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Chapter 41. 폭풍전야 (4)
“이만하면 슬슬 임무를 하러 가도 되겠지?”
“예.”
전후사정을 모두 알았다.
민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아직 듣지 못한 게 있잖아!
별안간 수박이가 소리쳤다.
갑작스런 외침에 민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어떤 거?”
-시험 말이야, 시험! 도령은 그게 궁금한 거 아니었어?
“아.”
깜박 잊고 있었다.
민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수박이는 혀를 낮게 찼다.
-쯧쯧! 나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그러네. 고마워, 알려줘서.”
씨익 웃은 민호가 수박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쭐해진 수박이를 뒤로 하고, 민호는 다시 현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르신, 시험에 대해서는······.”
“나를 따라 오거라.”
현암을 대답 대신 창밖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붉은 곰방대를 입에 문 채, 씨익 웃었다.
“백번 듣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나을 테니.”
***
같은 시각.
그림자 하나가 새카맣게 물든 밤하늘 사이를 가로질렀다.
얼핏 보면 고양이인가 싶겠지만 사람이었다. 특이한 점은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는 것과 한쪽 어깨에 살이 뒤룩뒤룩 찐 남자를 업고 있었다는 것이다.
“큭! 크흑, 으으윽!”
뱃살이 출렁거리는 상처투성이의 남자.
남유석은 연신 울음과 신음을 삼켰다.
“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절대 용서, 용서 못해!”
핏발이 선 눈. 꽉 깨문 입술.
어지간히도 분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차미래, 차미래, 차미래! 으, 으아, 아으으아아아!”
분을 이기지 모한 유석이 다시 한 번 울부짖던 그때.
잠자코 있던 태진이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더 짖어봐라. 이대로 떨어뜨려주마.”
“······.”
그 말에 유석은 입을 꽉 닫았다.
목이 터져라 괴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영 안 좋았다.
그렇게 십여 분 정도가 흐른 뒤.
툭-
태진이 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기거하는 오피스텔의 옥상이었다.
“뭐 이쯤 왔으면 이제 괜찮겠지.”
어깨를 으쓱인 태진은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일순간 불투명한 막이 옥상 전체를 감쌌다가 사라졌다.
“자, 그럼······.”
짧은 중얼거림을 끝으로.
그는 난데없이 유석을 바닥으로 집어던졌다.
“컥!”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는 유석.
그를 바라보며 태진은 천천히 방독면을 벗었다.
“유석아.”
오싹-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일순간 소름이 돋았다.
점점 창백하게 물드는 유석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태진이 다시 말을 걸었다.
“우리 할 이야기가 많지?”
“혀, 형님. 그게 아니라요. 그러니까 그게······. 컥!”
유석은 마저 말을 잇지 못했다. 태진이 그의 멱살을 틀어잡았던 탓이다.
“내가 뭐라고 했어? 조용히 있으라고 했지?”
태진의 눈빛에 섬뜩한 살의가 맺혔다.
그 위협적인 모습에 유석은 뱀을 앞에 둔 개구리처럼 벌벌 떨었다.
“그리고 행복 요양병원에 불을 질렀더라? 설마해서 묻는데, 너 내 수확물 약탈하려고 거기 노린 거냐? 거기에 내가 키우는 거 있는 걸 뻔히 알면서?”
“크헉! 아, 아닙니다. 으허억!”
유석은 오해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태진은 변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퍽!
퍽퍽! 콰직!
태진의 주먹이 무자비하게 날아들었다.
유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머리를 다리 사이에 파묻고 고통에 신음하는 것뿐이었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폭력은 그로부터 삼십여 분이 더 지난 뒤에야 끝이 났다.
“쯧, 선물로 받은 건데 더러워졌잖아.”
피가 잔뜩 묻은 가죽장갑을 바라보며 태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장갑을 벗어던진 그는 발로 유석의 얼굴을 툭툭 건드렸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움찔-!
이렇게까지 맞았는데 아직 본론을 꺼내지도 않았단 말인가?
유석의 얼굴에 공포가 깃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유석은 이를 악문 채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마, 말씀하십시오, 형님.”
