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12화 고인물은싸운다.
"여기다."
계속 나아가던 샘슨의 발이 멈춘다.
이때까지의 좁은 통로가 끝났다.
보이는 것은 넓은 공동이다.
고블린 두 마리에게 시중을 받는 고블린 주술사 하나가 있었다.
고블린 주술사의 레벨은 8이다.
예상보다도 높다.
"두렵나? 신참."
샘슨의 비웃음을 무시하고 나아간다. 거리가 좁혀지자 고블린들이 나를 응시한다.
"인간…후회…하게 해…주마."
먼저 어설픈 말과 함께 고블린 주술사가 지팡이를 들었다.
치릉. 치릉.
지팡이에 걸린 고리끼리 부딪힌다. 은은한 소리가 퍼진다. 처음부터 주술을 쓰는 것인가. 아직 거리가 멀었기에 막을 수단이 없었다.
"미칠…것이다. 두려…워하라. 인간…이여."
고블린 주술사는 후속작이라고 특별하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쓰는 것은 광기의 주술이었다.
주변을 지키는 고블린이 광폭화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뒤이어 쓰일 공포의 주술은 내 행동에 제약을 걸 것이다.
고블린 둘을 제거하면서 공포의 주술을 피해야만 한다.
[키하아아아악!]
[끼이이이익!]
광폭화된 고블린들이 나에게 달려든다. 그 속도는 해골병사에 필적한다.
직선적으로 바뀐 움직임은 구르기를 통해 옆으로 피하면 그뿐이다.
문제는 스태미나다.
구르기로 피하기만 해서는 결국 바닥을 보인다.
하지만 서두르지 말자. 광폭화된 고블린의 패턴을 충분히 파악한 뒤라도 상관없다. 이건 게임이고 난 다음 기회도 있다.
[키하악!]
[카악! 칵! 칵!]
광폭화된 고블린은 무기도 쥐지 않았다. 날카로운 손톱을 다섯 번 휘두르고 목을 깨물려고 뛰어드는 패턴이었다.
내가 노리는 것은 다섯 번이나 손톱을 휘두르고 깨물려고 할 때다.
고블린과 내 공격거리 차이를 더듬으며 공격한다.
촤악! 촥!
내 검은 광폭화된 고블린을 하나씩 베어 버렸다.
"개 같은 판정 같으니."
고블린을 죽인 것은 순식간이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내 검이 먼저 고블린들의 몸을 베었다. 그러나 깨무는 동작의 판정이 이상했다. 공격이 부딪힌 것으로 처리가 났는지 내 체력도 덩달아 깎였다.
치릉. 치릉.
"인…간…. 강한 인…간! 대지의 여신. 너에게로."
멀찍이 떨어져 있던 고블린 주술사가 예상대로 움직였다.
힐링포션을 마시며 나에게 걸 저주를 피하기 위해 움직인다.
드드득!
"어라?"
결과물은 예상을 벗어났다.
나보다 더 크고 듬직한 토템 하나가 공동 중앙에 솟아났다.
고블린은 기본적으로 샤머니즘이다. 지금처럼 토테미즘을 통한 주술은 사용하지 않는 설정이었다.
[고블린 주술사가 대지의 토템을 소환합니다.]
[플레이어의 이동속도가 20% 느려집니다.]
"빌어…먹을!"
내 두 다리가 천천히 무거워진다.
반대로 고블린 주술사의 몸에는 은은한 광택이 돌았다.
적에게 너프를 주고 자신에게 버프를 줄 정도면 굉장히 까다롭다.
겨우 레벨 8짜리가 쓸 것이 아니다.
토템 주술을 극복하는 것은 하나. 1초라도 빨리 박살내는 것이다.
콰앙! 쾅!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서 토템을 공격했다. 느려진 것은 이동속도뿐이다. 공격력과 공격속도는 그대로다.
대지의 토템은 벌써 20%의 체력만 남았다.
"그만…둬. 어딜…!"
고블린 주술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보통의 경우라면 토템이 무너지기 전에 유저를 공격할 수 있을 터였다.
내가 특이 케이스일 뿐이다.
와르르르르!
추가타에 토템이 무너진다. 모래주머니를 달았던 것 같은 두 다리가 원래처럼 움직인다.
"죽…어라!"
한참 뒤에야 고블린 주술사는 고함을 치며 지팡이로 찔렀다.
"늦었다니까."
보스는 기본적인 패턴을 보고 상대해야만 한다. 공격을 하려고 할 때마다 구르기로 물러난다.
부하 두 마리에게 광기의 주술을 거는 것을 1페이즈라고 정하자. 대지의 토템을 쓰고 지금까지는 2페이즈라고 봐야 한다.
고블린 주술사의 공격은 그것치고는 너무 심심한 편이다. 다가와서 찌르고 휘두르는 다소 평범한 공격들 일색이다.
