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Chapter 43. 맹창식 (1)
해가 중천에 뜬 대낮.
눈을 뜨자마자 들려온 건 비단의 목소리였다.
[임무가 완료된 걸 확인했습니다.]
“어······.”
민호가 자다 깬 얼굴로 중얼거렸다.
동시에 비단의 외침이 들려왔다.
[축하드려요, 전달자님!]
[이제 임무도 능숙해지셨네요!]
갑작스런 칭찬에 민호는 정신을 차렸다.
“뭐, 그동안 많이 했으니까.”
민호가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자 비단은 연신 흥분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또 그것도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벌써 저승사자님과 임무를 수행하신 거요!]
“엥?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야?”
민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음과 동시에.
열성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요!]
비단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저승사자와 함께 하는 임무는 꽤 희소성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또 저승사자라는 자들은 원체 까다로운 이들이 많아, 일반적인 신의 대리인과는 임무를 하지 않기도 했고.
[그래서 보통은 그쪽에서 선택을 하는 편이에요.]
[함께 임무를 진행할 신의 대리인을요!]
이어진 비단의 말에 민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 말인즉슨, 현암이 민호를 골랐단 소리가 아닌가? 그 사실에 민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무튼 이번 건은 정말 이례적인 경우라구요.]
[그것도 무려 영(永)급 저승사자님이랑 함께 하셨잖아요!]
[사정을 모르는 선녀들한테 말하면 아무도 안 믿을 걸요?]
흥분을 쉽사리 가라앉히지 못하는 목소리.
민호는 의아함이 깃든 얼굴로 말을 걸었다.
“비단아.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민호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영급이라는 게 꽤 높은 등급인거야?”
그 질문이 끝나자마자.
[그럼요!]
비단이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그녀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승에는 아흔아홉 개의 등급이 있어요.]
[그 중에서도 무려 다섯 번째로 높은 등급이라구요!]
이번엔 민호가 놀랄 차례였다.
아흔아홉 개의 등급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 중에서 다섯 번째로 높다면 무려 상위 5퍼센트 안에 속하는 엘리트가 아닌가!
이어지는 비단의 부연설명에 민호가 연신 감탄을 터뜨리던 그때.
“저기, 선녀님. 죄송한데 그 얘기 하려고 온 거예요?”
창틀에 기대어있던 율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말을 이어나갔다.
“뭔가 전할 말이 있으신 걸로 아는데요.”
[아참, 내 정신 좀 봐.]
[임무 완료 보상을 드리러 왔었죠.]
[잠깐 까먹고 있었어요. 헤헤.]
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단은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일단 고유능력의 발동부터 허가할게요!]
==
[흡수(吸收) 발동]
-기적: ‘신령한 푸른 장미 봉오리’를 일부 흡수합니다.
-새로운 능력을 획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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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민호의 양손이 환하게 빛났다.
잠시 후, 그의 손에 나타난 건 새하얀 양초 하나.
평범해 보이는 양초였지만 그 능력은 비범할 것을 알았기에 민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곧 양초의 효능이 눈앞에 떠올랐다.
==
[간절한 기원의 양초]
*사용횟수: 1/1
*양초에 불을 붙이면 소원이 이루어질 지도 모른다.
*명령어: ‘네 소원은 내가 들어줄게.’
*타인의 소원을 함께 빌어, 소원이 이루어지게 돕는다.
*소원 성공률: 50%
*조건:
1) 마인(魔人)을 위한 소원은 빌 수 없다.
2) 선인(善人)을 위한 소원은 빌 수 없다.
3) 스스로의 소원은 빌 수 없다.
(+더 보기)
*단, 조건 미 충족 상태에서 사용 시, 양초는 사라진다.
*소원을 이루지 못할 때도 양초는 사라진다.
==
“······이게 뭐야?”
민호가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50퍼센트의 확률로 소원을 이루어주는 양초.
얼핏 보면 여기까진 괜찮았다.
절반의 확률이라곤 해도 어떤 소원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기적인 능력이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소원을 비는데 필요한 조건.
일단 스스로를 위한 소원은 빌 수 없었다. 거기에 추가 조건이 또 있었다.
“마인도, 선인도 아니라니. 그럼 일반인을 위해서 소원을 빌라는 건가?”
민호가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던 그때였다.
“주인님! 여기 주의사항이 더 있어요!”
어느새 민호의 곁으로 날아온 율이 중간에 있는 더보기 버튼을 가리켰다.
“혹시 조건이 더 있는 건······.”
민호가 설마 하는 얼굴로 말을 흐렸다.
그리고 그의 중얼거림은 곧 현실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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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향이 극선, 상선, 중선, 소선인 자는 제외.
-성향이 극악, 상악, 중악, 소악인 자는 제외.
==
“······.”
멍한 표정을 지은 민호.
잠시 후, 그의 입술을 비집고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그러니까······.”
평정을 회복한 민호는 양초를 사용하기 위한 조건을 정리해봤다.
그 결과, 말도 안 되는 조건이 도출됐다.
“마인도, 선인도 아니면서 성향이 중립인 사람한테만 쓸 수 있다고?”
“그, 그런 것 같네요.”
지켜보던 율도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렸다.
“······이걸 과연 쓸 일이 있을까?”
민호가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그때.
우우웅-
의자 위에 올려뒀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미래에게서 온 문자였다.
[미래]: 민호야.
[미래]: 잠깐 시간 되니?
문자의 내용은 시간이 되면 카페 브란델로 잠깐 오라는 거였다.
