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Chapter 49. D-DAY (1)
다음날 아침.
산 너머로 해가 배꼼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풍경을 보며 민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눈 아래로 다크써클이 턱까지 내려왔다.
“······한숨도 못 잤네.”
오늘 있을 일에 대한 걱정으로 민호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사실 그보다 고생을 한 건 이안을 포함한 영국에서 온 지원군들이었지만 말이다.
“아직까진 아무 일도 없는 거 같아서 다행이지만······.”
일곱 명의 토벌자.
그들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내내 각자 맡은 대상을 감시했다. 그리고 한 시간 단위로 보고를 이어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재까지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하영의 양모, 한유선은 상식을 뛰어넘는 이였고 강태진은 상식을 부수는 이였으니.
그래서 민호는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 뭔가 결심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되겠어. 지금이라도 나가봐야······.”
약속 시간까진 아직 한참 남았다.
그래도 그때까지 기다리진 못할 거 같았다. 당장 하영을 만나서 오늘 내내 그녀와 함께 있어야만 불안한 마음이 좀 수그러들 것처럼 보였다.
민호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소환비서를 주머니에 넣었다. 뒤이어 소원을 들어주는 양초를 품속에 챙긴 뒤, 곧장 신발을 신으려던 그때.
딩동-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어보니 눈앞엔 의외의 인물이 서있었다.
“어, 엄마?”
바로 새천사 보육원의 원장인 혜란.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방문에 민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아침 일찍······.”
“이거 전해주려고 왔지.”
혜란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원래는 어제 챙겨주려고 했는데 깜박 잊어버렸지 뭐니. 그래서 생각난 김에 바로 왔단다.”
각종 반찬과 채소들이 가득한 봉지.
아마 혼자 사는 민호가 걱정되어 가져온 것이리라.
이를 본 민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당장이라도 하영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아침부터 찾아온 혜란을 모른척할 순 없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커피라도 대접할게요.”
“호호, 그럼 잠깐 실례할게.”
혜란이 안으로 들어오자, 민호는 바닥에 놓인 보따리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집어넣던 도중.
“난 또 지저분하게 살고 있을 줄 알았더니······.”
방 안을 둘러보던 혜란이 놀란 듯이 중얼거렸다.
“의외로 깔끔하게 해놓고 사는구나.”
“그럼요. 가뜩이나 좁은데 어질러놓으면 발 디딜 틈도 없을 걸요?”
민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여기 앉으시면 돼요. 금방 커피 내올게요.”
마음 같아선 푹신한 방석을 준비하고 싶었지만 민호의 방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민호는 담요를 바닥에 깐 뒤, 혜란을 그곳에 앉도록 했다.
이어 전기포트를 켜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던 중, 혜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의외네.”
“네?”
“우리 민호가 강아지를 키울 줄이야. 어렸을 땐 동물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니?”
“아하하, 그게 사정이 좀 있어서······.”
민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 전기포트의 스위치가 달깍거렸다.
“설탕은 안 넣으시죠?”
“응, 고맙다. 잘 마실게.”
혜란이 커피를 홀짝거렸다. 민호도 설탕이 듬뿍 들어간 커피를 입 안에 머금었다.
따뜻한 커피가 뱃속에 들어가자 불안하고 초조했던 마음이 다소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민호의 눈에 뭔가가 보였다.
“어?”
혜란의 손 옆에 놓인 휴대폰.
못 보던 휴대폰이었다. 이에 민호는 혜란을 바라보며 물었다.
“휴대폰 바꾸셨어요?”
“으응. 베드로 신부님이 바꿔주셨지 뭐니.”
혜란이 어색한 듯 웃었다.
“나는 전화만 되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신부님이 이게 있으면 인생이 백배는 즐거워질 거라고 말씀하셔서 말이야.”
그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할 법도 했다.
베드로 신부를 떠올린 민호가 피식 웃을 무렵.
혜란이 뭔가 생각난 듯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아, 맞아. 그러고 보니 보여줄게 있단다.”
“네? 보여줄 거요?”
“응. 너 어렸을 때 찍었던 사진들, 신부님이 이 안에 넣어주셨거든.”
그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운 장난감을 받은 걸 자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귀여운 모습에 민호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혜란이 더듬더듬 휴대폰을 조작해, 민호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찾았다. 이때 기억나니?”
화면에 떠오른 건 한 장의 사진.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심통 맞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이었다.
