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Chapter 44. 5성급 임무 (2)
==
*난이도: ★★★★★
*임무: 대상을 토벌하라
*대상:
-00년 3월 2일생
-해시(亥時)에 태어난 민하영
*내용: 대상은 제 1급 위험종으로 분류되었다. 천계 시스템이 예측한 마감 시간을 넘기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 판단. 이에 따라 즉각 토벌을 명한다.
단, 불과 반년 전까진 선인이었던 점. 그리고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인해 이런 꼴이 되었다는 점을 참작하여 대상을 구원할 수 있는 기적을 베푼다.
이에 대한 선택은 신의 대리인들에게 맡긴다.
*마감: 4일 23시간 47분
(해당 임무는 협동임무입니다.)
==
하지만.
뒤이어진 임무창은 희망은커녕 절망만 안겨줬다.
‘대상을 토벌하라.’
그 한 마디에 민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전달자님께선 대상을 구할 수도, 혹은 토벌자들에게 협력해서 대상을 토벌할 수도 있어요. 또 다른 특이사항으로는······.]
비단은 민호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설명을 계속했다.
그렇게 비단의 설명이 거의 끝나갈 때쯤.
휘청-
민호는 몸을 비틀거렸다.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일어난 탓이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민호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고는 떨리는 눈빛으로 다시 임무창을 응시했다. 그러나 임무창에는 ‘민하영을 토벌하라.’라는 문장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어째서.”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지만 그의 의문에 답해줄 이는 없었다. 민호는 재차 임무창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는 입술을 거칠게 깨물었다.
“감히······.”
으득-!
그의 이빨이 입술을 짓이겼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붉은 피가 꽃처럼 피어났다.
“감히 누구 맘대로······.”
민호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민하영. 그녀가 누구인가?
민호에게 있어선 누구보다 소중한 가족이다.
게다가 그녀는 평소에도 벌레 한 마리 쉽게 죽이지 못할 성격이었다.
스스로가 상처 받을까봐,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까봐 외로워하면서도 다른 이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여린 아이. 그러면서도 마음씨가 곱고 착한 아이.
그런데 그런 아이를 토벌하라고?
“······누구 맘대로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민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저, 전달자님?]
갑작스런 민호의 반응에 비단이 깜짝 놀라 외쳤다.
하지만 민호는 그녀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분노의 빛이 맺힌 눈으로 임무창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나란히 떠있는 두 개의 5성급 임무.
‘민하영을 구원하라.’
‘민하영을 토벌하라.’
두 임무 중에서.
민호가 선택할 임무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러던 그때.
우우웅-
휴대폰이 거칠게 진동했다.
-민호야. 너도 임무 받았지?
미래에게서 도착한 문자.
민호는 뭐라고 답장을 보내야할까 잠시 망설였다.
그때 다시 미래의 문자가 이어졌다.
-알다시피 이번 임무는 좀 큰 건이야.
-그래서 다들 지금 카페에 모여 있거든?
-너도 괜찮으면 잠깐 올 수 있니?
답장은 보낼 필요가 없었다.
민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곧장 방을 나섰다.
***
5성급 임무가 하달된 직후.
카페 브란델에 모인 신의 대리인은 모두 다섯이었다.
창식과 관련된 일로 충격을 받아 집에서 쉬고 있는 진하를 제외한다면 모두 모인 셈이다.
달그락-
주방에서 나온 미옥이 일행의 앞에 음료를 내려놨다. 미래의 곁에 앉은 그녀는 주름진 미간을 찌푸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그 말이 딱이네.”
“그러게 말이에요. 에휴.”
미래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이 좋지 않은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같았다면 무표정하게 고개만 끄덕였을 혜진도 얼굴이 영 어두웠다.
“하필 이안이 귀국한 직후에 이런 일이······.”
“그니까. 원래 이런 임무는 영국 같은 곳에서나 받았어야 되는데.”
미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혜진의 옆에 앉아있던 혜성이 불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 미래 누나.”
“응?”
“이거 저희가 할 수 있을까요? 5성급 임무는 처음 보는 거라서······.”
“괜찮아. 나도 몇 번 해봤는데 죽을 정도로 힘들진 않아.”
미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혜성이 안도하는 표정을 짓자, 미래는 돌연 음침한 웃음소리와 함께 말을 덧붙였다.
“흐흐,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악!”
철썩!
그때 미옥이 미래의 등을 후려갈겼다.
“우리 손자 겁주지 마.”
“으으, 말로 해요, 말로.”
미래가 울상을 지었다.
다시 혜성을 돌아본 그녀는 이내 말을 정정했다.
“너무 걱정 마. 천계도 생각이 있으니까 이런 걸 줬겠지.”
“그래도······.”
“협회 본부에도 협조를 요청해뒀거든. 늦어도 사흘 뒤에는 도착할 거야.”
이어진 미래의 말에 혜성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혜진도 비슷한 얼굴이었다.
“사부, 협회에서 지원을 해준다고 했나요?”
“응. 이안이 잘 설득해준 모양이야.”
미래가 씨익 웃었다.
지원군이 온다는 말에 둘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미래는 더욱 힘을 북돋아줄 요량으로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외쳤다.
“또 여기 짱쎈 2급 토벌자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
그런데 이번엔 분위기가 영 싸했다.
여기저기서 미덥지 않은 눈빛이 돌아오자 미래는 머쓱한 듯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아무튼 결론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거야.”
