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Chapter 46. 교차로 (1)
“······어떤 방해?”
민호가 묻자 태진은 피식 웃었다.
“에이,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 임무도 내려왔잖아?”
임무가 내려왔다?
그 말에 민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최근에 내려온 임무라면 오직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설마······.”
“민하영.”
민호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태진이 하영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는 민호의 눈이 점점 커다랗게 변하는 걸 즐기듯이 바라보며 입가를 뒤틀었다.
“장장 7년이 넘는 시간을 쏟아 부은 내 최고의 걸작이지. 아마 넌 절대 모를 거야. 내가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려왔는지.”
“······.”
“근데 말이지. 그 아이를 수확하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빌어먹을 파리새끼들이 알짱거리는 게 보이지 뭐야?”
수확이라는 말에 민호의 어깨가 움찔거리며 떨렸다.
태진은 그런 민호의 반응 하나하나를 살펴가면서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선 모조리 쳐 죽이고 싶지만, 대장이랑 약속한 게 하나 있어서 말이지. 그러니까 박살내기 전에 먼저 기회를 줄게.”
태진이 민호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웃지 않는 눈동자로 말했다.
“자, 어서 대답해. 날 방해하지 않겠다고.”
태진에게서 거센 기세가 흘러나와 민호를 짓눌렀다.
하영에게서 손을 떼라는 무언의 압박.
“그럼 너도, 이 기록자도 무사히 돌려보내줄게.”
이어 태진은 민호의 귓가에 대고 달콤한 한 마디를 속삭였다.
그냥 한 마디만 하면 된다. 하영에게서 손을 떼겠다고. 빈 말이라도 좋다. 그럼 당장 이 위기에선 벗어날 수 있으리라.
딱 한 번. 한 번만 고개를 숙이면 된다.
민호는 머리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 모습을 보며 태진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그런데 그 순간!
꽈악-
별안간 민호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지랄하지 마, 새끼야.”
사나운 으르렁거림과 함께.
민호는 태진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세상에 동생을 버리는 오빠가 어디 있어?”
빈 말을 하는 건 어렵지 않다.
위기를 피하기 위한 거짓말일 뿐이니까.
그러나 민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설령 위기 회피용 거짓말이라고 해도, 하영에게서 손을 떼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러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하영이 털 끝 하나만 건드려봐. 가만 두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민호는 태진의 경고를 정면에서 받아쳤다.
한편 태진은 멍한 얼굴로 민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설마 이런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크크, 아하하하!”
잠시 후, 태진은 얼굴을 부여잡은 채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한참을 웃던 그는 이내 두 눈을 매섭게 번뜩였다.
“힘은 쥐뿔도 없는 새끼가 입만 살아선······.”
그리고 그 순간!
콰앙-!
“커헉!”
민호의 몸이 그대로 철문에 처박혔다.
철문이 우그러지면서 민호의 등과 복부에서도 거센 충격이 전해졌다. 아찔한 고통에 민호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물들었다.
“원래 다리 하나만 부러뜨리고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끅! 끄흑!”
“목만 빼고 전부 부러뜨려줄게.”
강태진의 두 눈이 스산하게 물들었다.
이어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민호의 어깨.
벽도 박살내는 괴력에 얻어맞는다면 그의 어깨는 십중팔구 박살이 나리라.
“일단 오른쪽 팔부터.”
차가운 비웃음과 함께 태진의 팔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곧 닥쳐올 끔찍한 고통에 대비하기 위해 민호가 이를 악 물던 그때.
꽈악-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난데없이 허공에서 손이 튀어나와 강태진의 팔을 움켜잡은 것.
“응?”
그 갑작스런 상황에 태진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던 중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이어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안개 속을 헤집고 나타난 것처럼 자연스러운 등장이었다.
“이미 한 대 때렸잖아. 그쯤 해두지?”
후드티를 입고 있는 이십대 후반의 여성.
그녀의 등장에 민호는 일순간 눈을 부릅떴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던 탓이었다.
“뭐야? 주효진, 너였냐?”
그때 강태진이 여성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후드티를 입은 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주효진. <백야>의 일원이자 예전에 민호와 얼핏 마주쳤던 적이 있던 마인이었다.
한편 갑작스런 효진의 등장에 태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지켜보기만 하는 거 아니었어?”
미약한 짜증이 깃든 얼굴.
이에 효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대장한테 받은 임무가 있어가지고.”
“아하, 대장이 시켰나보네. 열쇠한테 위해를 가하는 것처럼 보이면 막으라고?”
“응, 맞아.”
효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태진의 팔을 놓진 않았다.
“그래. 대장이 시킨 건 좋아. 그런데 말이지.”
말을 잇던 태진이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이어 효진의 코앞까지 얼굴을 가져다 댄 그는 두 눈 가득히 비웃음을 담은 채로 물었다.
“근데 날 막을 수 있을 거 같아? 너 혼자서?”
“나는······.”
그 질문에 효진이 뭐라고 대답하려던 찰나.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굵은 음성이 들려왔다.
“혼자가 아니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
잠시 후, 허공이 일그러지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북극곰 가면을 쓴 그는 우스꽝스런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정장을 입고 있었다.
“허튼 짓은 그만둬라, [용].”
효진의 등장에도 평정심을 유지했던 그였지만,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계약을 어길 생각은 아니겠지?”
이어진 곰 가면의 말에, 태진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러고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낮게 찼다.
“쯧! 신창우, 너는 또 언제 온 거야?”
“말 돌리지 마. 열쇠에게서 손 떼고 천천히 뒤로 물러나라.”
