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Chapter 47. 작전 (3)
“음, 저는 저거요.”
민호가 벽 한 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최면으로 알아보는 전생’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를 본 하영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물었다.
“와, 전생도 볼 수 있나요?”
“그럼. 물론 최면을 걸어야 해서 시간은 좀 걸리지만······.”
“괜찮아요! 와, 재밌겠다. 오빠 먼저 해봐요!”
하영이 민호를 부추겼다.
또 다시 대본에 없는 상황이 펼쳐지자 민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나는······.”
“후후, 원래 이런 건 둘이서 같이 해야 재밌지.”
그때 미옥이 눈웃음과 함께 다른 선택지를 제시했다.
“그래요?”
“그럼. 자자, 둘 다 여기 누워봐.”
미옥은 미리 준비해둔 것처럼 보이는 간이침대를 가리켰다.
이에 민호와 하영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누웠다.
“헤헤, 이게 뭐라고 조금 긴장되네요.”
“그러네. 어떤 전생이 나올까?”
“음, 오빠는 왠지 학자나 호위무사일 거 같아요.”
“응? 왜?”
“그냥 그랬을 거 같아요. 히히.”
하영이 배시시 웃었다.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던 그때, 미옥이 향 하나를 피웠다.
“자, 눈 감고 마음 편하게 가져요.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민호와 하영은 미옥이 시키는 대로 했다.
딱 하나, 숨을 쉬는 것만 빼고.
향초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민호는 그대로 숨을 참았다.
그렇게 2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미옥이 닫았던 입술이 달싹였다.
“됐어, 민호야. 이제 숨 쉬어도 돼.”
“푸하! 후우우우!”
그 말에 민호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미옥이 피운 향초는 최면이 아닌, 연기를 마신 사람을 재우는 효능의 보물이었다.
하영이 잠들기가 무섭게 미옥은 향초에 붙은 불씨를 제거했다. 새근새근 잠에 빠져든 하영을 보며 민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제대로 잠든 것처럼 보이네요.”
“그럼. 무려 2천 공덕이나 주고 산 보물인데. 잠들지 않으면 반품해야지.”
미옥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마찬가지로 씨익 웃은 민호는 긴장으로 굳어진 몸을 풀며 중얼거렸다.
“깜짝 놀랐어요.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볼 줄은······.”
“그러게. 원래 대본엔 이런 게 없었으니까.”
“그런 것치곤 엄청 잘 하시던데요?”
“응? 뭐가?”
“사주랑 손금이요.”
“아, 그거 그냥 내 젊었을 적 사주랑 손금 얘기한 거야. 난 그런 거 볼 줄 모른단다.”
미옥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던 그때 입구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똑똑.”
미래의 목소리였다.
입으로 노크소리를 낸 그녀는 천막의 입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실례합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얼른 들어와. 뜨거운 바람 들어오잖니.”
미옥이 인상을 찌푸리자 미래는 냉큼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요?”
“방금 막 잠들었어. 앞으로 한 시간은 못 일어날 거야.”
“좋네요. 방석 효과도 잘 도는 것 같고.”
하영의 손목을 만져본 미래가 씨익 웃었다. 정보 조사를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걸 알리는 미소였다.
미옥은 거추장스러운 마녀 복장을 벗어던졌다.
그러고는 굳어진 몸을 풀며 중얼거렸다.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그러죠. 아, 민호는 잠깐 나가있을래?”
“네? 왜요?”
“왜긴 왜야, 옷을 벗겨야 되니 그렇지.”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하긴 했다.
대상의 정보, 그리고 현재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선 맨몸이어야한다고.
하지만 민호는 선뜻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행여나 미래가 마음을 바꿔서 하영을 해코지할까봐 걱정이 됐던 탓이었다.
그런 민호의 걱정을 알아차린 걸까?
미래가 피식 웃었다.
“걱정 마. 토벌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뭣하면 맹세라도 할까?”
“······알겠습니다. 그럼 밖에 있을게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민호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미래를 믿기로 했다.
그래도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못해서, 천막에서 멀리 떨어지진 못했다.
“후우.”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던 민호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그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하늘에는 구름이 불규칙적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민호야.”
파란 하늘이 점점 빨갛게 익어갈 무렵이 돼서야 미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끝났으니까 들어와도 돼.”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민호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하영은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누워있었고, 미래는 조금 굳어진 얼굴로 앉아있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으음, 일단 미옥 아줌마랑 얘기를 좀 더 해봐야 정확해질 거 같아.”
미래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내놓았다.
“근데 아줌마 상태가 좀 안 좋아서.”
그녀의 말대로 미옥은 아까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마에는 땀이 한 가득 맺혀있었고 얼굴은 꽤나 수척해 보였다. 그 모습에 민호는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괘, 괜찮으세요?”
“능력을 과도하게 쓰셔서 그래. 좀 쉬면 괜찮아질 거야.”
민호의 질문에 대답한 건 미래였다.
그녀는 미옥을 가볍게 등에 업은 뒤, 담요로 미옥을 꽁꽁 싸맸다.
“미옥 아줌마는 내가 데리고 갈게. 넌 여기에 있다가 뒷정리 좀 해줘.”
“아, 네. 알겠어요.”
“그럼 수고해. 이따 카페에서 보자.”
손을 흔드는 걸 끝으로 미래는 천막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어폰을 통해 미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아, 여기는 센터. 임무 목표를 달성했다.]
[벌써요?]
[그래. A팀을 제외한 나머지는 철수해도 좋아]
[어, 죄송한데 조금 있다가 가도 될까요?]
[응?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요. 마무리하고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장사가 너무 잘 돼서······.]
