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Chapter 34. 승급 (3)
-오빠. 저 하영이에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민호도 곧장 그녀의 인사에 화답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저야 늘 똑같죠. 오빠는요?
“나도 평소랑 같아. 방학해서 할 일도 딱히 없거든.”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뒤.
민호는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네 소식 들었어. 요즘 엄청 유명해졌던데?”
-아, 그거요.
별안간 한숨을 내쉰 하영.
잠시 후, 그녀는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조금 부담스럽긴 해요. 그냥 평소대로 연주했던 것뿐인데······.
하영은 갑작스러운 유명세에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민호는 그런 하영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줬다.
그로부터 약 십여 분 후.
푸념을 마친 하영은 잠시 숨을 골랐다.
-고마워요, 오빠.
“응?”
-사실 이런 걸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서 답답했거든요. 어머니한테 말씀드리면 분명 그런 걸 신경 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연주에 집중하라고 하실 게 뻔하니까요.
“그랬구나. 이제 기분은 좀 나아졌어?”
-헤헤, 10분 전보다는 훨씬요.
아까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는 음성에 민호도 안심한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때 혜란이 민호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민호야, 하영이한테 밥은 잘 먹고 다니냐고 물어봐.”
소심해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민호는 피식 웃었다.
“하영아, 괜찮으면 잠깐 엄마 바꿔줄까? 내가 지금 집에 와있거든.”
-아, 정말요? 잠깐만요. 그럼 제가······.
잠시 후, 휴대폰이 한 차례 진동했다.
화면을 들여다보니, 하영이 영상통화를 신청한 듯했다. 민호가 동의 버튼을 누르자 화면은 곧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잠시 후, 낯익은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두색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이었다.
-됐다! 오빠, 저 보여요?
곧이어 들려온 하영의 목소리.
그 순간, 민호는 화면 속의 여성이 하영이라는 걸 인지했다.
한편, 민호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멍하니 있자, 하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빠?
“어, 어. 미안. 순간 다른 사람인 줄 알고······.”
-아하하, 그게 뭐예요?
하영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던 중 둘 사이에 끼어든 이가 있었다. 바로 혜란이었다.
“어머나, 우리 하영이. 엄청 예쁘게 꾸몄구나!”
-앗, 안녕하세요.
혜란의 등장에 하영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 멀리서 고생하는구나. 밥은 입에 잘 맞고?”
-그럼요. 저 뭐든 다 잘 먹는 거 아시잖아요.
“성공도 좋지만 몸도 잘 챙겨가면서 하렴. 몸이 아프면 성공이고 돈이고 다 소용없어.”
-헤헤, 네. 알겠어요.
하영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잔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혜란의 말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도 그럴 게, 혜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진심이 듬뿍 담겨 있었으니까.
한편 간단한 안부인사가 끝나자, 은호를 비롯한 아이들이 휴대폰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앗! 하영이 누나!”
“우와! 누나 엄청 예쁘다!”
“공주님 같아!”
화면 속의 하영은 아이들이 보기에도 예쁜 모양이었다.
아이들의 칭찬에 하영은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짧은 인사를 끝내자 휴대폰은 다시 민호에게로 돌아왔다.
“정신이 하나도 없지?”
-네, 그래도 여기보단 거기가 더 좋아요.
하영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현재 있는 장소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빠.
“응?”
그때 하영이 민호를 불렀다.
그녀는 헛기침을 큼큼 하더니, 입술을 살짝 깨문 채로 물었다.
-저, 오빠가 보기엔 어때요?
조금 생뚱맞은 질문.
하영은 답지 않게 살짝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민호는 그런 그녀와 마주한 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완전 예뻐.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말요?
“응. 뭐, 얼굴은 원래부터 예뻤지만.”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화면 속의 하영은 입을 꾹 닫았다. 대답 대신, 귀가 조금씩 새빨갛게 물들었다.
-자, 잠깐만요. 조금 더워서······.
휴대폰에서 얼굴을 조금 떼어낸 하영이 손부채를 부쳤다.
그러던 그때였다.
-하영아.
화면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
이는 민호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후, 화면에 목소리의 주인이 살짝 비쳤다.
-응? 누구랑 통화하고 있어?
하영의 양모(養母), 한유선.
그녀는 검은색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하영에게 다가왔다.
유선의 접근에 하영은 황급히 휴대폰을 등 뒤로 숨겼다.
-앗, 엄마. 그게 아는 사람이랑 조금······.
하영이 휴대폰을 가로로 움켜쥐었다. 동시에 민호의 휴대폰 화면에는 유선의 모습이 생생하게 내비쳤다. 금테 안경을 쓴 그녀는 특유의 깐깐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중요한 게 아니면 나중에 해.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으니까.
-소개요?
-응, 엄마 지인인데 우연찮게 다시 만나서. 아, 이쪽으로 오세요.
몸을 돌린 유선이 누군가를 향해 손짓했다.
이어 등장한 이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사내. 삼십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지인을 소개하는, 평범한 광경에 불과했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
민호는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화면 모퉁이에 비치는 사내는 민호가 잘 알고 있는 이였으니까.
최근에도 만난 적이 있는 남자.
동시에 절대로 마주쳐서는 안 되는 남자.
강태진이었다.
-후후, 반갑습니다. 오랜만이네요.
도성의 가면을 쓰고 있는 태진.
그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하영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나 하영은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마치 태진을 처음 보는 이처럼.
