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Chapter 48. 그의 목적 (1)
새하얀 달빛이 은은하게 내리쬐는 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웃고 떠들던 아이들은 모두 잠에 골아 떨어졌다.
뒷정리는 어른들의 몫이었다.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치웠다. 얼마 후, 마당이 깨끗해지자 수녀복장을 한 중년의 여성이 마실 것을 내왔다.
달그락-
유리컵 두 개가 남녀의 앞에 놓였다.
하나는 밀크 티, 다른 하나는 코코아가 담긴 컵이었다.
“오늘은 이렇게 와줘서 정말 고맙구나.”
혜란의 주름진 눈가에 웃음꽃이 피었다.
이에 민호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집에 오는 건데요, 뭘.”
“맞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민호의 곁에 있던 하영도 손을 내저었다.
그러더니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매주 왔었는데 요즘엔 뜸해서 죄송해요.”
“후후,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마음 두지 마렴.”
혜란이 방긋 웃었다.
잠시 후, 하영은 혜란과 아까 못 다한 수다를 마저 떨었다. 주로 유럽 등지에서 연주회를 다닌 때와 각 지역의 유명한 맛집에 대한 이야기였다.
흥미로운 얼굴로 연신 감탄을 터뜨리는 혜란과 미소를 띤 채 이야기에 열중한 하영.
그런 둘의 모습은 마치 모녀처럼 보였다.
그 광경을 보며 민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적에는 곧잘 본 광경이었는데, 이렇게 보니 새삼스레 정겨운 기분이 들었던 탓이었다.
이윽고 민호의 잔에 담긴 코코아가 거의 다 사라져갈 무렵.
혜란이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여기선 얼마나 더 머무는 거니?”
“우음, 여름 동안은 계속 있을 거 같아요.”
“잘됐다. 푹 쉬고 가면 좋겠네.”
“헤헤, 네. 시간되면 또 놀러올게요.”
하영이 배시시 웃었다.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민호와 하영은 보육원을 나섰다.
큼지막한 달이 떠오른 여름밤.
두 그림자가 비탈길을 걸어 내려왔다. 하영은 올챙이마냥 볼록 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아, 배부르다.”
“배부를 만도 하지. 먹은 양을 생각해보면······.”
“아이참. 그렇게 말하면 제가 많이 먹은 것 같잖아요?”
“실제로 그랬잖아. 혼자서 돼지 한 마리는 먹은 줄 알았네.”
“아, 아니거든요!”
멈출 줄 모르는 민호의 일침에 하영은 당황한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의외로 목소리가 컸던 탓일까? 민호는 하영의 반응이 재밌는 듯 피식거리며 웃었고, 하영은 볼을 크게 부풀린 채 민호를 흘겨봤다.
그로부터 약 십여 분 후.
차가 다니는 거리로 나오자 하영은 인근 버스정류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앗, 저는 여기면 돼요. 어머니가 데리러 오신다고 하셔서요.”
“그래?”
“네. 먼저 들어가세요.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
하영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을 흐렸다.
하지만 민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 가는 거 보고 갈게.”
“히히, 그럼 저야 좋죠.”
쑥스러운 듯이 웃는 하영.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서있어서 그런 걸까? 그녀의 얼굴이 묘하게 붉어보였다. 멋쩍게 웃는 하영을 바라보며, 민호는 굳게 닫았던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영아.”
“네?”
“내일 저녁에 시간 좀 내줄래?”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임무.
마감기간이 지날 때까지 하영과 함께 있는 것.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우선 하영을 설득해야만 했다. 한편 민호의 제안을 들은 하영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
“저 내일은······.”
알고 있다. 강태진과 약속이 있으리라.
그렇지만 민호도 그냥 물러서지만은 않았다.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중요한 말이요?”
“그래.”
민호는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 하영을 빤히 쳐다봤다.
“꼭 해야 하는 말이야. 내일이 아니면 안 되는 그런 말.”
진지한 표정만큼이나 진지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민호의 모습에 하영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텅 빈 도로에 차가 질주하는 소리만이 거리를 가득 물들였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알겠어요. 그럴게요.”
별안간 하영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너무도 쉽게 수락이 나오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민호였다.
“괜찮아? 내일 무슨 약속 있는 거 아니었어?”
“약속은 있지만 저한테 중요한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잠시 말을 흐리던 하영이 민호의 눈을 직시했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눈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오빠가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말하는 건 오랜만에 봐서요. 그래서 궁금해졌어요.”
“응?”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민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예전에도 오늘처럼 말했던 적이 있었나?”
“네. 저 입양 가던 날이요. 그 날도 오늘이랑 비슷했었거든요.”
확신에 찬 얼굴로 하영이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차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말은 할 수 없었기에 민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영은 잘됐다는 듯 미소를 띤 얼굴로 물었다.
“그럼 내일 몇 시쯤 만날까요?”
“여섯시, 아니 오후 세시에 보자.”
“그렇게 일찍이요?”
“응. 괜찮은 식당이 있는데 거기서 밥 좀 먹고 얘기하려고.”
민호가 대충 둘러댔다.
이에 하영은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겠어요. 그럼 내일 세시에 봬요.”
“그래. 내일 세시에 보자. 꼭.”
민호가 힘을 주어 말하던 그때.
끼이익-
새하얀 세단 한 대가 하영의 앞에 멈춰 섰다.
“미안해, 차가 좀 막혀서 늦었네.”
