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Chapter 35. 접근 (3)
민호는 점심을 먹다말고 창식의 뒤를 밟았다.
여우 귀까지 써가며 통화를 엿들었지만 그다지 소득은 없었다. 누군가와 전화를 하긴 했는데 자세한 내용까지는 알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나마 알아낸 게 있다면 창식은 누군가에게 거세게 화를 내고 있었다는 점.
결국 민호는 연탄을 전부 나를 때까지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도와주러 오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작업이 끝난 뒤.
한주는 창식과 민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별 말씀을요. 언제든 말만 해주세요. 당장 달려올 테니까.”
“늘 감사합니다. 창식 형제님.”
곧이어 한주의 시선이 민호에게로 가 닿았다.
잠시 후, 그가 꺼낸 것은 한 장의 서류. 바로 봉사활동 확인서였다.
“자, 민호도 이거 가져가. 학기당 20시간은 필요하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맞아?”
“아, 네.”
얼떨결에 이를 받아든 민호.
이어 확인서를 본 그의 눈이 큼지막하게 떠졌다.
“저, 신부님. 그런데 이건 너무 많은······.”
“괜찮아. 내가 봤을 땐 충분히 20시간 분은 일했으니까.”
“그래도······.”
“하여간 착해빠져 가지고. 그냥 받아. 새로 쓰기 귀찮다.”
한주의 말에 민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물론 냉큼 받으면 좋긴 하지만, 그래도 양심이란 녀석이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러자 한주는 피식 웃으며 민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정 그러면 나중에 힘쓸 일 있을 때 또 부탁할게. 그러면 됐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받을 수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민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신부님.”
“그럼 또 보자. 공부 열심히 하고.”
한주와의 인사는 그걸로 끝이었다.
비탈길 아래에 도착할 때까지 한주는 둘을 배웅했다. 민호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한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모퉁이를 꺾어 큰 길로 향하자 비로소 한주의 모습도 사라졌다.
둘만 남게 되자 민호는 좀 더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창식을 힐끗거렸다.
‘이제 좀 뭔가 단서를 흘릴 때도 됐는데······.’
그런 민호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식은 휘파람을 불며 길을 걸었다. 이에 민호의 눈가가 더욱 좁아지던 그때, 별안간 창식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고 보니 민호 형제님은 이제 어디 가시나?”
그 질문에 민호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뭐, 집에 가야죠.”
“집? 약속은 따로 없고?”
“네. 오늘은 딱히······.”
거기까지 대답하던 순간, 민호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창식의 눈썹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럼 바쁘지 않으면 저녁식사나 함께 할 텐가?”
“저, 저녁이요?”
“그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내가 사지. 어때?”
창식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재촉했다.
이를 마주하며 민호는 뭐라고 거절해야 좋을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 순간, 횡단보도 바로 앞에서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장님, 모시러 왔습······. 어?”
무척이나 낯이 익은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은 민호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민호 역시 놀란 토끼처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상대는 민호도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이였기 때문이었다.
“진하 형?”
그는 바로 진하였다.
진하는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어, 네가 왜 여기에······?”
“형이야말로 오늘 약속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으응, 그 약속 때문에 여기 온 거야.”
약속이 있어서 왔다?
그 순간, 민호의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잠깐, 방금 분명 반장님이라고······.’
현재 이 주변은 인적이 하나도 없었다.
민호의 곁에 있는 이라곤 창식과 진하가 전부다. 그럼 진하가 반장님이라고 부른 이가 누구인지는 갓난아기라고 해도 알 수 있을 터였다.
“엥?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그때 창식이 놀랐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묘한 침묵이 세 남자를 감싸 안았다.
***
이후 세 남자가 향한 곳은 인근에 있는 한 대포집.
테이블 위로 금세 김치와 막걸리가 차려졌다. 창식은 능숙하게 막걸리를 흔들어 섞은 다음, 사발에 들이부었다.
콸콸콸-
뽀얀 막걸리가 사발에 가득 찼다.
그러자 비로소 닫혀있던 창식의 입이 열렸다.
“그래. 친한 동생이라고?”
“네, 근처에 살고 취미도 비슷해서 금방 친해졌죠.”
그의 질문에 대답한 건 진하였다.
이어 그는 민호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까도 잠깐 말했지만 이 분은 내 상관이셨던 분이야.”
“전직 상관이지. 지금은 그냥 아저씨 나부랭이잖아.”
창식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에 민호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제 말씀 편히 하셔도 돼요. 저보다 훨씬 연배도 많으신데······.”
“알겠어. 이거 짠하면 그때부터 놓을게.”
“······벌써부터 놓고 계시는데요?”
“깐깐하게 뭐 그런 걸 따져? 자자 짠하자구! 찐하게.”
언제 따른 건지 진하와 민호의 잔도 막걸리로 그득하게 찼다.
세 남자는 가타부타 말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크으! 역시 막걸리엔 껍데기만한 게 없지.”
어느새 노릇하게 익은 돼지껍데기.
껍데기를 입 안에 넣은 창식은 이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술잔이 두어 번 정도 오가자, 창식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 어쩌다 이런 놈이랑 얽혔나? 내가 알기로 이 녀석은 사교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꼰대 중에 꼰대인데.”
“반장님. 저 아직 화장실 안 갔습니다.”
“알아. 너도 들으라고 말한 거야.”
진하에게 핀잔을 준 창식이 다시 민호를 쳐다봤다.
이에 민호는 별 숨김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마음도 잘 맞고, 얘기도 잘 통하고. 또 잘 챙겨주세요. 그래서 친해졌죠, 뭐.”
