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Chapter 34. 승급 (2)
‘아니, 뭔 그딴 사이코가 다 있어?!’
“사이코 맞아. 웃으면서 사람을 칼로 찌르는 놈인데.”
미래가 환자복을 살짝 들쳤다.
허리 부근에 선명히 새겨진 자상(刺傷).
살짝 스친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섬뜩해 보이는 상처였다.
“아무튼 민호 곁엔 내가 당분간 곁에 붙어있어야겠네. 위험할지도 몰라.”
미래는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지만 민호는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그 몸으로 어떻게요? 일단 몸조리나 잘 하세요.”
“후후, 이제 다 괜찮아. 멀쩡해!”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인 미래.
그녀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몸 하나는 튼튼······ 흐꺅!”
하지만 그때, 미래의 입술을 비집고 기괴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진하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허리를 쿡 하고 찌른 탓이었다.
“튼튼하긴 얼어 죽을. 이래도 튼튼하냐? 튼튼해?”
“아, 아파! 히약! 그만, 그만해!”
애벌레처럼 몸을 비틀던 미래가 주먹을 휘둘렀다.
사뭇 위협적인 모습에 진하는 즉각 행동을 멈췄다. 그 모습에 메리는 풋하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미래에게 다가섰다.
‘민호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 이안이 동료들을 불렀거든. 내일 새벽에 도착한대.’
“동료? 아, 협회에서 지원군을 보내준 거야?”
‘아 그게 아니라······.’
어색하게 웃은 메리.
그녀는 미래가 의식을 잃고 있던 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얼마 후, 이야기가 끝나자 미래는 유쾌하지 못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으으, 왜 하필 이런 시기에 그런 일이 터지냐.”
‘그래도 거기 사태가 마무리되면 다음엔 무조건 우리를 도와줄 거래.’
“우음, 그건 다행이지만······.”
미래가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민호에게로 향했다.
“어쨌든 너는 당분간 몸 사려. 수상한 사람이 술 사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말고.”
“알겠어요. 제가 무슨 애도 아니고.”
민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모습에 미래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벌떡 일어나 외쳤다.
“좋아! 그럼 내가 다시 눈을 뜬 기념으로 우리 다 같이 맥주나 한 잔······ 히끼약!”
하지만 미래는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다.
미옥의 손바닥과 진하의 손가락이 날아들었으니까.
“으이구! 철 좀 들어라, 좀!”
“맥주는 됐고 수액이나 더 맞자.”
그 유쾌한 광경에 민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
하지만 미래의 우려와는 다르게.
민호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려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강태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비단 강태진뿐만이 아니었다.
마인들의 출현 빈도 자체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미래가 협회에 긴급 지원 요청을 한 게 무색할 정도로.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달그락-
얼음과 커피를 가득 담은 유리컵이 테이블에 놓였다.
혜성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두 남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혜성이 종종 걸음으로 사라지자 여성은 다시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원한 하늘색 셔츠와 흰색 반바지를 입은 소녀.
바로 유지은이었다.
“어, 제가 어디까지 말씀드렸죠?”
“음악방송에서 순서가 바뀌었다는 얘기까지.”
맞은편에 앉아있던 민호가 입을 열었다.
“아, 맞아.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요······.”
다시 재잘거리며 말을 이어나가는 지은.
그녀는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성공적으로 데뷔 무대를 마친 이야기부터 야식으로 떡볶이를 먹고 싶은데 먹지 못했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커피 안의 얼음이 반쯤 녹을 때까지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떡볶이는 나중에 내가 사줄게. 아는 삼촌이 하는 곳이 있는데 진짜 맛있거든.”
“정말요? 진짜 사주시는 거죠? 그럼 오늘 당장······.”
“물론 대표님한테 허락 먼저 받고.”
“히잉, 안 사주신다는 얘기잖아요.”
지은이 입술을 오리주둥이처럼 모았다.