운전석에서 나온 이는 하영의 양모인 한유선. 그녀의 등장에 민호는 내키진 않았지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래도 하영의 어머니였기에.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하영아, 얼른 타. 아빠 기다리실라.”
그러나 유선은 민호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니, 아예 대놓고 민호를 무시했다. 그 광경에 하영은 민망해진 듯 황급히 민호를 돌아보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오빠, 오늘은 즐거웠어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네.”
하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부르릉-
잠시 후, 그녀를 태운 차가 빠르게 도로를 달렸다.
점이 되어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민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불과 반나절 전만 해도 인파로 가득했던 거리가 고요하게 변했다. 길을 오가던 사람들은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고, 가로등 불빛만이 거리를 밝혔다.
그러나 아직 불빛이 꺼지지 않은 곳도 있었다.
군자역 인근에 있는 카페 브란델처럼.
딸랑-
“아, 선배. 오셨습니까.”
문을 열고 들어서자 혜진이 민호를 반겼다. 미래도 손을 들어 올리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둘에 비해 미옥의 얼굴은 잔뜩 굳어있었다. 그녀답지 않은 모습에 민호는 긴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살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으음.”
가만히 있던 미옥이 말을 꺼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좋을까.”
테이블 위로 올라온 미옥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한참 동안 뜸만 들일 뿐, 섣불리 말이 나오지 않자 가만히 있던 미래가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고민해요?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해요.”
“미래야. 하지만 그건······.”
“선배님, 저는 괜찮습니다. 전부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그때 민호가 비장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이를 본 미옥은 이내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알겠다. 그 애, 하영이라고 했나?”
미옥의 입술을 비집고 하영의 이름이 들려오자, 민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조사 결과에 따라 향후의 행동방침이 달라진다.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민호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던 무렵, 미옥이 다시 말을 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아이는 사람이 아니야.”
“······예?”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민호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멍하게 물든 표정과 함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람이 아니라니······.”
“으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다는 말이 옳겠구나.”
미옥이 눈가를 살짝 좁힌 채로 중얼거렸다.
그때 민호는 뭔가 깨달은 듯 질문했다.
“혹시 마인이 되기 직전이라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으응, 아니야. 선인과 마인을 떠나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어. 이게 무슨 말이냐면······.”
재차 한숨을 내쉰 미옥이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조사를 끝마친 미옥이 앓아누웠던 것은 피곤해서이기도 했지만 상당한 쇼크를 받아서였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게 하영을 조사할 결과는 꽤나 충격적이었던 탓이었다.
“그 아이, 온 몸에 악덕이 쌓여 있었단다.”
“네? 하지만 상태창으로는······.”
“단순히 악덕을 쌓았다는 뜻이 아니야. 그러니까 몸의 일부 하나하나에 각자 다른 악덕이 쌓였다는 소리란다. 마치 악덕을 이식받은 것처럼 말이야.”
이어진 미옥의 말에 민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하영은 수치로만 따지면 어지간한 중급 마인 이상의 악덕을 쌓았다고 했다. 다만 그 악덕이 본인의 행동으로 인해 쌓은 것이 아니기에 성향에 변동이 없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에 민호는 일순간 현기증이 드는 걸 느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충격적인 이야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몸을 휘청거린 민호는 문득 미옥이 했던 말 중에서 의아한 점 하나를 떠올렸다.
“그, 그보다 악덕을 이식 받았다는 게 무슨 소리······.”
“누군가가 개수작을 부렸다는 뜻이야. 무슨 목적에서인지는 몰라도 말 그대로 악덕을 이식했다는 소리지.”
그의 질문에 대답한 건 미래였다.
잠자코 입을 닫고 있던 그녀는 두 눈을 매섭게 번뜩였다.
“난 예전에 이거랑 비슷한 걸 본적이 있어.”
“응? 진짜?”
미옥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묻자 미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막 4급 토벌자가 됐을 때였나? 아프리카 쪽에 파견간 적이 있었잖아요.”
“아, 그때구나? 대규모 토벌 작전을 실시했던.”
“맞아요. 그때 제가 뭘 봤었냐면······.”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미래는 협회 본부의 지원 요청을 받아 아프리카 수단에 파견됐던 적이 있었다. 요전번에 중국에서 일어났던 것과 비슷한 규모의 토벌 작전이었다.
토벌 작전의 목표는 단순했다.
“거기 사이비 교주가 하나 있었어. 최상급 이상의 마인이었지.”
사이한 능력과 귀물을 사용해 사람들을 홀리던 교주.
그를 토벌하는 것이 작전의 주된 목표였다.
“그 영감탱이는 내가 봤던 마인들 중에 제일 강했어. 3급 토벌자가 셋이나 달라붙었는데도 안 돼서 결국 하이드 아저씨까지 나설 정도였으니까.”
당시를 떠올리듯 미래의 눈빛이 아련하게 물들었다.
“근데 거기서 본 거야. 그 하영이란 애랑 비슷한 케이스의 아이를.”
누군가에게 악덕을 이식받은 점부터 성향이 중립이라는 점까지.
거기에 그 아이 또한 하영과 비슷한 또래의 ‘소녀’였다.
들으면 들을수록 미래의 말처럼 케이스가 비슷했기에 민호는 긴장된 얼굴로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당시 조사 결과, 소녀에게 악덕을 이식한 이는 그 교주였다는 걸 밝혀냈어. 그리고 악덕을 이식한 이유도 밝혀냈지. 조금 황당무계하지만 말이야.”
“어떤 이유에서였습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호가 빠르게 질문을 던졌다.
미래는 싱긋 웃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