미래는 목이 타는지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민호야?”
돌연 미래의 시선이 구석에 있는 민호에게로 향했다.
그 말에 다른 일행들도 일제히 민호를 쳐다봤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잔뜩 굳은 얼굴.
이어 조금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보였다.
평소와 사뭇 달라보이는 모습에 미래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안색이 안 좋은데?”
“아뇨. 임무 때문에 좀······.”
민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모습에 미래는 짧게 한숨을 쉰 뒤,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긴장하는 것도 이해해.”
위로가 담긴 토닥거림과 함께.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영국 협회에 협력을 요청해뒀어. 2급 토벌자 둘이랑 3급 토벌자 다섯을 보내준다고 했으니 전력으로는 차고 넘치는 정도지.”
꿈틀-
지원군이 오는 건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지원군이 모두 토벌자라는 말에 민호의 눈썹이 씰룩였다.
한편 민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래는 그를 격려하기 위해 연신 말을 이어나갔다.
“또 마감까진 조금 시간이 남았잖아? 협회에서 온 지원군과 힘을 합치면 이번 토벌 임무는 분명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거야.”
미래의 입술을 비집고.
‘토벌 임무’라는 대답이 선명히 들려왔다.
이는 곧 그녀가 이번 임무를 토벌 임무로 선택할 거란 소리와도 같았다. 이를 깨달은 민호는 별안간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떡-
“미, 민호 형?”
“선배?”
갑작스런 돌발행동에 혜성과 혜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민호의 시선은 둘에게 가 있지 않았다.
“······누나.”
미래를 빤히 쳐다본 민호.
잠시 심호흡을 한 그는 이내 마음을 먹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 임무에 대해서 상담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
다음날. 오전 11시.
잠에서 깬 민호는 외출 준비를 했다.
오늘은 하영과 만나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셔츠와 청바지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민호는 집을 나섰다. 후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그의 머릿속은 온통 5성급 임무와 관련된 일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 멀리 후문이 보였다. 민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임무에 대해 생각하는 건 좋지만, 지금은 할 때가 아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하영에게 괜한 걱정이 들게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후우.”
짧은 한숨과 함께 마음을 다잡은 민호.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일단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응?”
민호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맺혔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후문 부근. 민호는 거기서 한 가지 위화감을 느꼈다.
“무슨 사람이 저렇게······.”
평소 후문 부근에는 학생들의 왕래가 없는 편이었다. 교수들의 연구실이 밀집해있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방학 중이었다. 사람이 없어야 정상이었지만 지금 후문 부근은 인파로 북적였다. 민호가 멍하니 이를 바라보던 그때, 인파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하영의 목소리.
신기한 건 그녀의 음성이 들리기가 무섭게, 인파를 이루던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민호에게 가 꽂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호는 그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어?”
민호에게서 얼빠진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하영의 모습을 본 직후였다.
한편 민호를 발견한 하영은 한달음에 그에게 다가왔다.
“와, 엄청 오랜만이에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반가움이 깃든 목소리.
이에 정신을 차린 민호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나야 뭐 늘 똑같지.”
그의 대답을 끝으로 둘은 간단한 안부와 근황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후문을 지나 동석 삼촌이 하는 떡볶이 집으로 향하는 길. 하영은 아직도 후문 부근을 배회하는 인파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방학인데 사람이 엄청 많네요? 원래도 이렇게 많았나?”
“······.”
의아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하영을 보면서 민호는 입을 꾹 닫았다.
방학임에도 후문에 인파가 몰린 이유.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하영 때문이었다.
‘못 본지 고작 한 달 정도 지났는데······.’
민호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몇 년도 아니고, 고작 한 달 조금 넘게 못 봤을 뿐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하영은 이전에 그가 알던 하영과 전혀 딴판이었다. 키도 조금 커진 것 같고, 피부는 더욱 곱고 새하얗게 변했다.
제일 많이 바뀐 건 얼굴과 분위기.
예전에도 예쁜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연예인이나 모델 뺨칠 정도로 미모에 물이 올랐다. 또 이전에는 청초한 매력을 은은하게 뿜어냈다면, 지금은 화사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 주변이 밝아져 보일 정도로.
지금도 실제로 길을 지나는 이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한 번쯤은 하영을 돌아봤다.
‘대체 어떻게······.’
영상통화를 할 때는 몰랐다.
잡지에 나온 사진을 볼 때에도 전혀 몰랐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아우라가 나오는 것 같았다.
마치 완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 낯선 분위기에 민호가 당황해하던 그때, 별안간 하영이 입을 열었다.
“아참, 오빠.”
“어, 으응?”
“그런데 지은이는요?”
“지은이?”
“네, 같이 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일이 조금 틀어졌다.
민호는 오늘 아침, 지은이 보낸 문자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조금 늦는대. 오전에 인터뷰가 잡혔다고 했나? 그러더라고.”
“아하. 오늘 오긴 오는 거죠?”
“응. 장소 알려줬으니까 알아서 올 거야. 그보다······.”
대답을 마친 민호가 하영을 빤히 쳐다봤다.
그는 멋쩍은 얼굴로 뺨을 긁적인 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한 달 사이에 꽤 많이 달라진 것 같네?”
“네? 제가요?”
“응. 전체적으로 분위기도 그렇고 좀 달라 보여서.”
“그래요? 이상하다. 전 그냥 똑같은 것 같은데······.”
하영이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스스로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정말로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입을 닫은 민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