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Chapter 51. 진실 (1)
이틀이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토요일 아침, 민호를 비롯한 모든 일행은 카페 브란델에 모였다. 미옥이 만들어준 커피를 홀짝이며 평소처럼 담소를 나눴지만, 카페 안을 맴도는 묘한 분위기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준비는 다 됐나?”
“예, 주변 일대에 포위망을 구축해뒀습니다.”
“대사관의 협력도 얻어놨으니, 빠져나갈 틈은 없을 겁니다.”
영국의 토벌자들이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중.
누군가가 민호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민호야.”
미래였다.
어젯밤 잠을 설친 탓일까? 미래의 얼굴은 유독 퀭해보였다.
“민하영은 좀 어때?”
그녀는 하영의 안부를 물었다.
이틀 전, 강태진과의 싸움에서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진 하영. 게다가 인연이 닿아서 혹시 모를 후환까지 전부 제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영은 꼬박 하루 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불과 반나절 전,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요. 기억은 잘 못하는 것 같지만······.”
“다행이야. 약효가 제대로 들었나보네.”
미래가 씨익 웃었다.
하영은 대부분의 기억을 잃었다.
미래가 가진 보물을 사용해서 신의 대리인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지웠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생길지도 모를 후유증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민호도 고민 끝에 동의했던 것이었다.
“문제는 하영이가 아니라 그 주변이지만요.”
민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래는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어쩔 수 없지. 다 본인들이 쌓은 업보니까.”
민호의 노력으로 하영은 모든 업보를 벗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녀의 주변에서 악행에 가담했던 이들까지 구원받은 건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로 그녀의 양모인 한유선이 있었다.
“업보라는 게 무섭긴 하네요. 딱 하루 지났을 뿐인데 그렇게 될 줄은······.”
한유선은 어제 교통사고를 당했다.
꽤 큰 사고였다. 중앙선을 넘은 트럭에 그대로 짓밟혔으니까. 목숨을 잃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민호가 씁쓸한 표정을 짓자, 미래가 혀를 낮게 찼다.
“이래서 사람은 죄를 지으면 안 돼. 언젠간 다 죗값을 치르거든.”
“진짜 그런 것 같아요.”
민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자자, 잠깐만 주목 좀 해줘.”
주방에서 나온 미옥이 돌연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짧게 헛기침을 내뱉은 그녀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이 중요한 날이라는 건 나도 알아. 한국에 있는 마인 집단을 일망타진할 수도 있는 기회니까. 그래, 다 좋은데 딱 하나만 당부할게.”
미옥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 알겠니?”
다소 김빠지는 말이 흘러나오자 민호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미래는 비슷한 말을 많이 들어봤는지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대꾸했다.
“아휴, 대체 몇 번을 말하는 거예요?”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해. 여기서 뭐 부서지기라도 하면 보험 처리도 안 된단 말이야.”
미옥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투덜거렸다.
그때 하이드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걱정 말게. 이 카페에는 흠집 하나 내지 않을 테니까.”
“솔직히 말하면 당신이 제일 걱정이야. 그리고 너도.”
“에이, 제가 뭘······.”
미래는 미옥의 말을 농담으로 넘기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농담이 아닌 모양이었다. 미옥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켜자 미래는 입을 꾹 다물며 딴청을 피웠다.
“사부.”
그러던 중 혜진이 미래를 불렀다.
그녀는 졸린 눈을 비비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언제쯤 온다고 했죠?”
“어······.”
미래의 표정이 일순간 멍해졌다.
잠시 후, 그녀는 머쓱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거기까진 못 들었는데······.”
“네?”
‘그럼 설마 오늘 하루 종일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 거야?!’
그때 메리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은 얼마 가지 않아 불식됐다. 소파에 줄지어 앉아있던 토벌자들이 돌연 어깨를 움찔거렸던 탓이었다. 뒤이어 이안의 얼굴 역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긴장한 기색으로 하이드를 올려다봤다.
“······스승님.”
달그락-
그 말에 하이드가 커피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도착한 것 같구나.”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출입문으로 향했다.
곧이어 보이는 검은 그림자. 민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카페 문이 열렸다.
딸랑-
작은 종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일 먼저 보인 건 두 남녀. 후드티를 뒤집어 쓴 여성과 정장을 입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 중에서도 낯이 익은 이는 단연 후드티를 입은 여성이었다.
“윽! 차미래.”
미래와 눈이 마주친 효진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표정이었다. 미래의 얼굴 또한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효진. 그리고······.”
미래의 시선이 천천히 남성에게 가 닿았다.
이어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신창우.”
미래의 중얼거림에 민호는 남자가 어떤 이인지 알아차렸다. 그는 일전에 미래가 보여준 변절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이였으니까.
한편 창우는 효진과 달리 크게 동요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안경을 고쳐 쓴 뒤,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걸뿐이었다.
“차미래. 오랜만에 보는군.”
“말 걸지 마. 귀가 썩을 거 같으니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미래는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고, 창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이번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 형사는 잘 지냈나?”
변절자 리스트에 따르면 창우는 전직 관찰자 대장이었다.
그럼 진하와 분명 안면이 있는 사이일 터다. 그게 아니면 친한 사이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 어떤 사이였던 간에, 이제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모양이었다.
진하의 반응이 거기에 대한 증거였다.