“어어, 그래?”
그런데 창식의 얼굴이 영 떨떠름했다.
“혹시 둘이 사귀는 건 아니지?”
“······.”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자자, 한 잔 또 하자고.”
썰렁해진 분위기를 날려버리기라도 하듯, 세 남자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시간이 지나자 휑하던 대포집도 하나둘씩 사람이 늘어났다.
왁자지껄하게 변한 분위기 속에서 진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반장님 최근에 또 일본 다녀오셨다면서요?”
“어, 그렇지. 딸내미 보러 갔다 왔지.”
“따님은 좀 어떠세요? 아직도······.”
“이제 괜찮아.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학교생활도 잘 해.”
진하와 창식은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민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렇게 보면 또 마인과 거리가 멀어보였으니 말이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고개를 갸웃거린 민호.
만약 창식이 수상한 낌새가 있었다면 진하가 먼저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씩 경계심이 옅어져갔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그때 창식이 또 다시 딸 자랑을 시작했다.
이에 민호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연탄을 나르는 동안 내내 시달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반면 진하는 이제 익숙하다는 듯이 잠자코 창식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러 막걸리 병이 하나둘씩 쌓여갈 무렵.
어느새 시각은 늦은 밤이 됐다.
얼큰하게 취한 창식이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에 진하가 미리 계산을 해뒀다.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창식은 미간을 좁히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이, 뭐 벌써 계산을 했어?”
“오늘 월급날이거든요.”
진하가 어깨를 으쓱였다.
“대신 다음에 반장님이 사시죠. 비싼 걸로.”
“그래, 다음엔 다 같이 회나 먹자. 민호도 회 좋아하나?”
“그럼요. 없어서 못 먹죠.”
민호의 대답이 마음에 든 걸까? 창식은 히죽거리며 웃었다.
“좋아, 좋아. 그럼 다음에 보자고. 또 연락할게.”
“예, 반장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창식은 진하가 잡은 택시를 타고 그대로 사라졌다.
택시가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진하는 시선을 돌렸다.
“민호야, 속은 좀 괜찮아?”
“전 괜찮아요. 능력이 있거든요.”
“응? 무슨 능력?”
의아한 표정을 짓는 진하의 모습.
이에 민호는 그가 가진 [주신의 축복]에 대해 이야기했다. 잠시 후, 진실을 알게 된 진하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와, 너 설마 미래랑 술 마실 때도······.”
“이거 없으면 진즉에 뻗었죠.”
“야이, 치사하게. 그런 게 있으면 나한테 먼저 알려줬어야지. 몰래 술 버리게.”
“들켰다간 미래 누나한테 호되게 당하셨을 걸요?”
“음, 그건 그래.”
두 남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이어 둘은 택시가 잡힐 때까지 길을 걸었다.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주된 주제는 방금 전까지 함께 있던 창식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예전엔 어떻게 했었냐면······.”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진하가 창식과 함께 일하던 당시의 이야기.
민호는 묵묵히 진하의 이야기를 들었다. 툴툴거리는 말투로 말하고는 있지만 진하는 창식을 굉장히 믿음직하고 존경할 만한 선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를 듣고 있노라니 민호의 머릿속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민호는 마음을 다잡았다. 잘못 짚었다고 해도 일단 물어볼 생각이었다.
“저기, 형.”
“응?”
“만약에, 만약에 말이에요.”
민호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하의 눈빛 때문이었다. 한 치의 의심도, 경계도 없는 눈빛. 창식을 온전하게 믿는 그 눈빛을 보자 도무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결국 민호는 입을 닫았다.
지금은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나중에, 좀 더 나중에 말하자.
민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싱겁긴.”
한편 진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민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순댓국이나 한 그릇 먹으러 가자. 껍데기로는 배 안 차잖아.”
“특으로 먹어도 됩니까?”
“당연하지. 부추 팍팍 넣어서. 머리고기도 추가해서 먹자.”
진하가 민호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
그 시각.
택시에서 내린 창식은 어느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신축 오피스텔이었다. 꼭대기 층에 도착한 그는 능숙하게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덜컥-
“나 왔다.”
짧은 인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간 창식.
방 안은 무척이나 밝았다. 주방에선 먹다 남은 라면과 족발 냄새가 진동했다. 미간을 좁힌 창식은 그대로 거실로 향했다.
TV를 마주하고 있는 소파에는 웬 남자 하나가 앉아있었다.
“어, 영감 오셨수?”
껄렁껄렁한 말투를 내뱉은 사내.
이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척 보기에도 굉장히 비대한 몸집을 가졌다. 고개를 돌린 그는 창식에게서 풍기는 냄새에 얼굴을 와락 구겼다.
“윽! 술 냄새. 영감, 약주 잡수셨수?”
“속 터놓고 얘기하기에 술만 한 게 없지.”
“그래서 정보는 좀 캐냈고?”
사내의 말에 창식이 몸을 멈칫거렸다.
“······일단 열쇠는 확실하다.”
“진짜? 자세히 좀 말해봐.”
그가 재촉하자 창식은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말했다.
주로 민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함께 연탄을 나르고, 또 술을 마신 이야기까지. 시답잖은 이야기였지만 사내는 묵묵히 이를 들었다.
십여 분이 지난 뒤.
창식의 말이 끝나자 사내는 그의 이야기를 짧게 일축했다.
“이름도 똑같고 관찰자랑 아는 사이면 그냥 빼박 열쇠네.”
사내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러다가 돌연 낯빛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