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Chapter 37. 흉계 (2)
제일 먼저 보인 건 새하얀 벽과 천장.
이어 베이지색 커튼과 침대가 보였다. 그리고 침대 위에는 어느 중년 여성이 비스듬히 누운 채 민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따뜻한 감정이 담긴 눈빛. 이와 마주한 민호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타인에게 그런 눈빛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기에.
그때 돌연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머니, 몸은 좀 어떠세요?’
동훈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중년여성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나보단 네가 더 걱정이다. 일은 안 힘들고?’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요. 괜찮아요.’
동훈이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대답했다.
민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중년여성이 보낸 따스한 눈빛은 그가 아닌, 아들인 동훈에게 향했던 것이라는 걸.
‘TV보니까 요즘 소방관들 대우가 점점 안 좋아진다던데, 너희도 그런 건 아니지?’
‘그럼요. 매일 밥도 잘 나오고 쉬는 시간도 엄청 많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다행이지만······. 콜록, 콜록!’
말을 잇던 여성이 격한 기침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동훈은 주먹을 살짝 움켜쥐었다.
잠시 후, 기침이 멎자 동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약은 잘 드시고 계시죠?’
‘그럼. 우리 아들이 사다주는 약인데. 잘 먹어야지.’
희미하게 웃은 여성.
그러던 중 그녀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아참, 그보다 소현이는 좀 어떠니?’
‘확실히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어요.’
진하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분명 동훈의 아내 이름이 최소현이었다. 그리고 최근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임신을 하게 돼서, 동훈의 걱정이 이만저만도 아니라는 얘기도 들렸다.
‘그래? 다행이네. 이제 홀몸도 아니니 건강도 확실히 챙겨야지.’
‘안 그대로 어제 장모님이 오셔서 한숨 돌렸어요.’
‘후우, 면목이 없네. 원래는 내가 했어야하는 일인데······.’
‘그런 말씀 마세요.’
동훈이 여성의 손을 꽈악 잡았다.
이후로도 둘은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모자의 정겨운 대화가 끝이 난 건, 그로부터 정확히 10분 정도가 지난 뒤였다.
우우웅-
동훈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문자가 온 탓이었다. 내용을 확인한 동훈은 조금 굳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호출이 와서요.’
‘미안하구나. 내가 밥이라도 차려줘야 되는데 그러질 못해서······.’
‘밥 잘 나온다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동훈이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어머니가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나중에 또 올게요.’
‘으응, 몸조심하고.’
짧은 작별인사를 끝으로.
동훈은 병실을 나섰다. 이어 병원을 나서려던 그때.
‘앗, 안녕하세요, 동훈씨.’
누군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병원 직원처럼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다.
‘저,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잠시 머뭇거리던 여성이 다시 말을 이었다.
‘최영지씨 입원비가 조금 밀려서요. 납부 마감기간도 지나서······.’
‘······죄송합니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만 기다려주시면 바로 내겠습니다.’
동훈은 면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이에 잠시 고민하던 여성은 이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휴, 알겠어요. 제가 잘 말해둘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신 금요일에는 내셔야해요. 저희도 매번 사정을 봐드리긴 힘들어서요.’
‘네, 꼭 내겠습니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동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병원을 나서는 그의 어깨가 유독 좁아보였다.
그때 눈앞에 주황색으로 물든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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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관찰시간이 곧 종료됩니다.
-종료까지 남은 관찰시간: 3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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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5분이 지난 모양이었다.
민호는 동훈을 잠깐 살펴보다가 이내 오른쪽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마지막으로 씨앗의 상태를 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어?’
씨앗은 그대로였다.
싹을 틔울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뭐지? 왜 아직도······.’
이에 민호는 당황했다.
그때 다시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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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
-15분이 경과했습니다.
-대상의 관찰을 종료합니다.
-[관찰자의 렌즈]가 소멸합니다.
-남은 렌즈: 2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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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메시지를 끝으로 관찰이 종료됐다.
민호의 눈에 있던 렌즈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어 주변 풍경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동시에 테이블 위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보고 오셨어요?”
“어, 근데······.”
민호가 잠시 말을 흐렸다.
곧이어 그는 방금 전, 보았던 의아한 광경을 털어놨다.
“왜 씨앗이 그대로지?”
“잉? 그게 무슨 소리에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율을 보며.
민호는 그가 봤던 풍경과 의문을 털어놨다. 얼마 후, 이야기가 끝나자 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이상하네요. 정보로 보나, 주인님 말씀으로 보나 대상이 바라는 염원은 경제적으로 풍족해지는 것 외에는 없어 보이는데요.”
“그럼 왜 싹이 안 돋아나는 거야?”
“우음, 이건 제 추측인데요.”
율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경제적인 풍족함보다 더 강하게 바라는 염원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뭔데?”
“거기까진 저도 모르죠.”
허탈한 대답에 민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어 율이 말했던 추측을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돈보다 더 강하게 바라는 것······.’
제 3자인 민호가 봐도, 동훈의 형편은 썩 좋지 못했다. 그런데도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 민호로서는 그게 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런 종류의 기적이 내려온 걸로 봐서는 조만간 염원을 바랄 일이 생길 거란 소리겠죠.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민호는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딸랑-
그러던 중 카페 문이 열렸다. 뒤이어 나풀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들어왔다.
‘다녀왔어. 휴, 더워죽겠네.’
바로 메리였다.
그녀의 등장에 민호는 대뜸 질문을 던졌다.
“뭐 알아낸 거 있어?”
‘치! 보자마자 한다는 말이 그거야?’
민호의 맞은편에 앉은 메리가 표정을 찡그렸다.
