는 건가?"
"신의 아바타가 될 수 있는 능력이 된다면 가능하십니다."
"…그게 정말이야?"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것 같다.
만약 강림이라도 쓸 수 있다면 불사자가 가지는 빈약한 방어력 따위는 극복하고도 남는다.
"인간이 쌓은 것이 아닌 인간의 능력이 되는 것을 펼칠 수 있게 해드리는 겁니다. 이건 교단의 선물이지요."
"당장 하지."
그걸 거부할 이유는 없다.
얼마 전까지 플레이를 하던 테이머의 경우는 펫이나 소환수와의 교감에 따라 그들의 스킬을 쓸 수 있었다.
불사자 또한 그런 식으로 접근이 가능하다면 엄청난 스킬들을 조합할 수 있으리라.
요한은 마력을 모았다. 주변에 들끓은 푸른 마력은 신성력으로 치환되어 하얀 빛으로 변했다.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스며든다.
"이게 끝이야?"
"…예. 이제 당신이 수많은 스킬들을 펼치는 것에 제약이 없어졌습니다."
요한은 핼쑥해진 낯으로 주저앉고는 그대로 잠들었다.
[불사자의 숙명]
-종류 : 직업 전용 스킬.
-효과 : 불사자는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습니다. 인외의 것 또한 자신의 능력이 되면 펼칠 수 있습니다.
"괜찮네. 아주."
새로 생겨난 스킬이 아주 마음에 든다.
인외의 존재라면 대표적인 것은 신이나 천사 악마는 물론 몬스터나 정령 같은 것들도 있다.
저 모든 것을 익힐 수 있다.
"남은 것은 내 능력에 달린 거니까."
자금과 컨트롤이 버텨 준다면 신을 강림시키면서 흑마법이라도 쓸 수 있다는 말이다.
현실적으로 생각도 할 수 없던 조합을 펼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건 얼마나 나에게 많은 부를 가져다 줄까.
선택지가 많다 보니 머리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짜악!
"정신 차려. 이 멍청한 새끼야."
아직 모든 것이 막연하다.
손에 돈이 쥐어지기 전까지는 나의 것이 아니다.
혼자서 히죽거리는 시간에 몬스터 하나라도 더 잡아서 레벨업을 해야 한다.
"이봐. 의뢰를 제법 잘했더군. D급으로 올려줄 것이니 잘해 봐."
몬스터 헌터 길드로 돌아가자 발레인이 새로운 자격증을 줬다. 이로서 길드 상점에서 더 높은 아이템과 스킬 구매가 가능해졌다.
"확실한 하나냐. 괜찮은 두 개냐."
여러 스킬들 중에서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것을 골랐다.
[회심의 찌르기]
-종류 : 패시브 스킬.
-효과 튕겨내기 후, 경직된 적에게 찌르기를 하면 치명타로 적용합니다.
바로 이 스킬이다. 튕겨내기 후의 연계스킬이기에 굉장히 치명적인 스킬이었다.
이 하나에 10은화라는 것이 고민이다.
다른 스킬 두 개에 눈길도 갔다.
"비싸기는 하지만 못 모을 금액은 아니니까."
등급도 올랐으니 더 강한 적을 사냥하자. 슬라임보다 더 가치가 있는 퀘스트는 널렸다.
하나씩 차분히 살피다가 이상한 퀘스트를 발견했다.
[죄수병에게로 보내는 편지.]
-죄수병 욘에게 피 묻은 편지를 전달하자.
-완료 조건 : 욘에게 편지 전달.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겨우 편지배달이 몬스터 헌터 길드에 취급할 건 아니다.
"죄수병이라."
편지 심부름은 관심이 없다. 그러나 죄수병을 접한다는 것에 흥미가 갔다.
잡화점이나 과수원 때처럼 기묘한 느낌이 난다.
퀘스트를 승낙하고 죄수병이 머무는 3구역의 병영까지 갔다.
"거기까지. 외부인은 출입금지다."
"돌아가도록 해라."
입구를 지키는 죄수병들이 창을 교차로 뻗으며 앞을 막는다.
플레이어에게 지급된다는 것보다 비싸 보이는 장비다.
"이 서신의 주인을 찾으러 왔다. 욘이라고 하더군."
"욘? 그 녀석에게?"
"또 그때의 편지인가."
죄수병들은 서로 눈빛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옆을 가리켰다.
"일꾼들이 출입하는 곳이다. 저곳으로 가 봐라."
"욘을 찾아왔다고 하면 만나게 해 줄 거다."
의외로 바로 보내 준다. 가벼운 의뢰는 아닌 것 같다.
옆문을 열자 드러나는 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났다. 창고들이 보이며 다른 죄수병들이 날 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