창우가 태진의 주먹을 가리키며 경고했다.
이에 태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나도 계약을 어길 생각은 없는데 말이야.”
풀썩 웃음을 터뜨린 태진.
이어 그의 발이 지면을 박찼다.
“······!”
“저, 저저!”
일순간이었다.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공중제비를 돈 그는 단숨에 민호의 코앞에 당도했다.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신창우나 주효진은 어떠한 제지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 새끼를 가만히 뒀다간 성가셔질 거 같아서.”
태진이 민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의 힘이라면 민호의 목을 부러뜨리는 데는 일초도 걸리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창우와 효진은 섣불리 태진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태진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 죽이진 않을 테니까. 대신······.”
어디 한 군데 병신으로 만들 뿐이야.
뒷말은 민호에게만 들렸다. 이어 태진은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와그작!
“큭?!”
태진의 미간을 찌푸렸다.
일순간 주먹에 통증이 느껴진 탓이었다.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어느새 깨어난 율이, 태진의 주먹을 양껏 물어뜯고 있었다.
“주인님! 얼른 도망가세요!”
율은 민호가 도망칠 틈을 벌기 위해 소리쳤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비록 그녀에게 있어선 전력을 다해 기습공격을 퍼부은 셈이지만, 태진에게 있어서는 그저 벌레에 물린 것 정도의 고통에 불과했기에.
그럼에도 예기치 못한 고통은 언제나 불쾌한 감정을 안겨주는 법.
태진은 얼굴을 와락 구긴 채 주먹에 힘을 가득 주었다.
“이 같잖은 벌레가 어디서······.”
“꺄악!”
몸이 서서히 조이는 고통에 율이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태진의 구속에서 풀려난 민호는 비틀거리더니 이내 몸을 휙 돌렸다. 그 모습을 본 태진은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하! 네깟 놈이 도망가 봐야 얼마나······.”
태진은 비웃음과 함께 손을 뻗었다.
목덜미를 낚아채자마자 바닥에 처박을 요량이었다. 그 다음에는 이 빌어먹을 기록자와 함께 짓밟는 게 좋겠다. 다시는 두 발로 일어날 수 없게.
잔혹한 미소가 입가에 번지던 그때.
후웅-
돌연 민호가 다시 몸을 돌렸다. 이어 그가 상체를 낮추자 태진의 손은 텅 빈 허공을 가로질렀다. 곧이어 민호가 웅얼거리는 말투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일격······.”
“뭐?”
“······필살!”
힘 있는 목소리와 함께.
민호는 태진의 안면을 있는 힘껏 후려갈겼다.
콰직-!
“크헉!”
무너진 자세를 비집고 기습적으로 꽂힌 주먹!
기본 근력의 700퍼센트에 달하는 힘에 태진의 코에서 뭔가가 으스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런 충격에 태진은 짧은 비명과 함께 몸을 비틀거렸다.
그의 코에서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민호는 태진의 손에 잡혀있던 율을 빠르게 빼냈다.
“율아!”
“흐이잉, 주인님!”
율이 울먹거리며 민호의 품에 안겼다.
그녀를 조심스럽게 받아든 민호는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태진은 생각보다 회복이 빨랐다.
콰앙-!
“크흐! 이 빌어먹을 연놈들이 진짜!”
얼굴을 붉힌 태진이 발을 굴렀다.
옥상 바닥이 마치 두부처럼 움푹 파였다.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난 것처럼 보였다.
“생각이 변했다. 계약이고 뭐고, 모두 갈가리 찢어주마!”
벌레만도 못하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일격을 허용한 것에 대한 분노일까?
태진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단숨에 지면을 박찼다.
“강태진!”
“멈춰!”
창우와 효진이 그 앞을 막아섰지만 소용없었다.
빠른 속도로 내달린 태진은 단숨에 민호의 앞까지 도달했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민호의 얼굴을 바라보며, 태진의 손이 움직였다.
이어 그의 주먹이 민호를 강타하려던 찰나!
멈칫-
태진의 주먹이 민호의 코앞에서 멈췄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손을 낚아챈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변화였다.
“어?”
태진 역시, 갑작스런 이변에 당황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주먹을 회수하기 위해 힘을 주었지만 이상하게도 힘이 들어가지가 않았다.
“······이건 또 뭔 개수작이냐?”
눈썹을 씰룩거린 태진이 창우와 효진을 노려봤다.
지금 상황에서 그를 제지할 수 있는 건 둘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는 태진의 착각이었다.
하긴 그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설마 이 자리에 그를 막아설 수 있는 이가 나타났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테니까.
“강태진.”
오싹-
그 순간.
주변의 공기가 차게 식었다. 이어 전신의 털이 바싹 곤두섰다.
갑작스런 이변에 민호는 그대로 굳었다. 창우와 효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태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요동치는 눈빛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그때 반쯤 부서진 철문 너머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정적으로 가득 찬 세상에 빗방울이 내린다면 이런 소리일까?
청명하면서도 맑은 발소리가 멎자 한 소녀가 얼굴을 드러냈다.
10대 후반 정도로 되어보이는 소녀.
그녀는 창우와 효진에게도, 태진에게도, 그리고 민호에게도 익숙한 이였다.
“류화연······.”
민호가 신음을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동시에 그의 낯빛이 어둡게 물들었다.
그도 그럴 게, 이 자리에 있는 마인들은 모두 <백야>의 일원이었고, 저 소녀는 여기 있는 마인들을 모두 발아래에 둔 <백야>의 보스였으니까.
이건 미래가 와도 승산을 장담하기가 힘들겠다.
민호가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던 중, 류화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