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Chapter 45. 경고 (2)
‘마음 같아선 저녁까지 놀고 싶은데 오늘은 약속이 있어요.’
‘어머니랑 어머니 지인과 커피를 마시기로 했거든요.’
‘그 강 변호사라는 분인데, 음악계 쪽에 인맥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히 전 그 사람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어머니가 계속 권하셔서······.’
하영에게서 강 변호사라는 말을 듣자마자, 민호는 그가 강태진이라는 걸 직감했다.
왜냐면 그간 하영과 영상통화를 하며 몇 번이고 그를 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민호는 오늘 하영이 강태진을 만난다는 사실을 알기가 무섭게 계획 하나를 세웠다. 바로 하영이 강태진과 나눌 대화를 모조리 엿듣는 것.
이를 위해 민호는 노인으로 변해 하영에게 접근했고, 그녀의 이마에 연고까지 발랐다.
“미래 누나도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미래는 강태진과 관련된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하지만 지금 [주시자의 눈]을 시청하는 이는 민호뿐이었다.
민호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던 그때.
“앗! 주인님, 이제 나오는 거 같아요!”
율의 외침이 들려왔다.
민호의 시선은 다시 화면에 가 닿았다.
하영과 유선이 도착한 곳은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어느 카페.
다른 카페들과는 다르게 전 좌석이 룸으로 구성된 곳이었다. 유선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내부에 있는 룸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곳으로 향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자 자리에 앉아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는 유선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 이어 유선 역시, 남자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호호, 죄송해요. 저희가 많이 늦었죠?
-하하. 아닙니다. 저도 이제 막 온 참입니다.
유선의 인사에 남자는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익숙한 얼굴.
남자를 본 민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갔다.
“······강태진.”
민호의 입술을 비집고 남자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는 분명 강태진이었다. 비록 민호가 알고 있는 모습과는 다소 달랐지만. 분명 귀물로 얼굴을 변형시킨 것이리라.
민호는 그렇게 직감했다.
-저 없는 동안에도 잘 지내셨죠?
-아니에요. 강 변호사님이 안 계시니까 어찌나 허전하던지······.
-하하, 빈 말이라도 감사합니다.
반가운 분위기 속에서 훈훈하게 인사가 마무리됐다.
이어 커피가 나오고,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다. 민호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주로 대화를 하는 것은 유선과 태진이었다. 둘은 커피와 관련된 이야기부터 음악에 관한 이야기까지, 폭 넓은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지루한 얼굴로 이를 지켜보던 율은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주인님, 대화가 별로 유익해보이진 않는데요?”
“그러게. 조그만 정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처음엔 거창한 정보를 기대했다.
혹시 류화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두근거리며 화면을 지켜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쓸데없는 대화만 오가자 마음이 점점 초조해졌다. 그리고 지금은 하다못해 정말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아무 정보만 나오길 빌고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제 시청시간도 거의 다 끝나가요.”
남은 시간은 5분 남짓.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태진과 유선의 웃음소리에 민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체념이 가득 담긴 한숨이었다.
그런데 그때, 한참을 웃던 태진이 별안간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 어머님. 혹시 예전에 말씀드린 거 기억하십니까?
-예전에? 호호, 뭘 말씀하시는 건지······.
-왜 제가 소개시켜 드리기로 하신 분 있잖습니까.
-아! 설마 그 렘버튼 악단 쪽에 계신······.
-맞습니다. 그 분이 이번 주에 한국을 방문하실 예정이거든요.
-어머, 어머! 정말요?
-네. 그래서 시간이 되신다면 어머님과 하영 양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저희야 언제든 괜찮죠! 얼마든지 불러만 주세요.
-하하, 다행이네요. 그럼 일단 이번 주 목요일 저녁에 제가 모시러······.
태진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끝으로.
치지직-
화면이 삽시간에 흐려졌다.
곧이어 짤막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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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시간이 종료됐습니다.
-[주시자의 눈]이 소멸합니다.
==
“켁! 뒷말은 못 들었네요.”
율이 입맛을 다셨다.
“아쉽지만 썩 좋은 정보는 못 얻은 걸로······. 주인님?”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말을 잇던 그때, 율은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공을 들여 계획까지 세웠음에도 정보를 얻지 못한 민호였다. 그렇기에 낙담하거나 실망한 모습을 보여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민호는 오히려 눈을 반짝거리며 빛내고 있었다.
그러고는 꺼진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면서 연신 뭔가를 중얼거렸다.
“목요일, 이번 주 목요일 저녁······.”
“목요일이 왜요?”
민호의 얼굴을 마주본 채 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호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은 어조로 답했다.
“······이번 임무의 마감시간이 목요일 밤에 끝나.”
“헉! 저, 정말요?”
율이 깜짝 놀란 얼굴로 외쳤다.
강태진은 목요일 저녁, 하영을 초대했다. 그리고 이번 5성급 임무의 마감 시간은 목요일 밤. 시간대가 겹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그럼 설마······.”
놀란 기색이 역력한 율의 한 마디와 함께.
민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목요일 저녁에 뭔가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에.
***
다음날 아침.
민호는 곧장 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만나서 아무 정보라도 일단 얻어낼 요량이었다. 강태진과 관련된 정보나, 목요일 저녁의 약속에 대해서 캐낼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민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죄송해요, 오빠.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수화기 너머로 하영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민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내색하진 않은 채 물었다.
“그렇구나. 이번에도 어머님이랑 약속한 거야?”
-앗, 아니요. 그건 아니고······.
잠시 말을 흐린 하영.
