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Chapter 47. 작전 (1)
류화연과의 만남 이후.
민호는 머릿속이 혼란스럽게 물들었다.
비틀거리며 그가 향한 곳은 카페 브란델. 잠시 후, 도착한 카페에는 미래와 미옥, 혜진과 혜성이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앉아있었다.
평소였다면 커피부터 권했을 미옥이었지만 오늘은 별 말이 없었다.
그때 미래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결론부터 말할게.”
민호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미래의 시선이 그의 두 눈으로 가 닿았다.
“류화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단 한 번도.”
그 한 마디와 함께 카페 안은 무거운 정적으로 내려앉았다. 나직한 신음소리만이 들릴 뿐,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럼 정말······.”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민호가 입을 열었다.
“선인을 위한다는 그들의 목적이 ‘진실’이라는 겁니까?”
“그래. 그리고 하나 더.”
미래가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이어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듣고 싶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민하영이라는 애가 살아있으면 안 된다는 것도 진실이었어.”
쾅!
미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마인 따위의 헛소리입니다! 들을 가치도 없는······!”
“민호야.”
“전 아직 하영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체 왜 마인들이 왜 그 애를 노리는지도, 하영이가 왜 위협이 되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말을 잇던 민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 애는 죄가 없다.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하는 착한 아이다.
그런 말로 미래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미래의 고유능력을 통해 본 류화연의 말은 ‘진실’이었다.
이는 선인을 위해서라면 하영을 토벌해야 된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민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미래에게 호소했다. 돕지 못할 거라면 적어도 처음 약속했던 사흘이라는 시간만이라도 보장해주기를 바랐다.
꽈득-
입술을 거세게 깨문 민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꺼내려던 찰나, 미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일단 진정해. 나는 널 막을 생각은 없어.”
“······예?”
그 담담한 대답에 민호는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한편 미래의 대답을 들은 혜진과 미옥이 걱정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류화연이 한 말이 진실이라면서? 그럼 하루라도 빨리······.”
미옥은 민호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흐렸다.
그때 미래가 대답을 이었다.
“진실이긴 한데, 이상한 점이 좀 있어요.”
“이상한 점이요?”
“응. 전반적으로 상황 자체가 좀 이상하지 않아?”
미래의 눈가가 가늘게 좁아졌다.
그녀는 노트 위에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렸다. 하나는 강태진, 다른 하나는 류화연이라 적었다. 그러고 둘의 사이에 민하영이라는 이름을 끄적거렸다.
“강태진은 대상을 지키려고 하고, 류화연은 없애려고 하는 이 상황 말이야.”
“그건······.”
“음, 확실히 조금 이상하긴 하구나.”
미옥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미래가 말을 이었다.
“둘 다 쳐 죽여도 시원찮을 마인들인데, 왜 이렇게까지 극명하게 갈리는지가 이상해.”
“마인들 간의 다툼은 종종 일어나는 편이잖아요? 비슷한 게 아닐까요?”
그때 혜진이 나름대로 그럴듯한 의견을 내놓았다.
마인들은 각자 저마다의 이득을 위해 행동하는 이들이다 보니 단합이 어렵다. 간혹 어떤 경우에는 그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기도 한다. 혜진도 최근 비슷한 경우를 몇 번 보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추측이 든 것이리라.
“그렇긴 한데, 이 경우는 뭔가 영 미심쩍단 말이지.”
하지만 미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모습에 미옥은 한숨과 함께 질문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토벌 임무를 보류하기라도 할 생각이야?”
“네, 그러려고요.”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임무는 중요한 법이니······. 뭐?”
미옥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동시에 혜진과 민호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부, 지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임무를 보류하겠다고요?!”
“응. 생각이 바뀌었어.”
“대체 왜······.”
혜진이 멍하니 묻자 미래는 나직이 대답했다.
“으음, 설명하긴 어렵고. 그냥 직감이야.”
황당한 선언만큼이나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 미래의 직감은 꽤 믿음직스러운 편이다. 실제로 그 직감 덕분에 놓칠 뻔했던 마인을 잡은 적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유라고 보기엔 다소 빈약했다.
“그게 이유의 전부야?”
“뭐, 굳이 따지면 하나 더 있죠.”
“뭔데?”
“까놓고 말하면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요.”
미래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짜증이 가득 담긴 미소였다.
“지금 우리들 꼴이 마인 새끼들 장단에 어울려주는 거 같잖아요.”
“그건······.”
미옥이 입을 닫았다.
하나는 민하영을 지키려고 하고, 다른 하나는 민하영을 없애려고 한다.
어떤 선택을 하던 마인들의 선택과 겹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니까.
“선택을 하기에 앞서, 적어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돈 정확히 알고 행동해야겠어요.”
두 눈을 반짝거린 미래.
그녀가 저런 모습을 하면 누가 와도 말릴 수가 없다. 오랜 경험으로 이를 잘 알고 있는 미옥은 될 대로 되라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미래가 말을 걸었다.
“미옥 아줌마.”
“에휴, 응?”
“지금 민하영 주변 인물들에 대한 정보는 어디까지 끝냈어요?”
“음, 대충 절반 정도.”
기억을 더듬던 미옥이 입을 열었다.
“나머진 거의 다 했는데 그 양모라는 사람에 대한 정보가 좀 부족해.”
한유선에 대해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자 미래는 괜찮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그럼 거기서 잠깐 멈추고 다른 일 좀 해주세요.”
“어떤 일?”
“민하영에 대한 조사요.”
임무 대상인 민하영.
그녀에 대한 정보는 민호가 전부 털어놨다. 보육원에 처음 온 날부터 입양을 갈 때까지, 그리고 이후에 대한 이야기까지 전부.