“윽, 이렇게 다시 보니 좀 부끄러운데요.”
민호가 쑥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게, 사진 속 소년은 다름 아닌 민호의 어린 시절이었으니까.
“후후, 그럴 만도 하지. 한창 반항기였기도 했고, 사고도 많이 쳤잖아.”
“맞아요. 벌로 혼자 성당 청소했던 것도 기억나요.”
“그랬지. 그때 하영이가 참 귀여웠는데.”
“네? 하영이요?”
갑자기 하영의 이름이 나오자 민호는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응. 너 혼자 성당 청소 하는 거 힘들어 보인다고, 도와줘도 되냐고 물어봤었어. 평소엔 말수도 없던 애가 그러니까 어찌나 귀엽고 마음씨가 예뻐 보이던지······.”
그 사실은 처음 알았다.
민호는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하영이한테 도움을 받은 기억은 없는데요.”
“호호, 그렇겠지. 내가 도와주지 말라고 했으니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두 모자(母子)는 사진을 넘겨보며 추억에 잠겼다. 계속해서 사진을 넘기던 도중, 혜란의 손이 어느 한 장의 사진에서 멈췄다.
“아, 이 무렵쯤이······.”
“하영이가 입양 가던 날이네요.”
민호가 담담한 목소리로 혜란의 말을 받아 이었다.
그 날에 대해서는 민호도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기쁜 날임과 동시에 조금 쓸쓸한 날이었으니까.
“그때 하영이, 엄청 울었었지.”
“전날까진 괜찮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괜찮은 척 했던 것 같기도 해요.”
“맞아. 예나 지금이나 속이 깊은 아이였으니까.”
혜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진 속의 하영은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문득 민호의 뇌리를 스쳐 지나는 풍경이 있었다.
“······아.”
잠시 후, 민호의 눈이 조금 커다랗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하영이 입양 가던 날.
마지막 사진까지 전부 찍은 뒤, 차에 올라타기 직전.
하영은 대뜸 민호의 품에 안겨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흑! 오빠. 나, 나 여기서 떠나도 잊지 않을 거지? 기억해 줄 거지?’
하영의 얼굴은 어딘가 간절해보였다.
새로운 가족이 생겼으니, 이제 그 가족이랑 잘 지내면 될 일이다. 보육원 정도는 잠깐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하면 될 텐데 하영은 그 인연을 끝까지 부여잡았다.
‘······하영아.’
민호는 새천사 보육원의 터줏대감 같은 존재였다.
입양을 간 적도 없고, 입양 신청이 들어온 적도 없다. 그렇기에 민호는 보육원에서 오래 살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많이 봐왔다. 그때마다 민호는 평소와는 달리, 입양 가는 아이들을 매몰차게 대했다.
그들이 이곳을 잊고, 새로운 장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힘들었던 기억을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조차도 오늘만큼은 매몰차게 말할 수 없었다.
‘오, 오빠랑 또 엄마랑 다른 애들 모두 내가 처음 만든 가족이란 말이야. 흐윽! 근데 이제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싫어. 싫다구······.’
입양 당일. 하영이 보여준 모습은 그가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평소의 하영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기도 했다.
그래서 민호는 망설였다. 망설임은 틈을 불러왔고, 결국 틈이 크게 벌어지면서 민호가 애써 다잡았던 각오도 무너져 내렸다.
‘당연하지. 내 동생을 어떻게 잊을까.’
‘저, 정말?’
‘그럼. 우린 가족이잖아.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절대 잊지 않아.’
민호는 하영을 매몰차게 대할 수 없었다.
오히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가족이라는 말을 하면서까지.
‘또 누가 우리 하영이 괴롭히면 내가 혼내주러 갈게. 그러니 울지 마. 뚝!’
한참동안 등을 토닥이자, 하영은 비로소 울음을 그쳤다.
그녀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방긋 웃었다.
‘응, 응응. 알겠어. 오빠 말 들을게.’
‘그래. 착하다, 우리 하영이.’
그 모습과 마주하며 민호도 씨익 웃었다.
회상을 마무리하면서 민호는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제 하영과 약속을 잡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가 이렇게 진지했던 적은 입양 날 이후로 처음이라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영과 함께 있으면서 진지한 모습을 보여준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맞아. 그때였구나.”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린 민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때 혜란의 말이 그의 귓가를 울렸다.
“이때 사진을 엄청 찍었었지.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것 같아.”