이어 그녀는 목소리를 조금 낮춰 말을 꺼냈다.
-혹시 예전에 제가 얘기했던 거 기억나세요? 그 왜 채팅에서 만난 애가 있는데 저랑 대화가 잘 통했다고 했던 애요.
밤마다 하영과 전화를 주고받으며 민호는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연주회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시콜콜한 잡담들까지.
그리고 그 중에선 최근, 하영이 채팅에서 만난 어느 ‘친구’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아, 응. 기억나. 너랑 동갑이라고 했었지?”
기억을 더듬던 민호가 ‘친구’와 관련된 정보를 내뱉었다.
그러자 하영은 밝은 어조로 대답했다.
-네, 맞아요. 걔랑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렇구나. 맛있는 거라도 먹기로 했어?”
-건대 쪽에 예쁜 피아노가 있는 카페가 있다고 해서요. 거기서 보기로 했어요.
“정말? 그럼 우리 피아니스트님이 한 곡 연주해주시는 건가?”
-헤헤, 기회가 되면요.
이런저런 대화를 끝으로.
민호는 하영과의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민호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알아차린 걸까? 하영 역시, 아쉬움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히잉, 네. 대신 내일은 꼭 봐요! 저 그 영화 꼭 보고 싶었거든요.
“그래. 응, 그러자.”
뚝-!
하영과의 통화가 끝났다.
그러자 곁에 있던 율이 장난기어린 미소와 함께 말을 걸었다.
“주인님, 차인 거예요?”
“그런 거 같네.”
민호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에 율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앞으로 이틀 밖에 안 남았는데······.”
“오늘도 따라가 봐야지.”
“네? 그치만 오늘은 강태진이랑 만나는 게 아닌데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민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순 없어.”
임무 마감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이틀 남짓.
하영을 구하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만 했다. 설령 마인과 관련이 없다고 해도 민호는 하영과 관련된 정보라면 뭐든 캐낼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민호는 즉각 집을 나섰다.
***
집을 나서기 전.
민호는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햇볕 아래에선 미약한 인기척조차 지워버리는 비단 망토와 만에 하나를 대비해 도깨비수염과 감투, 거기에 가면까지 챙겼다.
그리고 또 하나. 챙긴 게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뿔테안경.
이를 손에 든 민호는 엊그제 카페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5성급 임무를 하달 받은 이후, 미래에게서 사흘간의 유예기간을 얻어냈던 당시. 집으로 돌아가려는 민호는 붙잡은 이가 있었다.
바로 혜성과 혜진이었다.
‘민호 형.’
‘선배. 이거 받으세요.’
‘저희가 직접 돕진 못하겠지만······.’
‘이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둘이 건넨 것이 바로 이 안경이었다.
십시일반 공덕을 모아 공덕 상점에서 구매했다고 했다. 그리고 둘이 건네준 안경은 확실히 도움이 될 법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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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사냥개의 안경]
*등급: 병(丙)
*귀신 잡는 사냥개의 시체 일부를 가공하여 만든 안경.
*착용 시, 귀신 혹은 귀신의 힘이 깃든 물건을 간파할 수 있다.
*귀물의 등급이 병(丙)급 보다 높으면, 일부 정보만 볼 수 있다.
*유효기간: 49일
(경고: 장시간 착용 시, 기력이 쇠할 수 있으니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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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물을 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보물.
본래는 5급 이상의 토벌자들에게만 허락되는 보물이지만, 우연히 공덕 상점에 올라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둘은 이 보물이 민호에게 도움이 될 거라 판단하고 이를 구매해 민호에게 건넨 것이었다.
혜성과 혜진의 마음씀씀이에 민호는 적잖이 감동을 받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보물은 민호에게 굉장한 도움이 되는 물건이었다. 귀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해당 인물이 마인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낼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이에 민호는 집을 나서자마자 안경을 썼다.
그러고는 하영이 약속을 잡았다고 말했던 카페로 향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민호는 어느 카페 앞에 도착했다.
<키즈나>라는 이름의 일본풍 카페였는데, 하영이 전화로 말했던 것처럼 예쁜 피아노가 두 대나 있는 독특한 분위기의 카페였다.
그는 골목 어귀에 숨어 하영이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하얀색 세단 한 대가 카페 앞에 멈춰 섰다.
‘저건······.’
그때 민호의 눈가가 좁아졌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운전석에 있는 여성. 바로 한유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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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안 발동]
-귀신 사냥개가 대상의 냄새를 맡습니다.
-귀신 사냥개가 귀기(鬼氣)에 반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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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선을 바라보기가 무섭게!
일순간 운전대 앞에 올려둔 파우치와 그녀의 양쪽 귀가 붉게 반짝거렸다. 곧이어 안경 너머로 짤막한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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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물 발견: 3개]
-염탐의 오른쪽 귀걸이: 대상 주변의 소리를 술자에게 전달한다.
-추적의 왼쪽 귀걸이: 대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의 ?? 향수: ???의 ??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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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선이 가진 귀물은 세 개.
모두 강태진이 전달한 것으로 추정됐다. 민호가 알기로 한유선이 접촉한 마인은 강태진 뿐이었으니까.
‘대부분 추적과 엿듣기에 관련된 귀물인데······.’
강태진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의도 하나 만큼은 명확했다.
그런데 딱 하나, 향수만큼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어려웠다. 아마 병(丙)등급 이상이라 제대로 된 파악이 어려운 것이리라.
덜컹-
그러던 중 보조석 문이 열렸다.
곧이어 차에서 하영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