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Chapter 43. 맹창식 (4)
“군자역 인근에 신의 대리인이 셋 있군. 둘은 기운이 미약한 걸로 봐서 신참, 하나는 강대한 걸로 봐서 꽤 높은 등급의 신의 대리인이겠어. 다음으론 면목역 부근에 하나가 또 있고. 그 다음에는······.”
창식의 말이 이어질수록 민호의 얼굴에선 핏기가 가셨다.
군자역에 있는 셋은 혜진과 혜성, 미옥을 말하는 것이고 면목역에 있는 이는 메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메리는 오늘 면목 인근에서 임무를 수행한다고 말했었으니까.
이어 창식은 병원에 입원 중인 스미스의 위치까지 완벽히 맞췄다.
그 가공할만한 능력에 미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마인한테 있어서 최고로 좋은 능력이네.”
“엥? 어째서요?”
“그야 그렇잖아? 신의 대리인들의 위치를 알면, 그곳만 피해 다니면 되는 거 아냐?”
“아······.”
민호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래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나를 알아본 것도 능력을 통해서야?”
“뭐 그런 셈이지.”
“하지만 오늘은 그렇다 쳐도, 다른 두 개는 설명이 안 되는데요?”
그때 이안이 이의를 제기했다.
창식은 자신이 이곳에 올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안 것은 오늘도, 어제도 아니라 훨씬 전부터였다. 능력만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정보였다.
그 의문에 창식은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순순히 대답했다.
“간단해. 들었거든.”
“누구한테서 말입니까?”
“보스에게서.”
“보스라면······.”
창식이 보스라고 부를만한 이가 얼마나 있을까?
거기에 대해 생각하던 찰나, 창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백야의 보스. ‘류화연’이라는 이름을 쓰는 자.”
“좋아요, 아저씨. 이제 거기에 대해서 자세히 좀 듣고 싶은데요.”
류화연이라는 이름이 나오기가 무섭게.
미래가 두 눈을 마구 빛냈다.
남유석에게서도 류화연에 대한 정보는 얼마 캐내지 못했다. 하지만 창식이라면 남유석보단 자세히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미래는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눈빛으로 창식을 응시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돌아온 대답은 미래가 기대하던 게 아니었다.
“애석하지만 나도 잘 몰라. 직접 만난 적이 한 번 밖에 없어서.”
“칫!”
미래가 혀를 낮게 찼다.
순순히 포기하는 모습에 창식의 말이 진실임을 알았다.
“그보다는 내가 이렇게 정보를 술술 털어놓는 게 더 궁금하진 않나?”
그러던 중 이번엔 창식이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보면 가장 궁금한 것이기도 했다. <백야>에 몸담았던 그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협력적으로 나오는지. 그 말에 제임스가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그것도 물으면 대답해줄 건가?”
“못할 것도 없지.”
창식이 픽 웃었다.
머리를 긁적거린 그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잠시 후, 창식은 어딘가 아련한 눈빛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약속이었다.”
“약속?”
“그래. 류화연과의 약속.”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만큼 궁금한 주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 문제를 해결해주는 대신 약속 하나를 했다. 자유롭게 살다가 언젠가 자신이 부탁을 하나 하면 들어달라는 것이었지. 당시 난 딸의 안전을 확보하는데 정신이 팔렸던 터라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승낙했고.”
“그럼 아저씨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게, 류화연의 부탁이었단 거야?”
“그래.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너희에게 말해주라는 것도 류화연의 부탁 중 하나였다.”
이어진 창식의 말에 미래가 다시 얼굴을 구겼다.
창식의 말은 이번에도 역시나 진실이었기에.
“아니, 대체 왜 그런 부탁을······.”
“그야 나도 모르지. 난 그저 그렇게 약속했을 뿐이니까.”
류화연은 이유까지 말하진 않았다.
이에 더더욱 의구심이 들던 찰나, 창식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만 추측 가는 것 정도는 있다.”
“추측?”
“그게 뭔가요?”
민호가 궁금하다는 듯이 질문하자 창식은 풀썩 웃었다.
“류화연이 만든 무대에서 난 이만 퇴장해야할 사람이라는 거지.”
어딘가 후련한 미소였다.
그러자 잠자코 듣고 있던 미래가 입을 열었다.
“혹시 아저씨가 지금 말한 게······.”
뭔가 촉이 온 얼굴.
미래는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웃기지도 않는 ‘대의’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거야?”
류화연이 만든 무대라는 말을 듣자 문득 대의라는 것이 떠올랐다.
유석에게서 들었던 류화연의 대의.
거기에 대해서 묻자 창식은 담담히 대답을 이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건 그저 내 추측에 불과하니.”
어깨를 으쓱거린 창식.
이어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창식은 잠시 말을 흐렸다.
미래에게로 향한 그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류화연이 품은 각오도 모르면서 그 녀석의 대의를 비웃지 마라.”
일순간이지만 창식은 사나운 기백을 내뿜었다.
그 압도적인 기백에 민호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킬 무렵.
미래가 미간을 찌푸렸다.
“흥, 그래봐야 마인이지.”
이어 그녀는 입가를 뒤틀며 웃었다.
“난 마인이란 놈들을 신뢰할 수 없거든. 아저씨도 마인에 가까운 사람이고.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난 앞으로도 맘껏 비웃을 거야. 한낱 마인주제에 어디서······.”
창식의 코앞까지 얼굴을 가져간 미래가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창식은 풀썩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할 수도 있겠군.”
“뭐?”
“진실을 알게 되면 너 역시, 다른 신의 대리인들처럼 변절자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미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창식의 말은 마치 믿었던 동료들이 배신한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기에 미래는 곧장 질문을 던졌다.
