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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전해드립니다-150화 (150/182)

150화

Chapter 42. 모정(母情) (3)

다시 등장한 정수는 제법 나이를 먹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고등학교를 졸업한 정수.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에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에게 돈을 다 갚지 못했기에 정수는 공장에 들어가 돈을 벌었다.

그러던 차에 영장이 날아왔다.

원래는 입대를 좀 미루려고 했다. 홀어머니를 부양하고 있었기에 자격은 충분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군대는 될 수 있는 한 일찍 다녀오라는 모친의 말에, 정수는 스물한 살에 군에 입대했다.

군 생활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스물두 살이 되던 해, 사고가 터졌다. 보초를 서던 중, 평소 정수를 고깝게 보던 소대장이 시비를 걸어온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대장의 총에서 실탄이 격발됐고, 곧 정수의 머리에 박혔다.

-소대장님! 일단 의무대에 연락부터······!

-멈춰, 이 새끼야!

-예? 하, 하지만······.

-지금 의무대에 가면 뭐라고 할 건데? 너랑 나 둘 다 영창 가, 인마!

-그래도 이대로 두면······.

-너 빨간 줄 그여서 살고 싶어? 엉? 아니면 입 닥치고 내 말대로 해!

소대장은 사건을 조용히 묻으려 했다.

그러나 다행히 주변을 지나던 다른 간부가 정수를 발견하고는 곧장 병원으로 옮겼다. 만약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뇌사는 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우리 아들은 절대 자살 시도할 애가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다음 주에 휴가 나온다며 좋아하던 애였는데······. 흐윽!

군에서는 정수의 사고를 자살시도라고 발표했다.

비록 성실하게 군 생활을 했어도, 불우한 가정환경이라는 말로 변명이 가능했다.

다행히 어느 시민단체에서 나서주면서 군을 상대로 소송을 벌인 덕분에 병원비까진 마련할 수 있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정우가 깨어나진 않았다.

그리고 사실 정우는 다소 특별한 케이스에 속했다.

뇌사에 빠졌지만, 정신은 말짱했던 것. 몸을 움직이고 말할 순 없어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건 가능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하유, 너무 안타깝네요.

-그러게. 좀만 더 빨리 왔어도 이렇게는 안 됐을 텐데.

그리고 군에서 나온 사람들이.

-염병, 명줄 한 번 더럽게 질기네.

-야, 심 상병아. 그냥 빨리 좀 죽어주면 안 되냐?

-너 하나 때문에 몇 명이 고생 중인지 알기나 해?

자신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전부 다.

처음에는 분노했다. 극심한 살의가 들끓었다.

전부 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자신에게 닥친 끔찍한 현실에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꿈 속 세계가 어둠으로 물들고, 정수의 의식도 점점 어둡게 변했다.

그렇게 모든 걸 놓아버리려던 찰나!

-정수야.

그를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우리 아들, 이 책 좋아했었지? 엄마가 읽어줄게.

그의 모친, 우수미였다.

-호호, 어렸을 때 읽어주고 처음이라 좀 어색하다.

우수미는 매일 정수를 찾아왔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정수의 곁에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의사와 간호사들마저 부정적인 말을 쏟아낼 때에도.

오직 그녀만큼은 정수를 사랑으로 보듬어줬다.

그때부터였다. 그의 세상에 가득했던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던 것도.

‘빛이······.’

우수미가 찾아올 때마다, 정우의 세상에 빛줄기가 맺혔다.

우수미에게서 뻗어 나온 빛줄기였다.

그리고 민호는 그것이 무엇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공덕(功德).’

우수미가 지금까지 쌓아온 수많은 공덕.

그 공덕이 지금껏 정우의 세상에 빛이 되어 주었다. 불행의 씨앗이 천계로 돌아가려는 것을 막았다. 그래서 정우는 예정된 수명보다 훨씬 오래 살아왔다.

그런데 절망 속에서 핀 희망의 꽃은, 생각보다 빨리 꺾였다.

-제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다고요?

-······죄송하지만, 길어야 1년입니다. 치료를 받으시면 조금 더 길고요.

우수미에게 시한부 선고가 내려졌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었고 정우는 다시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절망에 빠져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소원을 빌었다.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어머니의 병이 낫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러던 중 우수미의 소원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꿈 속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렇게.

정우의 기억이 끝났다.