-죄송한데 혹시 절 아시는······?
-아주 잘 알죠. 어머님이 자랑을 엄청 하셨거든요.
-자랑은 무슨. 그냥 얘기나 좀 했지요.
-그 정도면 자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태진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하영에게 정중히 손을 뻗었다.
-그보다 시간 괜찮으시면 커피나 한 잔하시겠습니까?
-그래,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같이 가자.
태진의 제안은 그렇다 쳐도 어머니의 제안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하영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는 걸로 긍정의 뜻을 밝혔다.
그런데 그때, 유선의 눈에 사로잡힌 것이 있었다.
-잠깐. 너 혹시 아직도 전화 중이니?
-아, 네. 금방 끊을게요.
그 대답과 함께 하영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화면 너머로 하영의 굳은 얼굴이 여과 없이 비쳤다. 그녀는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나중에 다시 걸게요.
“응, 그래. 거기서도 열심히 하고.”
하영의 인사를 받아준 건 혜란이었다.
그녀는 주름진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띤 채,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편안해진 걸까? 하영은 방금 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민호 오빠. 제가 이따가 문자할게요!
뚝-
그 인사를 끝으로 하영과 통화가 끊겼다.
하지만 민호에게선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혜란은 민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민호야?”
“······네?”
“얼굴이 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혜란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게, 민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으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신을 추스른 민호가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혜란의 걱정은 잦아들지 않았다.
“정말 괜찮아? 혹시 급체한 거 아니니?”
“걱정 마세요. 진짜 괜찮아요.”
민호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혜란이 마저 설거지를 끝내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홀로 남은 민호는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고는 입술을 달싹여, 자신이 본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분명 강태진이었지?”
“네, 그때 만났던 변호사가 확실해요.”
율이 민호의 중얼거림에 확신을 더해줬다.
민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불안했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흉물이, 최악의 마인이 하영의 곁에 있다는 것이. 태진의 실체를 알고 있는 민호였기에, 불안과 걱정은 더욱 커져만 갔다.
“미래 누나한테 연락해야겠어.”
현 상황에서 가장 도움이 될 만한 이는 단연 차미래였다.
그렇게 생각한 민호는 곧장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
뚝-
“후우.”
전화를 끊은 하영은 대뜸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한 전화다. 보육원 가족들과 인사도 나눴고, 민호와의 분위기도 한창 좋을 때였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방해를 받아 흐름이 끊겼다.
한숨이 나올 법도 했다.
그러자 이를 본 유선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누구랑 전화하고 있었어?”
매섭게 번뜩이는 눈빛.
하영은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냥 대학 선배에요.”
“선배 누구? 설마 그 남자애는 아니지?”
유선이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정곡을 찔려 놀란 걸까? 하영은 즉각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그 모습에 유선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민하영.”
유선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엄마가 말했지? 근본도 없는 애랑 어울리지 말라고.”
“······.”
“네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애한테 시간을 써? 어?”
역으로 치솟한 눈썹. 단단히 화가 난 얼굴로, 유선은 잔소리를 퍼부었다.
“넌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될······.”
“어머니. 그리고 아저씨.”
그때 하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미소를 띤 채 유선과 태진을 마주봤다.
“제가 좀 피곤해서 커피는 못 마실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나직한 어조. 하지만 힘이 깃든 목소리.
하영은 유선과 태진을 지나쳐 먼저 앞으로 향했다.
그녀의 태도에 유선의 뺨은 일순간 붉게 물들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던 그녀는 이내 태진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니, 얘가 사람 앞에 두고 무안하게······. 미안해요. 애가 아직 철이 없어서.”
“하하, 괜찮습니다. 저도 어렸을 땐 종종 저랬거든요.”
“죄송하지만 먼저 카페에 가 계실래요? 제가 잘 타일러서 데려갈게요.”
“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태진이 싱긋 웃었다.
잠시 후, 카페에 도착한 태진은 주문한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고는 돌연 왼쪽 귀에 있던 귀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유석아.”
-넵, 형님. 부르셨습니까?
그러자 귀걸이에선 웬 남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에 태진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아까 분명 민호라고 했지?”
-옙,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흐음, 이걸 우연이라고 봐야 될까.”
유석의 대답과 함께 태진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두드림에 맞춰, 잔에 담긴 커피가 찰랑거렸다. 잠시 후, 두드림이 멎었다.
동시에 태진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보스가 말한 ‘열쇠’랑 이름이 똑같네?”
마치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발견해, 기분이 좋은 이처럼. 기쁨과 흥분이 깃든 기괴한 미소였다. 잠자코 이를 듣던 유석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한 번 캐볼까요?
“그래. 적당히 파봐.”
-알겠습니다. 아, 죄송해요. 오늘은 새벽에 일정이······.
“천천히 해. 대신 내가 귀국하기 전까진 먼저 접촉하지 말고.”
태진이 괜찮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이후 그는 귀걸이를 다시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유석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태진은 다시 커피를 홀짝였다.
“그나저나······.”
태진의 눈가가 가늘게 좁아졌다.
저 멀리 두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유선과 하영이었다. 그 중에서도 태진의 시선은 하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주 먹음직스럽게 잘 컸구나.”
고개를 푹 숙인 모습. 한쪽 손목을 유선에게 강하게 잡힌 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걸음걸이.
멀리서 봐도 억지로 끌려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광경을 보며 태진은 흡족하게 웃었다.
“이제 슬슬 수확해도 되겠어.”
태진의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