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Chapter 48. 그의 목적 (3)
-그래서 말인데, 다음 사냥감은 누구야?
-그렇게 많이 먹였는데도 아직 부족하십니까?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잖아. 서지수나 이미희도 유명한 피아니스트이긴 하지만 그래봤자 우물 안 클래스지. 이제 슬슬 월드클래스를 노릴 때도 됐지 않았나?
-후후, 안 그래도 그런 말씀 하실 거 같아서 제가 리스트를 뽑아봤습니다.
-어머. 정말? 역시 우리 자기가 준비성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한유선이 간드러지게 웃었다.
이어 강태진은 가방에 손을 넣어 준비해뒀던 서류 하나를 꺼냈다. 거리가 거리인지라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사람들의 사진과 설명이 적힌 서류처럼 보였다.
한편 서류를 받아든 한유선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세상에. 여, 여기 있는 사람들 재능도 전부 빼앗을 수 있는 거야?
-그럼요. 물론 누님이랑 하영이가 협조를 잘 해줘야겠지만······.
-당연히 협력하지! 무릎이라도 꿇으라면 꿇어야지. 이 정도 재능을 흡수할 수만 있다면 분명 하영이도······.
한유선의 낯빛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영상이 끝났다.
“······진하야.”
곧이어 이번에도 미래의 입이 열렸다.
그녀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응? 아니라고 해줘. 빨리.”
미래의 반응에 진하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나도 비슷한 생각이 들어서 찾아봤다.”
그가 휴대폰을 몇 번 두드렸다. 그러자 미리 저장해둔 인터넷 기사 두 개가 떠올랐다.
-유명 피아니스트 S모양, 자택에서 돌연사
-떠오르는 신성이 지다. 이미희 피아니스트,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숨져.
젊은 두 피아니스트의 부고 소식.
진하는 기사를 미래의 눈앞에 들이민 채, 암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예상한 대로다.”
쿠당탕-!
“강태진, 이 미친 새끼가 진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미래가 고함을 질렀다.
그 낯선 모습에 혜진은 물론이고 미옥과 민호도 깜짝 놀랐다. 반면 진하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흥분이 진정되자 미래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귀물들이 있다.
숫자만큼이나 귀물의 능력은 천차만별인데, 그 중에선 애들 장난처럼 보이는 귀물도, 절대 사용해선 안 되는 끔찍한 능력을 가진 귀물도 존재한다. 어떤 귀물은 사용한 흔적만 발견돼도 협회 본부에서 즉각 토벌 임무가 생성되기도 한다.
그리고 강태진이 이번에 사용한 귀물은 후자에 속했다.
그것도 대규모 토벌 임무가 내려와도 이상하지 않을, 끔찍한 귀물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상대가 가진 기적이나 재능을 빼앗는 거야.”
미래가 다소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단순히 효능만 보면 사악하거나 비겁해 보일 순 있어도 끔찍할 정도까진 아니다. 그러나 이어진 미래의 말에 민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문제는 이 귀물의 발동 조건이야. 기적이나 재능을 빼앗기 위해선 상대의 목숨을 빼앗아야하거든.”
“······!?”
미옥과 혜진이 두 눈을 부릅떴다.
동시에 미래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빼앗은 재능은 동그란 약으로 변해. 그리고 약을 복용할 경우, 원래 주인이 가진 재능의 일부를 흡수할 수 있지. 대신 부작용도 있어. 원래 주인을 죽이면서 얻은 악덕과 그의 원념까지 함께 이어받게 된다는 거야.”
몸의 일부, 하나하나에 각자 다른 악덕이 쌓였다.
마치 악덕을 이식받은 것처럼.
그리고 강태진이 가진 지병. 그의 목적.
마지막으로 미래의 설명까지.
이를 끝으로 최후의 퍼즐조각이 맞춰졌다.
“그럼 마지막 영상을 보자.”
미래의 손가락이 세 번째 녹화영상의 재생버튼을 터치했다.