[알겠어. 그럼 적당히 팔다가 와.]
[네. 알겠습니다.]
유독 밝아 보이는 혜진의 목소리를 끝으로.
이어폰은 그대로 침묵했다. 천막 안은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민호는 새근거리며 잠들어있는 하영을 그저 가만히 응시했다.
‘남은 시간은 이틀.’
정확히 말하면 하루하고도 몇 시간이 더 남았다.
5성급 임무의 마감시간은 내일 밤이었으니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꽈악-
민호가 주먹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내가 꼭 지켜줄게. 반드시.’
민호는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그로부터 약 십여 분 후. 곤히 잠들어있던 하영이 몸을 뒤척거렸다.
“우음······.”
눈썹을 꿈틀거리기가 몇 번.
잠시 후, 하영은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서일까? 눈동자가 조금 흐릿해보였다. 민호는 이를 가만히 바라보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일어났어?”
“······아, 오빠.”
민호를 발견한 하영이 배시시 웃었다.
이어 몸을 일으킨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제가 잠들었었나요?”
“응. 잠든 지 두 시간 조금 넘었어.”
“지, 진짜요?”
하영이 깜짝 놀라 외쳤다.
이어 그녀는 뭔가 이상한 걸 느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여기 점 봐주시던 아주머니는······.”
“잠깐 화장실 가셨어. 그보다 몸은 좀 어때?”
“몸이요?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데······. 앗!”
“왜 그래?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어?”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는 하영의 모습에 민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그가 걱정할만한 대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하영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전생 결과는 어떻게 나왔어요?”
“아, 그거······.”
민호가 뺨을 긁적였다.
미옥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당연했다. 말도 한 마디 제대로 못할 정도로 지쳐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전생을 지어내서 말하는 것 정도는 민호도 할 수 있었다. 아까 전에 미옥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마님과 노비였대.”
“네?”
“네가 마님이고, 난 네 집에서 일하던 노비였다는데?”
이어진 민호의 말에 하영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거니 대뜸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엄청 웃기네요. 그래서요?”
“음, 그래서······.”
민호는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뭐라도 둘러대야 했으니까. 다행히 하영은 그의 거짓말투성이인 이야기를 무척이나 즐거워하며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이어지던 이야기가 끝나자, 하영은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헤헤, 그래도 신기하면서도 안심되네요.”
“내가 노비였던 게?”
“에이, 당연히 아니죠.”
하영이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아련한 눈빛과 함께 말을 이어나갔다.
“그냥······. 저희가 전생에서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함께 있었다는 거잖아요. 그 사실이 신기하고 또 전생에서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 같아서 안심이 들어서요.”
“그렇게 생각하니 그것도 그러네.”
“그쵸?”
되묻는 하영과 눈이 마주쳤다.
민호와 하영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이제 슬슬 나가볼까?”
“네!”
하영의 대답을 끝으로 둘은 천막을 나섰다.
어느덧 붉게 물든 하늘이 둘을 반겼다. 검푸른 물감이 칠해지듯, 저 멀리서부터 점점 어둡게 변하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민호가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글쎄요.”
“영화 보러 갈까? 네가 보고 싶다고 했던 거.”
“으음, 아니요. 영화는 됐어요. 대신······.”
잠깐 말을 흐린 하영.
이어 그녀는 뭔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활짝 웃었다.
“오랜만에 집에 가는 건 어때요?”
“집?”
“네. 아까 자는 동안 그리운 꿈을 꿨거든요.”
하영이 눈을 감은 채, 방금 전에 꿨던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영이 보육원에 온지 1년이 되는 날,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케이크 대신 초코파이에 초가 꽂혔고 치킨이나 피자 대신 다양한 과자가 테이블 위를 가득 메웠던 그날.
“그때 오빠가 저한테 그랬잖아요. 언젠가 어른이 되면 초코파이 대신 케이크를, 과자 대신에 고기를 잔뜩 사서 파티를 해준다고요. 그때 기억이 문득 났거든요.”
하영은 그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를 듣던 민호도 아련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나도 기억나.”
“정말요?”
“당연하지. 내가 했던 말인데.”
민호가 씨익 웃었다.
“좋아. 그럼 가는 길에 케이크랑 고기 사가자.”
“네? 괘, 괜찮아요. 저 때문에 괜히······.”
“아니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민호가 하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이내 고민하듯 미간을 좁힌 채 중얼거렸다.
“어디보자, 케이크는 그렇다 쳐도 고기는 한 열 근은 넘게 사가야겠네.”
“네? 그렇게 많이요?”
“응. 너 혼자서 다섯 근은 먹잖아.”
“아, 아니에요! 저 그렇게 많이 안 먹어요.”
“정말?”
“그럼요!”
“근데 저번에 분식집에서 먹은 양을 보면 그렇지 않았던 거 같은데······.”
“그, 그때는 떡볶이를 오랜만에 먹어서 그래요. 원래는 안 그래요!”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당황하는 하영을 보며 민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다보니 이제야 좀 긴장이 풀렸다. 이 순간만큼은 임무에 관한 것도, 하영의 정보에 관해서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들었다.
“지, 진짜에요! 세 근만 먹을 테니까 여덟 근만 사도 돼요.”
“······세 근도 많은 거 아니야?”
“그 정도는 먹어야 힘을 쓰죠!”
하영이 당당히 소리쳤다.
그 귀여운 모습에 민호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얼마든지 사줄 테니까 오늘은 신나게 놀자.”
“헤헤, 네!”
힘찬 대답을 끝으로.
집으로 향하는 길 위에, 크고 작은 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