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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전해드립니다-121화 (121/182)

121화

Chapter 33. 선행은 선인을 만든다 (1)

Chapter. 33

선행은 선인을 만든다

다음날.

미진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동을 개시했다.

하루 만에 전단지를 만들어 배포한 행동력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빠른 속도였다. 인터넷에도 글을 올렸고 또 다른 동료도 구했다.

그리고 도착한 약속장소에서 민호는 낯익은 이와 조우했다.

“너는······.”

이틀 전에 본 적이 있는 여학생.

그녀 역시, 민호를 기억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엊그제 경비아저씨랑 같이 있던 오빠다. 맞죠?”

“으응. 너는······. 수진이었지?”

“맞아요! 윤수진.”

수진이 해맑게 웃었다.

경비원들과 손녀처럼 이야기를 하던 아이였다.

“알고 보니 바로 옆 반이더라구요. 그래서 친해졌어요.”

미진이 자초지종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는 덕우와 이야기했던 걸 토대로 경비원과 친하게 지내는 또래 아이를 찾아냈다. 그리고 현재 이런 문제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경비원들의 절반은 쫓겨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결과가 바로 눈앞에 있는 수진이었다.

“저는 몰랐어요. 사실 그렇잖아요? 학교랑 학원 다니기도 바쁜데 누가 이런데 붙어있는 글을 보겠어요?”

“맞아. 나도 평소엔 폰 보면서 다니니까 전혀 몰랐어.”

미진이 맞장구를 쳤다.

민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사는 세상이었다.

어느 누가 동네 아파트 게시판을 유심히 본단 말인가?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러면 결국 불편해지는 건 저희들이잖아요.”

“어떤 면에서?”

민호가 궁금한 듯이 묻자, 수진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빠르게 대답을 쏟아냈다.

“요즘 밤늦게 학원 끝나고 집에 올 때 엄청 무섭거든요. 근데 얼마 전에 경비아저씨한테 말씀드리니까 중간 부근까지 마중와주셨어요. 그래서 이젠 하나도 안 무서워요.”

해실거리며 웃는 수진.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수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데 만약 여기 적힌 대로 인원이 줄게 되면······.”

마중을 나온다든가 하는 일은 기대할 수 없게 되리라.

수진의 말을 끝으로 주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를 타파한 것은 미진이었다.

“그래서 내가 계획을 세워봤어.”

“어떻게?”

수진의 질문에 미진은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그곳에는 그녀가 세운 계획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이걸 다 네가 쓴 거야?”

“응, 덕분에 오늘 수업은 못 들었지만······.”

미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곧장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의 목적은 최대한 많은 아군을 만드는 것.

우선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 이번 일에 대한 글을 게재했다. 또 밤새 만들어준 전단지는 평소 경비원들과 친분이 있는 집 앞에 일일이 붙였다.

“그 다음부터는 부모님, 그리고 우리 또래들, 최종적으로는 친하게 지내는 이웃들에게 문제를 알리고 공감을 얻어낼 거야. 어차피 투표로 결정된다면 아군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미진아······.”

계획을 들은 수진이 입을 멍하니 벌렸다.

“너 혹시 7반 반장이었어?”

“응? 아니.”

뜬금없는 소리에 미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수진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진짜? 그럼 2학기에 한 번 해봐! 완전 잘할 거 같은데.”

“그건 나중에 생각해볼게. 일단 지금은 이 일에 집중하자.”

“좋아. 최대한 많이 퍼뜨려볼게!”

“그럼 인터넷은 내가 맡을게. 다른 부분은 영 자신이 없네.”

“네, 감사합니다.”

미진이 방긋 웃었다.

그 미소를 시작으로 셋은 각자 맡은 바 임무를 다하기 위해 흩어졌다.

***

나중에 알았지만 수진은 아파트 단지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였다.

사교성도 좋고 인사성도 밝은 탓에 그녀는 많은 어른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다른 아이들이 호랑이 할머니라며 무서워하는 107동 노파도 수진이만큼은 친손녀처럼 아꼈다.

“수진이구나. 오랜만에 보네.”

“앗, 할머니! 안녕하세요.”

수진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 모습에 노파의 주름진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래, 학원가는 거니?”

“아니요. 학원은 이따 저녁에 가요.”

“그렇구나.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쉬엄쉬엄해라. 더위 먹을라.”

“헤헤, 넵! 아, 맞아.”

그때 수진은 뭔가를 떠올린 듯 배낭을 뒤졌다.

잠시 후, 그녀가 꺼낸 것은 경비원 인원감축에 대한 공문.

“할머니 혹시 이거 아세요?”

“으응? 이게 뭐니? 내가 글씨가 잘 안 보여서······.”

“헤헤, 이게 뭐냐면요.”

수진이 입을 열어 설명했다.