“최근에 꽤 힘든 일을 겪은 것 같은데······.”
“당신 걱정을 받을 정도로 힘들진 않았으니 신경 꺼.”
미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
창우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보며 누군가에게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환영받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이해해.”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민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담담하면서도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소녀의 음성. 그리고 이를 기억하는 건 민호 뿐만이 아니었다.
벌떡-
“류화연!”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십대 후반의 소녀.
류화연의 등장에 카페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영국의 토벌자들은 당장이라도 무기를 뽑아들 것처럼 흉흉한 표정을 지었고, 하이드 역시 눈을 매섭게 빛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의외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래가 조건 하나를 내걸었기 때문이었다.
제압하기 전에, 대체 무슨 이야기를 지껄이는지 한 번 들어보자고.
그렇기에 토벌자들은 그저 흉흉한 기세만을 뿜어댈 뿐, 섣불리 행동을 하진 않았다.
또각또각-
그때 류화연이 걸어왔다.
이윽고 미래의 맞은편에 당도한 그녀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적진 한 복판임에도 불구하고 류화연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은 없었다.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래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러던 중 류화연은 뭔가를 찾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됐다. 바로 미옥이 있는 곳이었다.
“어, 어어?”
갑작스런 시선에 미옥은 다소 당황했다.
동시에 류화연이 입을 열었다.
“아메리카노 하나.”
“카푸치노.”
“난 라떼. 시럽 많이 넣어서.”
뒤이어 창우와 효진도 말을 덧붙였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주문을 하는 모습에 미래는 멍한 얼굴로 셋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신을 차린 미래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빽 소리를 질렀다.
“흥, 마인 따위한테 줄 커피는 없어! 그쵸? 미옥 아줌······. 아줌마?”
미래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맺혔다.
미옥이 앞치마를 매고 있었던 탓이었다.
“커피 정도야 타줄 수 있지.”
“아줌마!”
“이야기가 길어질 것처럼 보이니까. 대신 돈은 받을 거야.”
미옥이 눈을 가늘게 좁힌 채 말했다.
이어 주방으로 향하려던 중, 뭔가가 생각났는지 다시 몸을 돌렸다.
“아, 그리고 싸우려면 꼭 나가서······.”
“알겠어요! 나가서 싸울게요!”
미옥은 미래의 대답에 만족한 듯 주방으로 사라졌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원두 볶는 냄새가 카페 안을 가득 메웠다. 평소였다면 마음이 편안해졌을 냄새였지만 지금은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민호는 조금씩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긴장에 온 몸이 짓눌린 탓이었다. 아무나 먼저 이야기를 시작해줬으면 하고 생각하던 그때, 굳게 입을 닫고 있던 미래가 말을 걸었다.
“······넌 대체 뭐지?”
짧은 질문이었지만 모든 게 담긴 질문이기도 했다.
또 이 자리에 있는 동료들의 의문을 대변한 질문이기도 했고.
“강태진은 왜 방해한 거야? 그리고 이번에는 또 왜······.”
미래의 입술을 비집고 연달아 질문이 이어졌다. 정리되지 않은 질문투성이였다. 류화연은 그저 묵묵히 이를 듣고만 있었다. 잠시 후, 수많은 질문을 내뱉은 미래가 입을 닫자, 비로소 류화연의 입이 열렸다.
“모든 질문에 대답해줄 순 없어.”
“그럼 이걸로 대답하게 만들 수밖에.”
쾅-!
미래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감정을 담아 세게 내리친 탓일까? 금이 조금 간 것 같았지만 자리에 있던 이들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전에 우선 내 이야기를 들어줘. 난 이야기를 하러 온 거니까.”
“어떤 이야기?”
“긴 이야기가 될 거야. 그간 정말 많은 꿈을 꿨거든.”
류화연의 얼굴에 아련한 감정이 떠올랐다.
오랜 추억을 회상하듯, 그리우면서도 애절한 표정에 일행은 모두 숨을 죽였다.
다만 미래는 예외였다.
“짧게 요약해. 마인 따위한테 허비할 시간 없어.”
미래가 으름장을 놨다.
이에 류화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는 뜻이었다.
“그럼 짧게 말할게. 나는 모두였어.”
“뭐?”
“네 말대로 요약한 거야. 난 너희 모두였다고.”
“후우, 그냥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그럼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아씨, 그냥 쉽게 얘기해! 짜증나게 하지 말고.”
미래가 열 받은 얼굴로 소리쳤다. 류화연은 피식 웃었고, 그 행동은 미래를 더욱 열 받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타이밍 좋게 커피가 나왔다.
“침을 안 뱉었으니까 안심하고 먹고. 가격은 5만원이야.”
“······커피 값 치고는 비싸군.”
“마인 프리미엄이 붙었거든.”
미옥과 창우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던 무렵.
류화연은 조심스럽게 커피를 입에 가져다댔다. 그저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일행은 그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전히 맛있네. 이걸 마시고 싶었어.”
류화연이 싱긋 웃었다.
이어 그녀는 모든 일행을 둘러봤다.
“세상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전생이 있음을 알고 있어. 그렇지?”
“그래. 네가 가진 능력 중에서 스스로의 전생을 보는 게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지.”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설명이 쉽겠네.”
다시 커피를 홀짝인 그녀가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나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