정겹게 대화를 나누던 한유선과 강태진. 둘은 어느새 다시 찰싹 달라붙어 앉아 있었다. 한유선은 강태진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은 채,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참 운이 좋은 여자인 거 같아.
-왜요?
-자기를 만났잖아? 자기는 내게 있어 행운의 신이야. 초능력 같은 것도 쓰고, 또 이렇게 내 꿈도 이뤄주고. 아무튼 아주 복덩이야, 복덩이.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님.
-응?
-이번 건에 관련돼서 말인데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든 말해봐. 다 들어줄 테니까.
부탁이라는 말에 한유선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강태진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이번 건은 난이도가 좀 높거든요.
-어머? 웬일이야. 자기가 약한 소리를 할 줄은 몰랐는데?
-누님도 아시겠지만 이번 사냥감이 보통은 아니니까요.
-하긴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무려 월드 클래스의 재능을 사냥하는 거니까.
-그래서 말인데 하영이를 이틀 정도만 빌려도 될까요?
-하영이를?
-네, 사전에 작업해둬야 하는 게 있어서요. 물론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에이, 그 정도야 상관없지. 우리 사이가 남도 아니고.
강태진이 본격적으로 하영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에 민호는 초조한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당장 하영을 만나러 가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하나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응? 뭔데?
-이건 누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인데······.
강태진의 목소리가 순간 일그러졌다. 잠시 후, 영상은 핏-하고 꺼졌다.
미래는 황당한 얼굴로 진하를 돌아봤다.
“뭐야? 왜 여기서 끊겨?”
“배터리가 다 됐었거든.”
진하가 어깨를 으쓱였다.
미래의 얼굴이 점점 검게 물들자, 진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뒷말은 듣고 왔으니 걱정마라.”
“뭐라고 했는데?”
“공권력을 움직이고 싶다고 했다. 한유선의 시댁 쪽 입김이 여간 센 게 아닌가봐.”
실제로 민호가 알기로도 엄청 셌다.
듣기로는 집안 대대로 여당 국회의원을 계속해서 지냈다고 했던가? 그 정도라면 공권력 정도야 쉽게 움직일 수 있으리라.
“이걸로 확실해졌네.”
짝짝-
그때 미래가 손뼉을 치며 일행의 시선을 한 곳에 모았다.
“강태진의 목적은 민하영의 몸을 차지하기 위한 거라고 봐도 무방하겠어. 수단의 미친 늙은이가 썼던 방법을 사용해서.”
모든 퍼즐조각이 하나로 맞춰졌다.
동시에 강태진의 추악한 목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일행이 할 행동은 하나뿐이었다.
“우선 민하영을 확보해야 돼. 어떤 방법을 써도 상관없이, 최우선적으로.”
강태진의 목적을 방해하는 것.
그것이 지금 일행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럼 류화연에 대한 건은 어떻게 되는 거니?”
그때 미옥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강태진이 민하영을 지키고자 하는 이유는 이걸로 확실히 알게 됐다. 반면 류화연이 민하영을 없애려고 하는 이유는 아직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런 미옥의 의문에 미래는 즉각 입을 열어 대답했다.
“이건 제 생각인데요. 아마 류화연이 민하영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도 이런 걸 예상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또 강태진이랑 서로 사이가 나빠 보이기도 했고.”
미래의 추측은 나름 일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미옥은 금세 입을 닫았다. 미심쩍은 부분이 조금 있었지만 괜한 말을 해서 앞으로의 행동방침을 흐리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러던 그때였다.
우우웅-
별안간 테이블이 가늘게 떨렸다. 민호의 휴대폰에서 울린 진동이었다.
전화가 온 것이었는데, 발신인은 방금까지 이야기의 주체였던 하영이었다. 이에 민호는 어떻게 하느냐는 듯 미래를 쳐다봤다.
“받아봐. 우린 입 다물고 있을게.”