“아······.”

민호는 눈을 떴다.

어느새 그는 정우의 몸에서 나와 있었다. 모든 시험이 끝났기 때문이리라.

멍하니 정우를 보던 민호의 눈에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정우가 품었던 감정이 아직까지 가슴에 남아있었던 탓이었다.

“그랬구나. 너는 어미를 위해 소원을 빌었더냐.”

현암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쓰러진 정수를 보듬어 안았다.

“허나 넌 한낱 불행의 씨앗이다. 네 소원은 바람보다 가볍고 연기보다 덧없다. 그래도 네 마음이 갸륵하니 하늘이 어느 정도 들어준 모양이다. 적어도 네 어미의 마지막 순간은 지킬 수 있게 해줬으니까.”

현암의 말이 끝나자, 민호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의사는 우수미가 앞으로 1년 남짓 더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말을 한 시점이 언제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현암은 비교적 담담한 목소리로 충격적인 발언을 읊조렸다.

“이 아이의 어미, 우수미는 사흘 뒤에 죽는다.”

“······!?”

민호의 두 눈에 충격이 깃들었다.

“그렇게 정해진 게다. 만약 자신을 위한 소원을 빌었다면 살 수도 있었지만, 모정(母情)이라는 게 그리 가벼운 게 아니니. 하물며 선인의 모정이라.”

현암이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낮게 찼다.

그러자 민호는 다급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사,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돌아온 건 싸늘한 대답이었다.

“너도 봤지 않느냐? 어미는 이 아이를 위해 그간 쌓아온 모든 공덕을 바쳤다. 그녀 자신을 위해 쓰일 공덕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아.”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이렇게 헤어지는 건, 저는 도무지······.”

“어미가 되어보지 못한 자가 어찌 어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현암이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우리에게 있어선 고작 사흘이겠지만, 어미에게 있어선 무려 사흘일 테지.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니까.”

현암의 시선이 정수에게 가 닿았다.

그의 눈빛이 따스하게 물들던 그때, 요란스러운 천둥소리가 들렸다.

“이제 꿈에서 깨어나려고 하는구나. 나머진 돌아가서 얘기하자꾸나.”

하고 싶은 말은 아직 많았다.

하지만 계속 여기 있을 순 없었기에 민호는 잠자코 현암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순간.

사아아-

한 줄기 바람과 함께.

푸른 장미꽃이 하나둘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

그날 아침.

조용하던 병원은 때 아닌 소란으로 물들었다.

“서, 선생님! 702호 환자가 깨어났어요!”

“뭐? 그 장기 입원 환자?”

“네! 지금 빨리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빨리요!”

간호사의 호들갑과 함께 정우가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이후 곧바로 보호자에게 연락이 갔고, 우수미는 이른 아침부터 병원을 찾았다.

“아이고, 정수야!”

침대에 멀쩡히 앉아 눈을 뜬 정우.

그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수미는 대성통곡을 했다. 한달음에 달려가 정우를 부둥켜안았다. 그러자 무표정하던 정우의 얼굴에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끄흑! 흐으윽!”

정우의 입에서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가슴에 맴돌던 감정이 폭발하듯 터진 탓이었다.

“정우야, 엄마야. 엄마 알아보겠어? 응?”

그 질문에 정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수미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다시 한 번 정우를 부둥켜안았다.

“흐윽! 부처님,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모자의 감동적인 재회에 지켜보던 간호사들이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멀리서 이를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반대편 옥상에 서있던 민호와 현암이었다.

“어르신.”

그때 민호가 돌연 입을 열어 현암을 불렀다.

“왜 부르느냐?”

“우수미 씨는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말하지 않았더냐? 수명이 다 했으니 내가 데려갈 것이라고.”

현암의 대답에 민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 물어본 게 아니라는 것처럼.

잠시 후, 민호는 말을 정정해서 다시 질문을 던졌다.

“공덕을 전부 사용한 자가 어떻게 되는지 까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 걸 알아서 뭐에 쓰려고?”

“그냥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단순히 궁금한 걸 묻는 사람치고 민호의 얼굴은 꽤나 진지해보였다.

이에 현암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다. 금수부터 다시 생을 시작하게 되겠지.”

“동물부터 말입니까?”

“그래. 그래도 부모자식간의 연은 여간 질긴 것이 아니니, 오랜 세월이 지난다면 분명 다시 만나게 될 테다.”