다시 주술을 쓰지 않는다.
그래. 양심이 있다면 스킬 쿨타임을 길게 하거나 사용횟수를 제한해야지.
두 눈에 익은 패턴대로 고블린 주술사가 크게 지팡이를 휘두른다.
느리고 큰 동작이다.
한쪽 눈을 감아도 튕겨낼 수 있다.
터어엉!
해골병사만큼은 아니지만 손에 느껴지는 반발력이 제법 묵직하다.
주술사지만 실수하면 죽는다. 계속 구르기를 쓴 탓에 거리도 문제지만 스태미나도 부족하다.
헛되게 쓰일 시간을 지구력포션을 마시며 보냈다.
터엉!
뒤이어 다시 찔러오는 고블린 창을 쳐낸다.
이번에는 구르기로 사정거리에 들어가 일어나는 동작과 함께 놈의 허리를 베었다.
고블린 주술사의 체력이 고작 3분의 1만 빠진다.
보스라서 그런지 일반 몬스터보다는 체력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연달아 공격을 하려고 했지만, 고블린 주술사는 충격과 함께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새로운 페이즈일 가능성이 있기에 감히 추격하지 않았다.
"캬하악! 건방…진! 건방진 인간!"
고블린 주술사는 발을 구르며 화를 낸다. 그리고는 지팡이를 막무가내로 휘두르며 다가왔다.
아까와 같은 것인가. 저 단순한 발버둥은 그대로 깨부술 수 있다. 그런 확신이 들며 피하지 않고 다가갈 때다.
콰과과과과!
지팡이에 닿은 바닥이 모래처럼 파헤쳐진다.
피해야만 하나? 맞서야만 할까? 잠깐의 고민이 내게서 선택지를 뺏어갔다.
다가오는 고블린 주술사의 속도가 갑자기 발라졌기 때문이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
터엉!
"제길!"
튕겨내기는 성공적으로 사용했건만, 오히려 내 팔이 튕겨나갔다.
경직상태에 걸려 움직일 수 없다.
콰드득!
지팡이에 맞은 다리가 부러지고 턱이 돌아간다. 비틀어지는 시야는 회색으로 변했고 날 밟고 가는 고블린 주술사의 무게감도 느꼈다.
[YOU DIED.]
난 놈에게 죽었다.
"쯔쯧. 루키는 루키인가."
그리고 귓등으로 샘슨의 조롱도 들렸다.
[분노가 상승합니다.]
솟구치는 짜증으로 생겨난 칠죄종은 잠깐이다.
불사자의 영혼함에서 부활한 나는 상태를 확인했다. 경험치의 손실은 없다. 착용하고 있는 장비나 인벤토리도 손실이 없다.
"확실히 페널티가 없어."
그리고 살아나는 것도 빠르다.
불사자의 영혼함을 전투장소에 심으면 몇 번이고 다시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에 그건 뭐였지? 튕겨내기는 분명히 성공적이었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전투를 복기했다.
날 죽인 고블린 주술사의 마지막 공격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여기서 그냥 뺐어야만 했는데 오판이었어. 특히 이거 공격스킬이구나. 튕겨내기는 일반공격만 가능한 거였는데."
튕겨내기가 공격스킬까지 감당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만능기가 되는 거겠지.
내 단점들이 고스란히 보인다.
기본적인 시스템을 머리로만 알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그래도 이건 심각하다고. 레벨8짜리 고블린 주술사가 샤머니즘이랑 토테미즘 주술을 쓰는데 공격스킬도 있냐고."
짜증이 나서 벽을 몇 번이고 걷어찼다. 방어구가 없는 탓에 그때마다 체력이 듬뿍듬뿍 깎였다.
결국 기존에 알고 있던 정보에 발목이 잡혀서 죽은 셈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만 했는데 무심코 옛날처럼 진행한 내가 병신이지.
"다음에는 영혼함을 조금 더 깊숙이 묻자."
바닥의 영혼함을 감자 캐듯이 꺼낸다. 그걸 품에 넣고 다시 고블린 주술사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문제라면 앞서 죽였던 고블린들이 리스폰했다는 것이다.
신중하게. 신중하게.
그 말을 더듬으며 하나씩 정리해나갔다.
[레벨이 1 상승합니다.]
[전 능력치가 1 상승합니다.]
공동의 앞에 다다를 때는 드디어 레벨이 올랐다.
포인트는 근력 올인이다.
"아직 살아있나?"
다시 공동으로 들어가자 샘슨의 조롱이 고막에 박힌다. 애써 무시하고 다시 보스전에 돌입했다.
광기의 주술. 그리고 달려드는 고블린 두 마리.
아까 전처럼 끝냈다.
대지의 토템이 솟아난 것도, 그걸 박살낸 것도 같았다.
