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Chapter 37. 흉계 (3)
‘비켜봐. 같이 좀 먹자.’
누군가 동훈의 곁으로 다가왔다.
방금 전, 소방관들을 한자리에 모았던 현준이었다.
‘센터장님.’
동훈은 현준을 센터장이라 부르며 옆자리를 비켜줬다. 냉큼 그의 옆에 앉은 현준은 그가 먹고 있던 라면을 보더니 얼굴을 팍 구겼다.
‘야, 뭘 이런 걸 먹고 있냐. 버리고 이걸로 다시 먹어.’
현준이 새로운 컵라면을 건넸다.
뜨거운 김이 훅 나는 걸 보니 제대로 익은 라면인 듯했다. 동훈은 고개를 숙여 감사인사를 한 뒤, 현준과 함께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후루룩-
허기가 진 탓일까?
라면이 사라지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십여 초였다. 후후 불어가며 국물까지 전부 마시던 무렵, 현준이 별안간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이런 것밖에 못 해줘서.’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인 현준.
그 모습에 동훈은 왜 그러냐는 듯이 물었다.
‘뭘요. 이 정도면 진수성찬 아닙니까?’
‘컵라면에 김치가지고 진수성찬이라고 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넉살좋은 반응에 현준은 피식 웃었다.
‘다친 곳은 없고?’
‘저 튼튼한 거 아시잖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래도 인마, 몸 좀 사려. 제일 먼저 뛰어드는 거 보고 식겁했다니까.’
현준이 핀잔을 주듯 말했다.
그렇게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동훈이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 분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 분? 아, 거기 일하던 아줌마?’
상가 지하에는 포장용 비닐봉지를 만드는 작은 공장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공장에 있던 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전부였다.
동훈이 걱정스런 얼굴로 묻자, 현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괜찮아, 인마. 조금 놀라신 것뿐이래. 연기도 안 마신 것 같고.’
‘후우, 다행입니다.’
그제야 동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긴 하지. 에휴, 처음에 신고 받았을 때는 또 그 미친 방화범 새끼 짓인가 하고 식겁했는데······.’
방화범, 남유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민호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이어지는 동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엔 잠잠하네요.’
‘잠잠할 만도 하지. 엊그제 대통령 특별 지시도 있었고. 그래서 경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중이잖아. 이번에 뭔가 저지르면 무조건 잡힐 거야.’
현준은 확신이 깃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에 잠자코 있던 동훈은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나온 걸로는 잡기 어렵답니까?’
‘응, 거기 수사팀한테서 나온 얘긴데 전혀 모르겠대. 단서도 없고 CCTV도 전부 먹통이 됐다고 하더라.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둘의 대화에서 민호는 남유석이 분명 귀물을 썼으리라 짐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금의 단서조차 남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방화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별안간 현준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보다 어머니는 좀 어떠셔?’
마치 동훈의 가정사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이에 동훈도 별 숨길 것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요즘엔 좀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밥도 잘 드시고요.’
‘다행이네. 제수씨는?’
‘많이 피곤해합니다. 장모님이 와주시긴 했는데 아무래도 몸이 워낙 약하다보니······.’
동훈이 어두운 얼굴로 말을 흐렸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걸까? 현준은 격려하듯 그의 등을 두드렸다.
‘인마, 걱정 마. 금방 괜찮아지실 거야.’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동훈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던 중 현준의 시선이 그가 벗어놓은 장갑에 가 닿았다.
‘엥? 뭐야? 너 아직도 이런 거 쓰냐?’
놀란 듯이 묻는 현준.
그도 그럴 것이, 동훈의 장갑은 그의 것과 달랐다.
방화 기능도 거의 없는 보급용 장갑. 또 장갑은 무척이나 낡고 헤진 상태였다. 게다가 오늘 화재를 진압하던 중에 생긴 건지, 여기저기에 시커먼 그을림이 묻어있었다.
동훈은 그냥 줘도 안 쓸 것 같은 장갑을 끌어안은 채 싱긋 웃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쓸 만합니다.’
‘쓸 만하긴 개뿔. 야, 그런 거 쓰다가 골로 가!’
현준은 웃기지 말라는 듯이 외쳤다.
‘안 그래도 제일 먼저 뛰어드는 녀석이 이런 걸 쓰면 어떡해!’
기가 막힌 얼굴로 장갑을 빼앗아든 현준.
그는 동훈의 장갑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고는 그가 끼고 있던 장갑을 그에게 내밀었다. 보급용이 아닌, 인터넷에서 구매한 양질의 사제 소방장갑이었다.
‘이거 써.’
‘예?’
‘잔말 말고 받아.’
현준은 동훈의 손에 억지로 장갑을 쥐여 주었다. 동훈은 그 이후로도 몇 번이고 장갑을 받길 거부했지만 현준의 고집이 더 셌다.
‘아, 그냥 가져! 난 하나 더 있으니까.’
‘센터장님, 하지만······.’
‘그 뭐야, 1+1할 때 샀어. 그러니까 넣어둬. 빨리!’
계속되는 현준의 고집에 동훈은 결국 장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자식이. 진작 그럴 것이지.’
그제야 현준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다치지 말라고 주는 거니까 다치면 죽는다. 알겠냐?’
‘예, 알겠습니다.’
두 소방관의 훈훈한 대화를 끝으로.
민호의 눈앞에 익숙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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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관찰시간이 곧 종료됩니다.
-종료까지 남은 관찰시간: 3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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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메시지를 본 순간.
문득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 씨앗은······?’
그 생각이 들자, 곧장 오른쪽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씨앗은 그대로였다. 하얀색 싹이 살짝 나오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 모습에 민호가 황당한 표정을 짓던 그때.