현암의 시선이 저 멀리, 부둥켜안은 모자로 가 닿았다.

“그게 어떠한 형태가 됐던 간에. 반드시.”

***

사흘이란 시간은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났다.

민호는 방 안에서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게 물든 밤하늘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별안간 바깥에서 수박이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민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그곳엔 낯이 익은 얼굴이 있었다.

“네 얘기를 했더니 하도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해서 데려와 봤다.”

현암이 씨익 웃었다.

잠시 후, 그의 뒤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임무 대상이었던 우수미였다.

‘감사합니다. 신령님, 정말 감사합니다.’

형체가 흐릿하게 변한 그녀는 민호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런 상황에 민호가 당황해하자 현암이 설명을 덧붙였다.

“이야기가 길어 질까봐 그냥 신령이라고 둘러댔으니 그렇게 알아두거라.”

이후로도 우수미는 한동안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로부터 얼마 후.

우수미는 밝은 빛 무리로 변해 현암의 손에 들린 호리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현암은 호리병의 뚜껑을 닫고 주둥이 부근을 붉은 끈으로 조였다.

“인사가 끝났다면 이제 가보마.”

갑작스러운 방문만큼이나 빠른 작별이었다.

현암이 몸을 돌린 그때, 민호가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어르신.”

“응?”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시죠. 좋은 걸로 사뒀습니다.”

민호의 말에 현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곁에 있던 수박이가 빽 소리를 질렀다.

-도령! 내가 한 말, 벌써 잊어버린 거야?!

저승사자에게 이승의 음식을 대접하면 공덕을 빼앗긴다.

수박이가 그렇게 경고했음에도 민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무언의 결의에 서린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현암은 흥미가 동한 얼굴로 물었다.

“괜찮겠느냐? 네 공덕을 받아가는 셈이 되는데?”

“예. 저를 위해서 이렇게 와주셨잖습니까?”

“크흠! 그냥 이렇게 가버리면 내가 찝찝할까봐 그런 게다. 흠흠.”

속내를 들켜 당황한 걸까?

현암은 무의미한 헛기침을 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 인간적인 모습에 민호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감사의 의미로 커피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

“큼! 정 그렇다면 한 잔 얻어 마시고 가마.”

현암이 평상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민호는 뜨거운 커피 한잔을 내왔다. 현암은 경건하게 커피를 받아 마셨다. 김이 펄펄 났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커피를 들이켰다.

“······역시 이승의 음식은 따뜻하구나.”

현암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그때 민호가 평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공덕은 많이 가져가셔도 됩니다. 대신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이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암은 대번에 얼굴을 구겼다.

“이놈, 역시 바라는 것이 있으니 이런 짓을······.”

“가져가신 공덕의 절반은 우수미씨를 위해 써주세요.”

“······.”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현암은 입을 꾹 닫았다. 그의 눈빛이 민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잠시 후, 현암은 잔에 남은 커피를 모조리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유는 굳이 묻지 않겠다. 네 녀석 얼굴을 보아하니 대충 알 것 같으니까.”

이어 현암은 꼭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민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현암은 미소를 지었다.

“민호야.”

처음으로 이름으로 불렸다.

민호는 순간 당황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예, 어르신.”

“원래는 말할까 말까 고민했다. 하지만 널 보니 확신이 서는구나.”

“어떤 말씀을······?”

“우선 이걸 받아라.”

현암이 건넨 것은 평범해 보이는 부적이었다.

하지만 그 능력까지 평범하진 않았다.

“날 부르는 부적이다. 그걸 필요로 하는 순간이 올 때, 주저 없이 사용하거라.”

현암의 당부가 끝나기가 무섭게!

쿠르릉-!

별안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어두컴컴하던 밤하늘이 일순간 밝아지는 모습에 현암은 호들갑을 떨었다.

“이크! 이 이상 천기를 누설했다간 내 몸이 성치 않겠다. 충고는 여기까지만 해두자.”

그 말을 끝으로.

현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시 보는 날까지 건강하거라.”

“예, 어르신도 평안하세요.”

작별인사는 길지 않았다.

민호가 고개를 숙이자, 현암은 삽시간에 모습을 감췄다.

홀로 남겨진 민호는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저 아련한 눈빛을 반짝이며, 그의 시선은 연신 밤하늘을 헤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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