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Chapter 45. 경고 (1)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신사동 가로수길.
평소와 다를 바 없던 거리에 한 차례 술렁임이 일었다.
“야, 저기 좀 봐봐.”
길을 걷던 누군가가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이국적인 카페들이 즐비한 골목.
그 어귀에 서있는 이는 어느 젊은 여성.
하늘색 와이셔츠에 스키니진을 신은 그녀는 대략 이십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또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한 눈에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했다.
아니, 단순히 예쁘다는 말로는 조금 부족했다.
그녀에게는 타인의 시선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미쳤다. 연예인인가?”
“TV에선 본적 없는 사람인데, 혹시 연습생 아냐?”
“아니, 저 정도면 연습생 수준이 아닌 거 같은데······.”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여성에게로 꽂히고, 연이어 감탄이 터져 나왔다.
길을 오가는 이들의 눈빛을 독차지한 그녀는 바로 민하영이었다.
“으음, 조금 일찍 도착하려나?”
하영은 손목에 찬 시계를 보더니 이내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치, 그럼 오빠랑 좀 더 있다올걸······.”
후회가 가득한 목소리.
하영은 방금 전까지 함께 있던 민호를 떠올렸다. 그를 생각한 것만으로 하영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맺혔다.
“그래도 오랜만에 봐서 좋았어.”
떡볶이도 맛있었고. 하영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어 그녀의 시선이 다시 시계로 향하던 그때.
쾅! 쿠당탕탕!
골목 부근에서 요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누군가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녀요!”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외침.
하영의 고개가 천천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어느 좁은 골목. 안경을 쓴 남학생과 그 앞에 넘어져있는 노인이 보였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학생과 부딪쳤던 걸까?
노인은 쓰레기처럼 보이는 걸 봉투에 주워 담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씨, 재수가 없으려니까 진짜!”
인상을 팍 쓴 학생은 곧 그 자리를 떠났다.
이어폰을 꽂은 채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하며 떠나는 모습을 보아하니, 방금 전에 일어난 충돌이 누구의 탓인지는 명확해보였다.
하영이 고운 미간을 찌푸리던 그때.
홀로 남은 노인은 황급히 쓰레기를 봉지에 주워 담았다.
그때 골목을 오가던 사람들도 인상을 찌푸렸다.
“아, 뭐야?”
“우욱, 냄새 미쳤네.”
“자기야, 그거 밟지 마. 신발 버릴라.”
“그냥 다른 곳으로 돌아가자.”
쓰레기가 쏟아진 골목.
사람들은 저마다 자리를 피했다. 그곳에 남은 건 노인 하나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쿨럭, 쿨럭!”
무엇이 그리도 죄송한지 노인은 기침을 해가면서도 사과를 했다.
바닥에 쏟아진 양이 너무 많은 탓일까? 쓰레기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 하영이 발을 움직였다.
“할아버지.”
노인에게 다가간 하영.
그녀는 대뜸 쪼그린 채 자리에 앉았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으응?”
“여기에 담으면 될까요?”
하영이 쓰레기를 주워들며 물었다.
그 모습에 노인은 놀란 얼굴로 허둥거렸다.
“하유, 괜찮아요. 손 더러워질라.”
“에이, 좀 더러워지면 어때요? 씻으면 되죠. 이리주세요. 얼른요.”
하영은 노인의 손에 들린 쓰레기봉투를 빼앗아 들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하하, 괜찮아요.”
멋쩍게 웃는 하영.
잠시 후, 그녀는 빠르게 모든 쓰레기를 봉투에 주워 담았다.
그러고는 벽에 기대어 있는 소형 리어카를 바라보며 물었다.
“읏차! 이거 여기다 실어놓으면 될까요?”
“예, 예. 고마워요, 고마워요.”
노인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하영은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친 뒤, 쓰레기봉투를 리어카 뒤에 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쿵-!
쓰레기가 가득 담긴 봉투가 실리면서 리어카가 일순간 뒤로 기우뚱거렸다. 동시에 리어카 앞쪽에 있던 음료수 캔이 하늘을 날아, 하영의 이마를 강타했다.
“아코!”
이마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하영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이를 본 노인이 허둥거리며 다가왔다.
“아이구, 미안해요. 많이 다쳤나?”
“괘, 괜찮아요. 하하.”
하영은 이마를 가린 채 어색하게 웃었다.
이마가 좀 얼얼하긴 했지만 아픈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면 반나절 정도 부어 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라앉으리라.
하지만 노인이 보기엔 무척 아파보인 모양이었다. 노인은 연신 호들갑을 떨며 품에서 연고 하나를 꺼냈다. 새살이 솔솔 돋아난다는 문구가 적힌 연고였다.
“잠깐만 있어 봐요. 이거 발라줄 테니까.”
“앗, 괜찮은데······.”
하영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노인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는 하영의 이마에 연고를 문질러 발랐다.
“헤헤, 감사합니다.”
배시시 미소를 지은 하영.
그 모습을 보며 노인은 품속에서 물티슈 하나를 꺼냈다.
“손도 많이 더러워진 것 같은데, 이걸로 좀 닦고······.”
이어 물티슈를 하영의 손에 쥐여 주려던 찰나!
찰싹-!
누군가의 손이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동시에 물티슈가 땅에 떨어졌고, 하영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노인은 하영의 손을 낚아챈 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있는 건 어느 중년 여성. 그녀는 꽤 화가 난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상태였다.
“너 여기서 뭐하는 거야!”
뒤이어 공기를 찢는 것처럼 날카로운 외침이 날아들었다.