렌즈의 지속시간이 끝났다.
화재현장도, 훈훈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두 소방관도 사라졌다. 다시 공원의 벤치로 돌아온 민호는 황당함으로 물든 얼굴로 소리쳤다.
“뭐야? 발아(發芽)를 시작했다면서!”
발아를 하긴 했다. 발아만 해서 문제지.
민호는 허탈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남은 기회는 한 번.”
하나 남은 렌즈를 소중히 움켜쥐었다. 아끼다가 똥이 되는 일이 있더라도 이건 꼭 아껴서 써야만 했다. 렌즈를 주머니에 넣던 그때, 민호는 뭔가 허전하다는 걸 느꼈다.
바로 방금 전까지 함께 있던 율이 없어졌다.
대신 웬 쪽지 하나가 있었다.
“응? 이건······.”
쪽지엔 율의 아기자기한 필체가 적혀 있었다.
천계 쪽에 또 일이 터져서 반나절 정도 자리를 비우겠다는 내용이었다.
“율이도 고생이 많구나.”
민호는 쪽지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벤치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동훈을 떠올렸다.
“아니, 대체 뭘 바라고 있는 거야?”
답답하다는 듯이 중얼거린 민호.
연신 고민해봤지만 도통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에 한숨을 내쉬던 그때.
“안녕.”
“우왓! 깜짝이야!”
옆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
민호는 소금을 맞은 미꾸라지처럼 튀어 올랐다.
그의 옆에 앉아있는 건 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어느 소녀.
“오랜만에 보네. 그간 잘 지냈어?”
소녀가 방긋 웃었다.
어디서 본적이 있는 미소였다.
민호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러던 중 생각이 났다.
“앗! 너는······.”
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
우산을 쓴 소녀와 만난 적이 있었다. 특이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 소녀였다. 상태창도 보이지 않았고, 심안으로도 속마음을 읽어낼 수 없었던 소녀.
눈앞에 있는 소녀가 바로 그때의 소녀였다.
“기억해주고 있었구나. 기뻐.”
민호의 표정 변화를 살피던 소녀가 활짝 웃었다.
티끌 하나 없이 순수한 미소였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소녀가 민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 접근이 부담스러웠는지, 민호는 대답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편 대답이 돌아오지 않음에도 소녀에게선 실망한 기색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긴 넌 원래부터 그랬지. 혼자서 뭐든 다 잘했어. 늘 올바른 길을 걸었고.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거지만.”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소녀.
그녀를 보며 민호는 문득 그간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아, 맞아. 그러고 보니 미래 누나한테······.’
소녀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간 정신이 없어서 새카맣게 까먹고 있었다.
‘이번 사건이 끝나면 물어봐야겠다.’
그런 생각과 함께 민호는 다시 소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저,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미래에게 물어보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스스로 최대한 정보를 캐내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순순히 대답해주지 않았다.
“후후. 이미 알고 있을 거야.”
“······아니요. 전혀 모르겠는데요.”
민호이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그 행동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소녀가 옅게 웃었다.
“괜찮아. 네 고민은 곧 해결될 거야.”
“제 고민이 뭔 줄 알고······.”
민호가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그때.
소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은 이만 가봐.”
“네?”
“다음에 또 보자.”
소녀의 말은 조금 이상했다.
‘오늘은 이만 가볼게.’도 아니고, 민호에게 이제 가보라는 듯이 말했다. 민호는 딱히 어딜 갈 생각도 없는데 말이다.
이에 민호가 말의 저의를 확인하기 위해 입을 열던 그때!
우우웅-
그의 휴대폰이 거칠게 진동했다.
혜성에게서 온 전화였다.
-형! 지금 어디에 계세요?
전화를 받자마자, 혜성은 대뜸 그렇게 물었다.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에 민호는 곧장 현재 위치에 대해 대답했다.
“여기 광진 유원지에 있는 공원. 왜?”
-부, 불이 났어요! 이번엔 요양병원이에요!
“······!”
민호가 눈을 부릅떴다.
요양병원에 불이 났다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가 있었으니까.
혜성은 다급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다들 그쪽으로 갔어요! 형은 어떻게 하실······.
“나도 바로 합류할게!”
그렇게 외치며 민호는 곧장 땅을 박찼다.
소녀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지금 민호의 관심사는 전부 요양병원 화재로 쏠려 있었다. 홀로 남겨진 소녀는 점점 멀어지는 민호의 등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얼마 후, 민호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그녀는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혔다.
“[곰]이 보기엔 어때?”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벤치 뒤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40대 남성.
전대 관찰자 대장이었던 마인, 신창우였다.
“놀랍군요. 보스가 말씀하셨던 그대로입니다.”
“내가 사랑스럽다고 말할 만한 이유가 있지?”
“예. 충분합니다.”
창우가 연신 감탄했다.
이에 소녀는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녀는 돌연 얼굴을 어둡게 물들였다.
“사실은 그를 열쇠로 쓰고 싶지 않았어.”
“······.”
“하지만 그 이외에 열쇠에 적합한 이가 없어. 그러니까 해야만 돼.”
“예. 모든 선인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소녀와 창우의 얼굴에 결의가 서렸다.
잠시 후,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돼지]는?”
그녀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전까지 미소를 짓고 있던 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싸늘한 모습이었다. 창우는 고개를 숙이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선을 넘었습니다. 곧 처리하겠습니다.”
“응, 그 건은 맡길게.”
소녀가 몸을 돌렸다.
“······걱정 마. 네 고민은 내가 처리해줄게.”
다정한 목소리를 끝으로.
소녀와 창우는 삽시간에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