사진을 넘기는 혜란의 손가락이 점점 빨라졌다.
전부 비슷한 사진들이었던 탓이었다.
회상을 멈춘 민호도 별 대수롭지 않게 이를 쳐다봤다.
그런데 그 순간!
멈칫-
돌연 민호의 움직임이 멈췄다.
1, 2초 정도나 됐을까?
스쳐지나가던 어떤 사진 하나를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이 굳었다.
“······어?”
있어야하지 말아야할 존재를 발견했을 때나 지을 법한 표정.
마치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앗, 이때는 네 생일파티 하던 날이었구나. 하영이가 없어서 어찌나 시무룩했었는지······.”
한편 혜란은 그런 민호의 반응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다른 사진을 바라보며 추억에 잠겼다. 이에 민호는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애써 내며 혜란을 불렀다.
“어, 엄마.”
“응?”
“잠깐, 잠깐만요. 이전 사진 좀 볼 수 있을까요?”
“호호. 내 정신 좀 봐. 너무 빨리 넘겼었지?”
어색하게 웃은 혜란이 사진을 뒤로 넘겼다. 사진이 한 장씩 되돌아갈 때마다 민호의 심장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예의 ‘그 사진’이 다시 화면 안을 가득 메웠다.
“······!”
민호의 눈이 단번에 휘둥그레 떠졌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주먹을 꽉 말아 쥔 민호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 이, 이게 대체······.”
“민호야?”
당황한 민호를 보며 혜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민호는 그녀의 의문에 대꾸해줄 여유가 없었다. 그의 시선은 사진 속에 고정되어 있었다.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영.
그녀의 뒤에 한유선과 하영의 양부(養父)가 있었다. 그리고 유선의 옆에는 이십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서있었다.
정장을 입은 남자.
그를 보며 민호는 이를 으득 씹었다.
“강태진!”
지금과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지만 강태진이 확실했다.
민호가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자, 혜란이 다시 질문을 해왔다.
“왜 그래? 이 사진이 어때서?”
“······엄마. 혹시 이 남자. 이 사람 누구였는지 기억하세요?”
“으응? 응, 기억나지.”
갑작스런 민호의 질문에 혜란은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입양 관련해서 함께 왔던 변호사 양반이었어. 한유선 씨랑 지인이라고 했었나?”
혜란의 말에 민호는 사진 속의 남자가 강태진임을 다시 한 번 확신했다.
그때 혜란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그때 이상한 말을 했었지, 아마?”
“이상한 말이요?”
“응. 고맙다고 했던 것 같아. 하영이를 이렇게 잘 키워줘서 고맙다고. 이상하지 않니? 양부모도 아니고 왜 변호사가 그런 말을 했었는지······.”
혜란은 황당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민호는 조금도 웃지 못했다.
어제 동료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와 종합해보면, 강태진은 그의 목적을 실행시키기 위해서 하영의 입양 계획을 짠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러던 그때였다.
우우웅-
테이블 위에 올려둔 민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미래에게서 걸려온 전화.
민호는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첫 마디는 민호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 만한 것이었다.
-민호야! 큰일 났어!
“네? 큰일이라면 어떤······?”
-영국 애들 두 명이 경찰에 잡혀갔어.
“경찰에요?”
뜬금없는 말에 민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아무래도 강태진이 뭔가 수작을 부린 거 같아. 그리고······.
잠깐 말을 흐린 미래.
그녀는 어둡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두 명, 민하영을 감시하던 애들이었어.
“······!”
-미안해, 내 실책이야. 방심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참담한 음성과 함께, 민호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걸 느꼈다.
하영을 감시하던 이들이 강태진의 계략으로 경찰에 체포됐다면 지금 하영의 위치는 아무도 모른다는 소리였으니까.
-일단 민하영을 찾는 게 급선무야. 계속 연락 해보고, 지금부턴 나랑 같이 움직이자.
“······예, 알겠습니다. 네.”
민호는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전화를 끊었다.
아침부터 그를 괴롭혔던 불안이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왔다.
벌떡-
초조한 표정을 짓던 민호는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혜란을 돌아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엄마, 죄송하지만 저······.”
“다녀오렴.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몸조심하고.”
그때 혜란이 방긋 웃었다.
“네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에 있을 테니까. ”
그 한 마디를 듣자 놀랍게도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민호는 양 손으로 뺨을 가볍게 두드린 뒤,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민호는 곧장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