덜덜 떠는 그를 바라보며.
태진은 메마른 말투로 말을 걸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불었냐?”
“아, 안 했습니다. 입 꾹 닫고 있었어요. 정말입니다!”
유석이 필사적으로 변명을 내뱉었다.
이에 태진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넌 그 비곗덩어리만 꼬집어도 술술 불 녀석이잖아. 내가 모를 거 같아?”
“그게, 그러니까 그게······.”
유석의 눈알이 마구 흔들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진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유석아.”
담담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른 태진.
그는 유석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친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시간 낭비 말고 빨리 말해. 그래야 내가 커버 쳐주지.”
“네, 네?”
“까놓고 말해서 나랑 백야에서 제일 친한 녀석이 누구냐? 너야. 방금 전에는 순간 빡이 돌아서 주먹이 먼저 나간 거지만, 난 널 제일 아낀다고. 너도 잘 알잖아?”
“혀, 형님······.”
솔직담백한 대답에 유석은 조금 감동한 것처럼 보였다.
“널 탓하려는 게 아냐. 그러니까 얼른 얘기해.”
태진의 목소리가 좀 더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경고에 좀 더 가까웠다.
“보스가 알게 되면 백야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 그건 막아야지. 안 그래?”
“마, 맞습니다. 맞아요. 바로 말하겠습니다!”
낯빛을 창백하게 물들인 유석이 마구 허둥댔다.
그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백야에서 쫓겨나는 것이었기에.
유석은 더듬거리는 말투로 사흘 동안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털어놨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흐음, 한 마디로 요약하면······.”
턱을 매만지던 태진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백야의 목적과 대의, 거기에 맹창식까지 전부 불었단 소리지?”
“네넵! 하지만 그래도 영감 능력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왜냐면 그 타이밍에 내가 등장했으니까.”
“맞습니다! 형님이 아니었다면 정말 어떻게 됐을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유석이 해실거리며 웃었다.
태진은 그런 유석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너도 너지만 차미래도 참 얼빵하다.”
“예?”
“마인이 된 이유? 뭘 그딴 걸 묻는 건지 원.”
태진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유석이 즉각 동의했다.
“그러니까요. 그런 걸 알아서 뭘 하려는지 원······. 어?”
그 순간 유석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방금 전, 태진이 꺼낸 이야기는 그가 오기 전에 나온 이야기였으니까.
“자, 잠깐만요. 형님께서 어떻게 그걸 아시는······?”
“벽 뒤에서 들었거든.”
태진이 싱긋 웃었다.
이어 그는 품속에서 삐삐처럼 보이는 물건을 꺼냈다.
“그리고 이런 것도 있어. 넌 몰랐겠지만.”
꾹-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삐삐 안에서 유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 백번도 넘습니다! 백번 이상 수확했다고요!
-이게 다가 아닙니다. 또 있어요.
-강태진은 직접 살인도 저질렀습니다. 희생자의 숫자만 해도 무려······!
“······!”
유석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삐삐에서 흘러나오는 건 분명 유석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태진에게 미처 말하지 않았던, 그에 관한 정보까지 술술 흘러나온다는 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삐삐를 빼앗아 박살내고 싶었다.
“혀, 혀혀형님. 이, 이건······?!”
하지만 그럴 순 없었기에 유석은 멍하니 태진을 바라봤다.
그와 동시에 태진의 얼굴이 악귀처럼 구겨졌다.
“이 새끼야. 내가 널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알아? 계속 내버려뒀다간 모든 정보를 술술 뱉어낼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아냐고.”
유석의 멱을 움켜잡은 태진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참았던 분노가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유석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는 바닥에 넙죽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오, 오해입니다! 그, 그러니까 조작된 겁니다! 예! 제가 아니에요!”
“······.”
“차미래가 이, 이렇게 말하라고 시켰습니다! 저희, 그러니까 저와 형 사이를 이간질시키려고 시켰던 거예요! 억울합니다, 형님! 정말 제가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유석이 덜덜 떨며 소리쳤다.