이어 그녀는 커피를 쭉쭉 들이켰다. 그러더니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여기 커피 진짜 맛있네요. 다른 카페랑 완전 달라요.”
“그치? 나도 자주 오는 곳이야.”
물론 커피 때문에 자주 오는 건 아니었지만.
어깨를 으쓱인 민호는 카페 내부를 둘러봤다. 시간대가 애매해서 그런지 손님은 민호와 지은뿐이었다.
“또 여긴 알아보는 사람도 없으니 대표님도 안심하실 거고.”
지은의 데뷔 무대는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첫 데뷔 이후, 음원차트에서 단숨에 3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지금도 밖을 나가면 열에 여덟은 지은을 알아볼 정도였다.
그런데 한창 인기가 오르는 중에 웬 남자랑 같이 있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분명 곤란하리라.
민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지은은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네? 전 알아봐도 상관없는데요?”
“나랑 있는 걸 말하는 거야. 너 혼자면 당연히 상관없겠지.”
“그러니까 그것까지 포함해서 상관없는 건데요······.”
“아, 하긴. 이전 매니저라고 둘러대면 되려나?”
저 혼자 납득한 뒤 고개를 끄덕이는 민호.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지은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민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동현이랑 동우는 잘 지내고?”
“네, 너무 잘 지내서 탈이에요. 요즘엔 방과 후에······.”
아직 얘기할 거리가 남은 걸까?
지은은 다시 신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커피 잔의 얼음이 거의 사라질 무렵에 지은은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나저나 오빠.”
“응?”
“하영 언니 소식 들으셨어요?”
갑작스런 물음에 민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응, 아니. 무슨 일 있어?”
“있죠! 그것도 엄청 큰일이요!”
“무슨 큰일? 혹시 안 좋은 일이야?”
“아니요. 완전 반대에요.”
“반대라면······. 좋은 일?”
“네! 잠깐만요. 제가 금방 찾아서 보여드릴게요.”
지은이 휴대폰을 두드렸다.
잠시 후, 그녀는 민호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탄생한 괴물
-신조차 시기할 악마 같은 재능의 소유자
-압도적인 1위. 젊은 천재의 탄생!
화면에 나타난 것은 한국어로 번역된 외국 기사들.
모두 어느 천재 피아니스트에 대한 찬사였다. 그리고 기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민호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가 있었다.
“설마······.”
“대단하죠? 전부 하영 언니에 관련된 기사에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 민호의 눈은 놀람으로 물들었다.
그는 솔직한 감탄과 함께 중얼거렸다.
“엄청나네. 이 정도면 거의 연예인이랑 비슷한 급 아니야?”
“연예인보다 훨씬 대단한 거죠! 하영 언니 정도면 이미 월드스타라고 해도 좋을 걸요?”
“정말? 그 정도라고?”
“네! 아, 근데 이런 기사도 있긴 했어요.”
“어떤?”
“어, 그게······.”
지은이 잠시 말을 흐렸다.
그녀의 얼굴이 다소 어둡게 물들었다.
“조금 안 좋은 내용이긴 한데요······.”
“어디 한 번 봐봐.”
하영에게 안 좋은 이야기?
민호는 얼굴을 굳힌 채 지은의 휴대폰을 쳐다봤다. 혹여나 안 좋은 댓글이라도 달려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과 함께.
하지만 화면에 비친 것은 또 다른 기사였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천재에 관하여
주된 내용은 별 게 없었다.
이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면 진즉에 두각을 보였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
또 우수한 코치나 레슨이 없었음에도 홀로 이 정도까지 연주할 수 있었다는 것 등등.
기자의 추측을 기반으로 한 의혹투성이였다.
그때 문득 민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십여 년 전의 기억.
민호는 하영의 양부모가 처음 보육원에 방문했을 때를 기억했다. 당시, 성당 사무실에서 그들은 분명 이렇게 말했었다.
‘천재까지는 아니지만,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자질은 가지고 있다.’