질책이 가득 담긴 목소리.
갑작스런소란에 길을 지나던 행인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그럼에도 여성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하영을 혼내기에 바빴다.
한편 여성과 눈을 마주한 하영은 이내 놀란 듯 말을 더듬거렸다.
“어, 어머니.”
“하도 안 와서 나와 봤더니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이런 더러운 거나 만지고!”
여성이 리어카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질책에 하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이를 보다 못한 노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도와달라고 해서······.”
“그러다가 손가락이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했어!”
그러나 노인의 말은 여성의 외침에 파묻혔다.
애초에 여성은 노인의 존재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무시했다는 게 옳은 표현이리라.
또 길을 오가는 행인들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하영뿐이었다.
휙-
“이걸로 닦고 빨리 따라와. 강 변호사가 기다리니까.”
고급 손수건을 던지듯 건넨 여성.
그녀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하영을 쳐다보고는 홱 몸을 돌렸다. 이에 하영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은 뒤, 바닥에 떨어진 물티슈를 집어 들었다.
“······죄송합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그 짧은 중얼거림을 끝으로 하영은 골목을 나섰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 여성의 뒤를 쫓아 사라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노인은 이내 리어카를 끌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인적이 없는 곳에 도착한 노인은 돌연 수염을 부욱- 하고 뜯어냈다.
그러자 그의 모습은 점차 젊어지기 시작하더니, 곧 익숙한 얼굴로 변했다.
“후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민호.
그는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방금 전까지 함께 있던 하영을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너는 여전하구나.”
하영은 옛날부터 그랬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임에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쉽게 지나치질 못했다. 그리고 그런 하영의 성격은 커서도 그대로인 것 같았다.
그 사실에 민호는 연신 씨익 웃었다.
이어 민호는 도깨비수염을 품속에 넣으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웃기지 마.”
이렇게 착하디착한 아이가 재앙으로 변한다고?
민호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를 악물며 결의했다.
“내가 구해줄게.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하영을 구해내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주인님, 주인님.”
그때 잠자코 있던 율이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그 아줌마, 엄청나던데요?”
“그치. 엄청나지.”
민호가 피식 웃었다.
하영의 양모(養母), 한유선.
그녀는 하영에게는 지대한 관심을 보이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민호나 다른 보육원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이 중 하나였다.
그래서 민호는 유선만 보면 늘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 악덕 말이에요.”
“엥? 악덕?”
유선에 대해 생각하던 그때.
난데없이 악덕이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네, 주인님은 못 보셨어요? 거의 마인이 되기 직전까지 치솟았던데요?”
“진짜?”
민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야 놀랄 만도 했다.
봄 무렵에 유선을 본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녀의 악덕은 100을 조금 넘길까 말까한 수치였으니까. 그런데 고작 서너 달 만에 마인이 되기 직전까지 악덕을 쌓았다고?
“이상하다. 사람이라도 죽이지 않은 이상, 그럴 리가 없는데······.”
민호는 의아하다는 듯이 말을 흐렸다.
그러자 율이 다시 말을 건네 왔다.
“그나저나 이제부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뭘?”
“대상 말이에요. 또 쫓아가실 거예요?”
“아니, 이제 됐어.”
민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어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연고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연고를 발라뒀으니까 이걸로 살펴보면 돼.”
분식집에서 하영과 헤어진 직후.
민호는 노인으로 변해 하영과 접촉했다. 이어 하영의 이마에 연고를 바르는 것까지, 전부 그가 세운 계획이었다.
“물론 미래 누나는 다른 목적으로 줬지만······.”
원래는 류화연을 만날 때, 그녀를 관찰하기 위해 받은 연고다.
하지만 사용횟수도 많이 남았으니 좀 써도 상관은 없으리라.
어색하게 웃은 민호는 곧이어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자 화면에 눈 모양의 아이콘이 떠올랐다.
==
[주시자의 눈]이 생성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대상이 보는 광경을 보거나 녹화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시청자: 1명(공민호)
-남은 시청시간: 23분 51초
==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눈 모양의 아이콘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잠시 후, 휴대폰 화면에 동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오, 보인다.”
민호가 화색을 띠었다.
곧이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무슨 말이라도 좀 해.
-계속 그렇게 목석처럼 있지 말고.
-너도 알잖니? 강 변호사가 음악계 쪽에 인맥이 많은 거.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눈도장 찍어둬야지. 알겠니?
한유선의 목소리였다.
뒤이어 화면이 위 아래로 흔들렸다. 아마 하영이 고개를 끄덕거린 것이리라.
“확실히 이게 있으면 관찰하기 편하겠네요.”
민호와 함께 화면을 보던 율이 화색을 띠었다.
하지만 화면 하단에 표기된 시청시간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시간이 좀 아쉽긴 하네요. 고작 30분으로 뭘 알아낼 수 있을지······.”
부정적인 중얼거림에 민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외로 많은 걸 얻을 수도 있어.”
“네? 어떻게요?”
“방금 아주머니가 하신 말씀 못 들었어?”
“어, 무슨 말을 했었죠?”
율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에 한숨을 내쉰 민호는 입을 열어 대답했다.
“강 변호사를 만난다고 했잖아.”
“아, 맞아요! 그랬었죠.”
민호의 말에 율은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이 방긋 웃었다.
“어, 잠깐만요.”
강 변호사.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호칭이다.
잠시 후, 뭔가를 떠올린 율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설마 그 강 변호사라는 사람이······.”
“그래, 강태진이야.”
담담하게 중얼거린 민호.
그는 이곳에 오기 전, 분식집에서 하영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