갑작스런 호출에 민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
문자의 뒷부분을 본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민호는 황급히 옷을 입었다.
이어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뒤, 서둘러 집을 나섰다.
***
덜컹, 덜컹!
-이번 역은 군자, 군자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역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민호의 발은 지면을 박찼다.
그가 서두르는 건 이유가 있었다.
호출 문자의 마지막에 이런 내용의 문자가 있었던 탓이었다.
[미래]: 진하한테 전부 얘기했어.
[미래]: 그리고 이야기를 대강 들었거든?
[미래]: 그러니까 다 같이 모여서 얘기를 나눠봤으면 해.
미래가 진하에게 한 이야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현 상황에서 그녀가 진하에게 할 이야기라는 건 오직 한 가지뿐이었으니까.
딸랑-
작은 종소리와 함께 카페 브란델의 문이 열렸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은 미래. 그리고 그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진하였다.
이를 본 민호는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누나, 저 왔어요.”
“응. 거기 잠깐만 앉아있어. 이안도 곧 온다고 하니까.”
차분히 가라앉은 말투.
평소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민호는 주뼛거리며 진하의 옆에 앉았다.
한 시간 같은 십여 분이 지난 뒤.
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낯이 익은 얼굴과 함께였다.
“안녕하십니까.”
제임스였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진하를 힐끗거리며 쳐다봤다.
그때 이안이 인사를 건넸다.
“제임스도 함께 왔습니다. 괜찮겠죠?”
“이미 와버린 걸 뭐. 그럼 관계자는 다 모였나?”
미래가 주변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민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했다.
“어? 메리는요? 그리고 혜진이랑 혜성이는······.”
아직 자리에 없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자 이안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누님은 임무 때문에 자리를 비웠습니다.”
“혜성이는 학원 갔다. 그리고 혜진이는······.”
“보충수업이 있다고 했던가? 뭐 그랬어.”
뒤이어 미옥과 미래가 민호의 궁금증을 해결해줬다. 미래는 눈앞에 놓인 포도주스를 홀짝거리며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뭣보다 걔들은 몰라도 돼. 이쪽과 관계가 없으니까.”
다소 차가운 말투였지만 그녀의 말은 정론이었다. 메리를 포함한 세 명의 동료들은 맹창식과 조금도 관계가 없었기에.
“아무튼 모일 사람은 다 모인 것 같으니······.”
미래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다시 이야기를 들어볼까?”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네 쌍의 눈동자가 한 곳으로 향했다. 진하가 있는 곳이었다.
잠시 후, 진하가 제일 내뱉은 말은 무거운 한숨소리였다.
“후우우.”
“한숨만 쉬지 말고 빨리 말해. 아니면 내가 한다?”
미래의 재촉에 진하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고개를 든 그는 착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내가 부주의한 탓에 일이 이렇게까지······.”
“미스터 강.”
그때 이안이 진하의 말을 끊었다.
“일단 이것부터 묻고 가겠습니다.”
이안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에 깃든 분노만큼은 감출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까? 모르고 있었습니까?”
이안의 질문과 동시에.
장미가시처럼 날카로운 기세가 피부를 찔렀다. 제임스도 마찬가지였다. 매섭게 눈을 뜬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진하를 노려봤다. 만약 허튼 대답이 나올 경우, 상당한 조치를 취할 기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은 하마터면 오랜 친구를 잃을 뻔했으니까.
긴장감이 맴도는 카페 내에서.
진하의 입술이 달싹였다.
“몰랐다. 전혀, 전혀 몰랐어.”
진하는 괴로운 듯이 머리를 감싸 안았다.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두 토벌자는 진하 대신, 미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진하의 대답이 진실이냐는 듯이 묻는 모양새였다.
“진하 말은 거짓이 아냐. 그건 이미 확인했으니까 안심해도 좋아.”
미래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페 안을 메우던 날카로운 공기가 단번에 사라졌다.
“실례했습니다, 미스터 강. 무례를 용서하시길.”
“미안하다.”
이안과 제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미래는 한 차례 박수를 쳤다.
짝-!
“용무가 끝났으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게. 괜찮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뒤.
미래는 민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민호야.”
“네?”
“혹시 그 돼지새끼가 했던 말 기억나? 맹창식이 경찰을 그만두고 마인들, 아니 <백야>에 힘을 빌려주게 된 이유 말이야.”
그 질문에 민호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분명 딸에게 닥친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맞아. 그랬지. 우리 민호, 기억력이 좋네.”
미래가 싱긋 웃었다.
이어 그녀는 진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부분부터 설명을 해줬으면 해. 난 대충 들어서 알지만 얘들은 모르니까.”
“······알겠다.”
진하가 어둡게 물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시 고개를 숙인 그는 눈을 감은 채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일행은 잠자코 진하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진하의 입술이 달싹였다.
“예전에 반장님이 잡아 처넣은 놈 중에 이런 놈이 있다.”
스윽-
진하는 품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에 찍힌 이는 가죽잠바를 입은 험상궂은 인상의 남성. 사십대 초중반처럼 보이는 그는 얼굴 한 귀퉁이에 시커먼 문신을 하고 있었다.
“생긴 게······.”
“딱 봐도 조폭 양아치 새끼처럼 생겼네.”
미래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진하는 그 말이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녀석의 이름은 서지혁. 서울 서남부 일대에서 활동하는 신나라파의 보스다.”
쉽게 말해서 그냥 조폭 두목이라는 소리였다.
진하는 목이 타는지 시원한 얼음물로 목을 축였다. 그러고는 다시 옛날이야기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