‘우리들의 후계자로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영의 양부와 양모는 국내에서 꽤나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
특히 양모는 해외에서도 단독공연을 할 정도로 유명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조차 천재라는 수식어를 가지진 못했다.
그런데 하영이 갑자기 천재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민호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의문을 가질만한 일이었다.
“아무튼 이 사람을 포함해서 몇몇 사람들이 의혹을 제기하긴 했는데, 이번 연주회 때 다 묻혀버렸대요. 모든 의혹을 묻어버릴 정도로 압도적인 연주회였다고 해요. 하아, 저도 꼭 듣고 싶었는데······.”
지은의 한숨소리에 민호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러게. 나중에 만나면 한 번 들려달라고 하자.”
“그, 그래도 될까요? 언니는 이제 월드스타 급인데······.”
“월드스타가 됐다고 해서 우리 사이가 어떻게 된 건 아니잖아?”
무엇보다 하영은 성공했다고 해서 태도가 변할 이가 아니었다.
그건 하영과 긴 시간동안 함께 해왔던 민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네! 그럼 나중에 꼭 셋이서 다시 만나요.”
“그래, 그러자.”
지은을 마주보며 민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
점심 때를 훌쩍 넘긴 시각.
민호와 지은은 아쉬운 이별을 고했다.
지은에게 스케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민호 역시, 4시에는 약속이 있었다.
바로 새천사 보육원을 방문하는 일.
등을 갈거나 변기를 고치는 등.
힘쓸 일이 있으면 민호는 으레 보육원을 찾았다. 군대에 복무하던 기간 중에는 하지 못했으니 더 열심히 일에 열중했다.
자잘한 일들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됐다.
민호를 포함한 일동은 식탁에 도란도란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소박한 밥상이었지만 웃음이 끊이질 않는, 화기애애한 저녁시간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아이들은 저마다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보육원장인 혜란은 능숙하게 설거지를 시작했다.
“저도 도울게요.”
“괜찮아. 그보다 애들 좀 봐줄래? 조금 있다가 씻겨야 하거든.”
“아, 네. 알겠어요.”
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시간은 오후 8시. 애들을 씻기고 집에 돌아가면 딱 잠들 시간이리라.
그러던 그때였다.
“민호 형아.”
“응?”
한 아이가 민호를 불렀다.
다름 아닌 은호였다. 은호는 어딘가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하영이 누나 있잖아. 요즘 많이 바빠?”
“못 본지 엄청 오래됐어.”
“맞아. 예전엔 주말마다 왔는데.”
은호를 시작으로 아이들이 하나둘씩 중얼거렸다. 최근 하영의 뜸한 방문이 못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아, 그게 하영이가 지금 뭐하고 있냐면······.”
이에 민호는 그가 알고 있던 정황을 설명했다.
주로 아까 전에 지은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전부였지만.
민호의 이야기가 신경이 쓰였던 걸까?
혜란도 설거지를 잠시 멈추고 민호의 이야기를 들었다. 잠시 후, 민호의 설명이 끝나자 혜란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구나. 어쩐지 요즘 통 안 보인다 했었는데······.”
“우와! 그럼 하영 누나 이제 TV에 나오는 거야?”
“누나 연예인 되는 거야?”
“음, 뭐 비슷하겠지. 나중에 오면 피아노 쳐달라고 하자.”
“응!”
은호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다시 밝아진 아이들의 모습에 민호와 혜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러던 그때.
우우웅-
식탁 위에 올려둔 민호의 휴대폰이 떨렸다.
해외에서 걸려온 전화.
처음엔 모르는 번호인가 싶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눈에 익은 번호였다. 곧 민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어? 하영이한테서 온 건데요?”
“정말?”
“네, 이 번호면······.”
“어, 얼른 받아봐.”
혜란의 재촉에 민호는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여보세요.”
민호의 목소리가 수화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얼마 후.
휴대폰 너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