미래의 대답에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스피커폰으로 전환한 뒤, 하영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빠.
“응, 하영아.”
민호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건너편에서 하영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어? 무슨 일 있어요? 목소리가 잠긴 것 같은데······.
“아냐,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우음, 그럼 다행이지만요.
하영은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고는 이내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 그보다 저 내일 약속 나갈 수 있을 거 같아요.
“정말?”
-네. 내일 약속이 다음 주 화요일로 미뤄졌거든요.
강태진과의 약속이 화요일로 변했다?
그 말에 민호는 재빠르게 임무창을 띄웠다. 마감시간에 변동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마감시간에 변화는 없었다.
이를 보던 민호의 눈빛이 떨리던 그때, 하영이 웃음기가 깃든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헤헤, 잘 됐죠?
“······그러네. 잘됐다. 정말 다행이야.”
민호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곧이어 하영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내일 세 시까지 건대로 가면 되는 거죠?
원래 약속시간은 오후 3시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늦었다. 민호는 고개를 흔들며 대답을 정정했다.
“아니, 좀 더 일찍 보자.”
-네?
“아침에 볼 수 있으면 더 좋고. 이왕이면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어서.”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민호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미래를 비롯한 동료들과 충분히 상의를 해본 뒤에 결정할 일이었다.
한편, 민호의 대답을 들은 하영은 화들짝 놀란 듯이 되물었다.
-하, 하루 종일이요?!
“응. 그렇게 하고 싶어.”
민호가 굳은 결의를 담아 대답했다.
그러자 하영은 당황한 듯 말을 버벅거렸다.
-조, 조금만 더 생각해볼게요. 앗, 안 된다는 건 아니고 그러니까 긍정적으로······.
“그래. 응. 이따가 문자 줘.”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전화가 끝났다. 그런데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묘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민호가 묻자, 미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휘파람을 불었다.
“우리 민호, 의외로 상 남자였구나?”
“맞아요.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다니······.”
혜진도 말을 보탰다. 두 사제의 모습에 민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태진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 수작을 부리지 못할 테니까요.”
“알아, 알아. 농담한 거야.”
민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래가 껄껄 웃었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도 도와줄 테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와줄 건데? 강태진과 맞서 싸우기라도 할 거냐?”
그러자 이번에는 진하가 질문을 던졌다.
이에 미래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호승심이 깃든 미소였다.
“당연하지. 내가 나서서 싸울 거야.”
미래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진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좀 위험하지 않을까?”
“뭐가?”
“너 말이야. 예전에 한 번 졌잖아.”
“방심해서 그런 거거든! 그리고 무승부였어! 안 졌다고!”
미래가 빽 소리를 질렀다. 어찌나 격분했는지 귀까지 새빨갛게 물든 채였다.
그러자 미옥이 우려 섞인 목소리를 냈다.
“무승부라고는 해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구나. 무려 8년을 준비해온 계획이잖니? 분명 어떤 수를 가지고 있을지 몰라.”
“끄응,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이번엔 방심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미옥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흐리던 그때.
현관문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시원스런 목소리.
뒤늦게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곧이어 민호의 머릿속으로 발랄한 여성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우리가 다시 왔으니까 말이야!’
밝은 갈색 머리를 가진 청년.
그리고 녹색 눈동자를 가진 아담한 체구의 여성.
둘의 등장에 민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이안? 그리고 메리까지?”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러분.”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일행을 돌아보며, 이안은 씨익 웃었다.
그때 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딸랑-
현관문이 열리고, 선선한 밤바람이 불었다.
뒤이어 들려오는 묵직한 발소리.
잠시 후, 일곱 명의 남녀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그 중에선 일전에 한국에 머물렀던 제임스도 있었다.
일행의 시선이 다시 이안에게로 향하던 무렵, 그가 입을 열었다.
“협회의 지원군과 함께 방금 막 도착했습니다.”
이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곱 명의 토벌자가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