“그 말은 아저씨는 그 진실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소리야?”
“난 모른다.”
하지만 미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식이 칼처럼 대답했다.
“여기 오기 전에 기억을 지웠거든.”
“······아, 짜증나죽겠네.”
미래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역시 진실인 모양이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창식은 그런 미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궁금증은 이걸로 다 풀렸나?”
“아니. 전혀.”
이번엔 미래가 칼같이 대답했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허리를 굽혀 창식과 눈을 마주했다.
“아저씨가 아까 말했지? 우리한테 찾아가라고 말한 것도, 또 정보를 말해주라고 말한 것도 전부 류화연이 시킨 일이라고?”
미래의 질문에 창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래는 입가를 뒤틀어 올리며 히죽 웃었다.
“그럼 아저씨가 알고 있는 정보, 밑바닥까지 전부 싹싹 긁어서 받아갈게.”
미래가 먹잇감을 앞에 둔 고양이처럼 눈을 빛냈다.
***
해가 뉘엿뉘엿 지고 어느덧 밤이 찾아왔다.
환한 가로등이 거리를 밝게 비추자 건물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는 직장인들처럼 보였다. 각자 돌아갈 곳으로 분주히 발걸음을 옮기는 광경은 흡사 개미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옥상에서 이런 광경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이제 십대 후반 정도나 되었을까?
등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을 위로 질끈 올려 묶은 소녀. 투명할 정도로 창백한 피부와 텅 비어있는 눈동자를 가진 소녀는 아무 말 없이 거리를 내려다봤다.
“······.”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든 채.
소녀는 그저 멍하니 그렇게 서있었다.
끼익-
그러던 중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옥상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걸어왔다. 무테안경을 쓴 40대 중반의 남성. 정장을 말끔하게 갖춰 입은 그는 소녀가 있는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보스.”
남성은 답지 않게 공손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
그러고는 아기자기한 동물 캐릭터가 수놓아진 담요를 소녀의 어깨 위로 둘렀다.
“날씨가 춥습니다.”
“응, 고마워.”
무채색에 가까웠던 눈동자에 옅은 온기가 맺혔다.
이어진 소녀의 미소에 남성, 신창우는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켰다.
소녀는 이후로도 한동안 입을 닫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궁금할 법도 했지만 입을 닫고 있는 건 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로부터 십여 분 후.
굳게 닫혀있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맹창식은 도착했겠지?”
“예, 아까 전에 확인했습니다.”
소녀, 류화연의 중얼거림에 창우는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류화연은 다시 입을 닫았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때 창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류화연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하자, 창우는 재차 말을 이었다.
“[범]은 아직 충분히 활용가치가······.”
“편리한 도구도 상황에 따라선 우리를 위협할 흉기로 변할 수 있어.”
창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류화연은 딱 잘라 대답했다. 그 단호한 목소리에 창우는 입을 닫았다.
잠시 후, 생각을 정리하던 창우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제거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비수처럼 날카로운 말투로.
창우는 [범]의 제거를 제안했다. 하지만 류화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시간이 보름, 아니 일주일만 늦었어도 제거하는 게 나았겠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해.”
밤바람이 차가워서 일까?
류화연은 담요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오히려 지금 보내주는 게 우리를 위해서도, 맹창식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었어.”
“알겠습니다. 보스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고개를 끄덕거린 창우가 말을 흐렸다.
그 대답을 끝으로 맹창식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였다.
끼이익- 쾅!
옥상 문이 요란스럽게 열렸다가 곧장 닫혔다.
창우가 몸을 돌렸다. 그곳엔 호리호리한 체구의 한 여성이 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는 이십대 후반의 여성. 다소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와 류화연에게 고개를 넙죽 숙였다.
“대장.”
그녀의 인사에 류화연이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여성은 그녀에게 다이어리 하나를 내밀었다.
“오늘 기록한 내용입니다.”
“고마워. 잘 볼게.”
류화연이 싱긋 웃었다. 창우를 대할 때와 비슷한 미소였다.
한편 창우는 못마땅한 얼굴로 여성을 바라봤다.
“문자로 보내면 되지, 왜 여기까지 왔지?”
“근처라서 잠깐 들른 것뿐이야. 신경 끄쇼, 아저씨.”
창우의 말에 주효진이 손을 휙휙 내저었다.
파리를 내쫓듯이 귀찮아 보이는 손짓에 창우는 발끈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봤다. 하지만 효진은 창우의 시선마저 무시한 채, 류화연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 보스.”
머뭇거리는 태도와 함께.
효진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근데 강태진은 언제까지 감시해야 돼요?”
그녀의 말에 류화연은 말없이 효진의 얼굴을 쳐다봤다. 싫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 이에 류화연은 낮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후후, 마음에 안 드는 얼굴이구나.”
“당연하죠. 그 미친 사이코 새끼, 분명 제가 감시하는 거 뻔히 알고 있을 텐데 일부러 방치하는 거잖아요. 무엇보다 걔가 갑자기 빡이 돌아서 미쳐 날뛰면 제가 막을 수도 없고······.”
류화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효진은 그간 품었던 불만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잠자코 이를 듣던 창우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에 얻은 귀물을 쓰면 버틸 순 있지 않나?”
“말 그대로 버틸 순 있지. 한 1분 남짓? 그 다음엔 끔살 당하는 거고.”
효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시 후,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전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제가 굳이 강태진을 감시할 필요가 있는지, 그리고 대장이 강태진을 방치하는 것도 이해가······.”
그 말에 류화연은 난간에서 옥상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곧장 팔을 뻗어 효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시에 입을 열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