"인…간. 건방진 인…간!"
여기서부터 달라진다.
고블린 주술사는 찌르기가 아니라 곧바로 돌진공격을 해 왔다.
콰과과과!
감히 맞설 수 없어 물러났다.
상대의 돌진속도가 빨라질 때는 옆으로 구르기를 사용했다.
"케…헤엑! 케헤엑!"
무식한 돌진은 무려 1분이나 이어졌다.
숨을 헐떡이는 고블린 주술사에게 달려갔다. 구르기로 거리를 벌렸던 탓에 거리를 좁힐 때는 고블린 주술사가 회복을 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저 움직임은 앞서 봤던 동작이다. 창처럼 찌르는 모션 직전에 공격적으로 구르기를 사용해 파고든다.
[스피어마스터의 소울을 사용합니다.]
동시에 스킬을 사용했다.
앞선 죽음의 이유 중의 하나가 써야 할 때 스킬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푸욱!
"끄아아아악!"
방어력을 무시하는 검이 배를 찌르자 고블린 주술사는 괴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놈의 체력은 아직 절반이나 남았다.
다시 그 무식한 돌진기를 쓰기 전에 연타를 날렸다.
촤하아아악!
"끼아아아악!"
놈의 체력은 완전히 증발했다.
하지만 보스전은 끝나지 않았다. 변수가 발생했다. 혹시 게임에서 생긴 오류인가.
세 번째, 네 번째 검을 휘둘렀지만 고블린 주술사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아무런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쾅! 쾅! 쾅!
"너. 건방지…다. 건방져!"
모든 데미지를 무시하고 고블린 주술사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온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몸에는 갖은 모양의 형광색 문양이 새겨졌다.
텅 비어 있던 체력이 차오른다. 고블린치고도 유독 앙상했던 놈의 몸뚱이가 커지기 시작했다.
중학생 정도의 체격까지 커졌는데 풍선에 바람을 넣는 것처럼 근육이 차오른다.
지금이 마지막 페이즈라는 것에 내 모든 것을 걸 수 있다.
[죽어라. 인간. 나 위대한 신을 품었다!]
"강림이구나."
난이도 실화인가.
저렙 구간의 보스가 신을 강림시킨다고?
[죽어라아아아!]
고블린 주술사는 증오와 살기를 토한다. 양손으로 쥐던 지팡이도 끝을 한 손으로 쥐고 마음껏 휘둘렀다.
후우우우웅!
한번 휘두를 때마다 공동 전체에 바람이 인다. 필시 일반 공격일 테지만 위압감은 스킬에 필적한다.
사정거리도 늘어났기에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물러날 뿐이다.
"아직까지 공격패턴은 단순한데."
그냥 휘두르며 다가올 뿐이다. 튕겨내기를 쓰지 않아도 빈틈을 노릴 수 있어 보인다.
만약을 위해 시야를 가려 볼까?
인벤토리에서 연막의 구슬을 꺼내 여기저기에 던졌다.
후우우우웅!
[어디…에 있나!]
피어오르는 연막에서 고블린 주술사는 나를 찾지 못했다. 마주잡이로 휘두르는 지팡이가 그 증거다.
연막이 짙은 곳으로 몸을 숨긴다.
연막으로 인해 은신 효과가 적용되어 놈은 찾기가 더 힘을 터.
연막이 다 사라지기 전에 뒤로 다가간 등을 찔렀다.
푸욱!
[키헤에엑!]
고블린 주술사가 무릎을 꿇었다. 기습으로 인해 추가 데미지가 들어갔을 테지만, 놈의 체력은 아직 절반이 넘게 남아있다.
강림으로 모든 능력치가 올라간 것이다.
스피어마스터의 소울이 쿨타임이 아니었다면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었을 텐데.
공격을 멈출 수 없다. 훤히 드러난 놈의 등을 한 번 더 베었다.
[키하아아아악!]
"제기랄!"
고블린 주술사의 고함에 몸이 뒤로 밀려났다. 체력도 10%나 깎여서 얼른 붕대를 감고 지구력포션도 복용했다.
단 한 번의 공격이면 보스전은 끝이다.
콰과과과!
[키하아아아악!]
하필 고블린 주술사가 돌진공격을 쓰기 시작했다. 최소 1분 정도를 쓸 것이니 침착하게 거리를 벌렸다.
문제라면 더 빨라진 속도 때문에 구르기에 모든 것을 걸어야만 했을 정도다.
[키헥…엑…….]
고블린 주술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헐떡인다.
저걸 놓칠 수 없었다. 지쳐서 헐떡이는 놈의 등판에 달려가 검을 꽂았다.
푸욱!
[신…이 나를 떠나다니……!]
드디어 체력이 다 떨어진 고블린 주술사가 지팡이를 떨어트림과 함께 숨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