그 모습은 얼핏 보기엔 정말 억울해보였다. 하지만 태진의 낯빛에 맺힌 것은 연민이나 동정이 아닌, 싸늘한 분노뿐이었다. 유석도 이를 알고 있었는지, 구차한 변명을 멈추고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기 시작했다.
“차, 차미래 그 년의 꾐에 넘어갔다고 해도, 제, 제가 알아차렸어야 했습니다! 죽을,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형님! 큭! 크흐윽!”
유석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자 태진이 허리를 굽혔다. 그는 유석과 눈을 마주치며 입술을 달싹였다.
“유석아. 아마 넌 모르고 있을 수도 있는데.”
태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시원스런 미소였다.
“넌 구라를 치면 늘 콧구멍을 벌렁거리더라. 돼지새끼처럼.”
푹-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와 함께.
태진은 유석의 왼쪽 가슴에 손을 쑤셔박았다. 마치 날카로운 칼로 두부를 찌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어······?”
가슴을 타고 흐르는 찌릿한 통증.
잠시 후, 유석의 옷 위로 붉은색 피가 번져갔다.
꽃이 피는 것처럼 서서히.
“아무래도 이 방법이 제일 안전할 것 같다.”
태진이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리며 팔을 서서히 빼냈다.
그러자 아찔한 고통이 조금씩 유석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 아, 아아아!”
태진의 팔이 빠져나갈수록 피가 흘러나오는 속도도 빨라졌다. 발아래에는 흥건한 피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형님, 형! 제발, 제발 그만······!”
유석은 버둥거리며 태진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러지 말라는 것처럼. 간절한 눈빛과 함께.
하지만 들려온 것은 차가운 중얼거림 뿐이었다.
“뒤탈은 없는 게 좋지.”
콰드득!
태진이 팔을 완전히 빼냈다.
뻥 뚫린 가슴에선 붉은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팔다리에선 점점 힘이 빠져갔고 몸은 서서히 차갑게 식어갔다.
쿠웅-!
결국 유석은 피 웅덩이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졌다.
흐릿해져가는 시야 너머로 태진의 얼굴이 보였다.
“형, 님······.”
유석은 태진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툭-
육중한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검게 죽은 눈동자는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태진은 그가 죽어가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얼굴을 와락 구겼다.
“누가 네 형님이냐. 역겨운 돼지새끼가.”
유석의 죽음을 확인한 뒤.
태진은 담배 하나를 빼물었다.
짙은 회색 연기가 허공에 뿌려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담배 하나를 전부 태운 그는 유석의 몸 위에 꽁초를 툭 던졌다.
“[돼지]는 차미래에 의해 토벌됐다. 뭐, 대충 이렇게 둘러대면 되겠지.”
방독면과 장갑을 집어든 태진이 몸을 돌렸다.
옥상으로 올라오는 계단이 있는 방향. 그는 그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신창우.”
태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무도 없는 허공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잠시 후, 40대 중반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경을 쓰고 검은 정장을 입은 샤프한 인상의 남성.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신창우가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이에 태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처음부터. 그보다 보스한테는 잘 말해 줄 거지?”
“네가 약속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그야 당연하지. 애초에 그 조건으로 백야에 합류한 거니까.”
태진이 씨익 웃었다.
“그럼 집결의 날에 다시 보자고. 아, 뒤처리도 좀 부탁해.”
창우의 어깨를 두드린 태진은 곧장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20층이 넘는 고층건물이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창우가 아는 강태진은 비행기에서 뛰어내려도 무사할 정도로 괴물 같은 초인이었으니까.
삐리리리-
그때 창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BOSS]라는 발신자명에 창우는 냉큼 전화를 받았다.
-끝났어?
“[용]이 깔끔하게 처리했습니다.”
태진을 대할 때와는 달리 공손한 말투.
동시에 수화기 건너편에 있던 상대가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럼 철수해.
“예. 뒤처리만 하고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뚝!
짧은 통화를 끝으로 전화가 끝났다.
창우는 지저분한 옥상 위를 바라보며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