주어진 임무를 모두 끝낸 그녀는 이제 저녁부터 관찰조에 합류했다. 마인 남유석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메리는 오늘 새벽부터 대낮까지, 동훈이 근무하는 소방서에 가있었다. 민호에게서 빌린 [햇볕으로 짠 비단 망토]의 성능을 시험해보고 싶다면서 말이다.
‘알아낸 거? 있지. 거기 사람들, 완전 답답해. 그냥 호구라니까.’
“호구?”
‘응. 뭔 일이 있었냐면······.’
메리는 그간 보고 들었던 일들에 대해 설명했다.
일단 한나절동안 소방관들은 총 3번 출동했다고 한다. 그리고 메리는 출동할 때마다 몰래 따라가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행여나 마인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근데 다 사소한 일들뿐이더라.’
출동이라고 해서 모두 생명이 걸린 사고가 아니었다.
하수구에 빠진 열쇠를 빼내거나 고장 난 문을 열어달라는 일 등등. 굳이 소방관을 부르지 않아도 처리할 수 있는 일들뿐이었다.
‘그나마 사고 같았던 건 베란다에 갇힌 애 구출하는 정도?’
베란다 출입문의 잠금 쇠가 고장나버리는 바람에 안에 갇힌 애를 꺼내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신고자들이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도 소방관들은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메리는 신고자들과 소방관, 양쪽 모두 답답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아, 맞아. 그리고 여기 좀 이상한 것 같아.’
“이상하다고? 어떤 점에서?”
‘소방장비가 하나같이 다 낡았더라. 처음엔 연습용 장비인 줄 알았는데 그런 걸 착용하고 출동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지 뭐야. 이상하지?’
정말로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메리.
그 모습에서 씁쓸한 현실을 느낀 민호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사흘째.
여전히 이렇다 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인의 흔적도 없었고, 동훈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다. 염원의 씨앗도 그대로였다. 얼핏 보면 안도해도 좋을 만한 일이었지만, 민호의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결국 민호는 동훈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두 눈으로 직접 그를 보면 이 불안감이 수그러들지 않을까 해서였다.
민호는 태양으로 짠 햇볕 망토를 걸치고, 그가 일하는 소방서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이어 공원을 가로지르던 중, 별안간 혜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혜진]: 선배.
[혜진]: 화재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
그 내용에 민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즉각 전화를 하려던 찰나, 혜진의 톡이 이어졌다.
[혜진]: 그런데 변절자 짓은 아닌 것 같아요.
[혜진]: 방화가 아니라 사고였다고 합니다.
[혜진]: 피해자도 없고요.
혜진의 설명에 따르면 그저 단순한 화재 사고라고 했다.
민호가 알게 된 건 그가 지금 향하고 있는 소방서에 동훈이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졸지에 갈 곳을 잃은 민호는 인근 벤치에 앉았다.
“하아.”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민호.
잠시 후, 그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초조한 기분이 드는 거지?”
의아한 듯이 중얼거렸지만 사실은 답을 알고 있었다.
실패해본 적이 있었으니까.
그 실패의 기억이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밑도 끝도 없는 불안의 늪으로 민호를 끌고 들어갔다.
그렇기에 이번 임무는 절대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민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했다.
남은 건 그저 지켜보는 것과 토벌조를 믿는 일뿐.
물론 미래와 혜진이 믿음직스럽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불안감이 사라지진 않았다.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듯 연거푸 한숨을 내쉬던 그때, 별안간 메시지 하나가 나타났다.
==
[NOTICE]
-[염원의 씨앗]이 미미하게 반응합니다.
-발아를 시작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관찰자의 렌즈]를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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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주인님! 이건······.”
메시지를 본 율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외쳤다.
하지만 말을 끝까지 잇진 않았다. 그녀의 말이 채 멎기도 전에, 민호가 렌즈를 빼들었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렌즈를 착용한 그는 곧장 오른쪽 눈을 두 번 깜빡거렸다. 씨앗의 상태를 보기 위함이었다.
잠시 후, 염원의 씨앗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본 민호는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어, 뭔가 자란 것 같기도 한데······.’
씨앗을 비집고 하얀색 싹이 보였다.
아주 살짝.
‘······설마 저게 다는 아니겠지?’
민호가 불안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불안한 예상은 적중했다.
몇 분이고 지켜봐도 씨앗에 변화는 없었다. 아주 살짝 싹을 틔운 걸 제외하고는.
민호는 실망으로 가득 찬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왼쪽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동훈이 뭘 하고 있는지 관찰할 생각이었다.
이윽고 나타난 풍경은 낯선 상가건물.
건물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새카맣게 그을려있었다. 아마 혜진이 말했던 화재사고의 현장인 것처럼 보였다. 뒤이어 중장비로 무장한 소방관들이 분주히 계단을 오르내렸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어보였다.
그러던 그때, 한 중년 남성이 소방관들을 불러 모았다.
‘자자, 다들 잠깐 모여 봐.’
‘박현준’이라는 명찰을 단 남성.
그는 소방관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모두 고생했고, 한 10분만 쉬다가 주변정리하고 철수하자.’
‘예!’
현준의 말이 끝나자 소방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화재도 진압했으니 걱정할 건 없었지만, 모두 현장을 떠나진 않았다. 저마다 자리에 앉아 한숨을 돌리거나, 장비에 묻은 시커먼 그을림을 닦아냈다.
이 풍경을 잠시 보던 민호는 이내 동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소방차에 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왔다.
작은 컵라면이었다.
보온병에 담긴 물을 부었지만, 라면을 익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동훈은 과자나 다름없는 라면을 오득거리며 씹어 먹었다.
그러던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