그럼에도 이런 부탁을 한다는 건, 일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아닌, 더욱 자세한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리라. 미옥도 이를 알았는지 얼굴을 살짝 구겼다.
“그게 말이 쉽지. 시간이 너무 부족하잖니.”
“왜 예전에 프랑스에서 썼던 방법 쓰면 되잖아요?”
“그건 대상이랑 접촉해야 돼.”
“괜찮아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미래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웃었다.
묘하게 자신만만해 보이는 미소. 미옥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민하영의 양모는 혜성이가 조사해줘. 한유선이었나? 그런 이름이었을 거야.”
이어 미래는 한유선에 대한 조사를 혜성에게 떠넘겼다.
그런데 혜성의 낯빛이 묘하게 어두웠다.
“안 그래도 해봤는데요. 그게 대상이 귀물이 너무 많아서······.”
혜성은 이제 고작 7급 관찰자다.
아무리 사기적인 고유능력을 가졌다고는 해도 귀물을 뚫지 못하면 소용없었다.
그러던 그때, 입구 쪽에서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내가 돕지.”
담백하면서도 굵직한 음성.
낯익은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향했다.
“어?”
“진하 선배님?”
그곳에 서있는 건 다름 아닌 진하였다.
맹창식에 관련된 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듯 초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모두가 놀라던 그때, 미래가 툭 던지듯 물었다.
“일은? 바쁘다면서?”
“휴가 냈다.”
진하는 무심한 듯 시크하게 대답했다.
이어 그가 자리에 앉자 미옥이 옅게 웃었다.
“그래, 진하가 도와주면 혜성이도 잘 해낼 수 있겠지.”
“네! 귀물만 무력화시킬 수 있으면 뭐든 괜찮아요!”
주눅들어있던 혜성이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좋아. 이걸로 얼추 준비가 끝난 것 같네.”
진하의 합류와 함께 관찰자들의 할 일이 정해졌다.
미래는 만족스럽게 웃어 보인 뒤, 민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됐으니까 너도 이제 우리랑 같이 행동하자.”
그 말을 끝으로 미래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야 비로소 목적이 같아졌다. 민호는 미래의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
“······전 뭘 하면 될까요?”
“가장 중요한 역할.”
“그게 뭔데요?”
민호의 질문에 미래는 그저 해실거리며 웃었다.
묘하게 불안해 보이는 미소였다.
***
미래가 세운 작전은 간단했다.
우선 하영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긁어모은다. 이어 그 정보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행동방침을 정하는데, 되도록 토벌이 아닌 구원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일단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짧은 기간에 빠르게 정보를 모으기 위해선 하영과 미옥을 만나게 해야만 했다. 그런고로 민호는 둘을 만나게 할 다리 역할을 맡았다. 때마침 예종대학교에서 여름날 축제가 열렸기에 민호는 데이트를 명목으로 하영을 불러냈다.
약속시간 5분 전.
조금 일찍 약속장소로 나온 민호는 햇볕이 쨍쨍한 벤치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나직한 한숨을 뱉어냈다.
“데이트하는 건 처음이 아니지만······.”
이성과 단 둘이서 놀러다니는 걸 데이트라고 한다면, 민호는 그간 하영과 많은 데이트를 해왔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 긴장 되냐.”
그런데 막상 약속장소에 와보니 묘하게 긴장이 됐다.
아마 다른 목적이 있는 데이트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지금 귀를 통해서 생생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들도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아아, 연결 상태 한 번만 체크할게. 센터는 체크 완료야.]
[여기는 A팀, 체크 완료.]
[B팀도 완료입니다.]
[C팀은 조금 잡음이 심하지만 못 들을 정도는 아니야.]
미래의 첫 마디를 시작으로.
진하와 혜진, 미옥의 목소리가 차례대로 들려왔다. 현재 이곳에는 A팀에 속한 진하와 혜성을 제외한 모든 신의 대리인이 와있었다.
미래가 세운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료하기 위해서였다.
[A팀, 혜성이랑도 연결 잘 되고 있지?]
[그래, 문제없다.]
[오케이. 그럼 마지막으로 민호는?]
모든 팀의 점검을 마친 미래가 민호를 향해 물었다.
이에 민호는 즉각 입을 열었다.
“잘 들립니다.”
[이걸로 준비는 끝났네.]
이어폰에서 미래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민호는 귀를 툭툭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영 적응이 안 되네요.”
[맞아. 귓속에서 웅웅거리니 정신이 없을 거야.]
[그래도 듣다보면 괜찮아질 거란다.]
미래에 이어 미옥이 대답했다.
그러던 중 잠자코 있던 혜진이 입을 열었다.
[여기는 B팀. 방금 대상의 출현을 확인했습니다.]
[약 1분 뒤에 선배가 있는 곳에 도착할 거 같습니다.]
[좋아, 각자 위치에서 대기하시고, 민호는 긴장 풀고 자연스럽게 대해.]
미래의 마지막 한 마디를 끝으로.
이어폰에선 더 이상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어수선했던 기분이 차츰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러던 그때였다.
“오빠!”
멀리서 들려온 밝은 목소리.
하늘색 원피스와 새하얀 운동화를 신은 하영은 한 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였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그녀는 한달음에 민호의 곁으로 달려왔다.
“죄송해요. 차가 막혀서. 오래 기다리셨어요?”
뛰어서 온 건지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민호는 손수건을 꺼내 하영의 땀을 닦아줬다.
“뭘 아직 약속시간도 안 됐는데. 천천히 오지 그랬어.”
“헤헤, 그냥요. 기다리실까봐.”
하영이 멋쩍게 웃자 민호도 피식 웃었다.
“그보다 배고프겠다. 얼른 밥 먹으러 가자.”
“네!”
밥 먹으러 가자는 말이 끝나자마자.
하영이 밝게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