만원을 아끼고자 경비원 스무 명 이상을 내쫓으려 한다는 게 주된 이야기였다. 수진의 이야기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노파의 입가에 맺혔던 미소가 사라져갔다.

그리고 노력하는 건 수진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경비아저씨들의 인원감축은 옳지 못하다고 봐요.”

테이블 위로 노트를 펼친 미진이 열띤 목소리로 주장했다.

미진의 맞은편에는 두 남녀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부모였다. 장장 30여분 동안 이어진 미진의 말에 그녀의 부모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남자가 입을 열었다. 미진의 부친이었다.

“이거 정말 네가 생각한 거야?”

“네. 경비아저씨들이 없어지지 말았으면 해서요.”

당차게 대답하는 미진의 모습에 그는 감탄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녀의 엄마는 달랐다.

“후우, 그래도 엄밀히 말하면 이건 네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한숨을 내쉰 여성이 미진을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그냥 공부만 열심히 하면 돼. 이런 건 어른들이······.”

“우리 딸이 다 컸네. 이런 생각도 할 줄 알고.”

그때 남자가 여성의 말을 끊었다.

그는 미진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빠도 도와줄게.”

“정말요?”

“그럼. 내가 뭘 해주면 될까?”

“여보! 당장 내일 모레 고등학교 가는 애한테 무슨······.”

말리지는 못할망정 도와준다는 말에 여성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남자는 그녀의 허리를 툭툭 건드리며 속삭였다.

“생일 때마다 갖고 싶은 거 물어봐도 없다고 했던 애야. 그런 애가 소원이라면서 부탁하는데 이걸 어떻게 안 들어줘?”

“그건······.”

그 말에 여성이 말을 흐렸다.

미진은 착한 딸이었다.

혼자 있어도 불평하지 않았고, 사춘기니 반항기니 할 때도 부모 속을 썩이지 않았다. 공부도 곧잘 했으며 물욕도 없었다.

그런 아이가 처음으로 소원이라는 말을 꺼냈다.

그 말에 여성의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뒤이어 들려온 남자의 말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이건 잘못된 게 맞아. 뭐? 한 달에 만원을 절약해? 그깟 푼돈 얼마나 한다고 가장 수십 명을 내쫓아. 관리비를 줄이려고 노력하는 건 좋지만 이 방법은 아니지.”

“또 엄청 불편해질 거예요. 앞으로는 짐 옮겨주시는 일도 없을 거고, 또 분리수거할 때마다 도와줄 수도 없을 거예요. 아파트는 그대로인데 사람이 반으로 줄어버리니까요.”

“그, 그건······.”

차마 부정할 수 없는 말투성이였다.

그녀도 얼마 전, 덕우가 택배상자를 집까지 옮겨주지 않았던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밖에도 경비원들의 도움을 받은 적이 많았다.

여성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남자가 돌연 그녀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미진 엄마.”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 남자.

그는 곧이어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린 미진이 부모야. 우리가 미진이 편을 안 들어주면 또 누가 들어주겠어?”

그 말은 그녀의 가슴을 깊게 파고들어갔다.

잠시 후, 여성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후우, 알겠어요. 나도 아줌마들이랑 얘기 좀 해볼게.”

“저, 정말요?”

백기를 든 것도 모자라 도움까지 준다고 하자 미진은 깜짝 놀랐다.

이에 여성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신 이거 한다고 공부 게을리 하지는 말고. 알겠지?”

“네!”

미진이 힘차게 대답했다.

제일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부모님 설득하기도 성공했다.

계획은 무척이나 순조로웠다.

***

“다들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네요.”

수진과 미진을 둘러보고 온 율이 밝게 웃었다.

그녀는 민호에게 둘이 어떤 활약을 했는지 이야기해줬다.

“대단하지 않아요? 벌써 이만큼이나 아군으로 돌아섰어요.”

“그러게. 대단하네.”

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건성어린 대답에 율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런데 주인님은 지금 휴대폰이나 하고 계시는 거예요?”

“······나도 도와주고 있거든?”

민호는 황당한 얼굴로 반박했다.

지금도 그는 SNS와 각종 커뮤니티에 이 일을 공론화시키고 있었다. 다행히 신의 대리인들과 대학 후배들의 도움도 얻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뿐이니까.”

그는 철저히 타인이었다.

그렇기에 민호가 도울 수 있는 법은 이게 전부였다.

그리고 다음날.

주민 투표가 하루 앞으로 다가온 날.

민호와 미진의 동료는 스무 명 가까이 늘어났다.

모두 경비아저씨와 좋은 추억이 있는 이들이었다.

“시험 기간에 늦잠자서 학교 늦었는데 아저씨가 오토바이로 태워줬어. 와, 아저씨 아니었으면 그냥 백지로 낼 뻔했지.”

“미미 잃어버렸는데 아저씨가 찾아줬어!”

“어렸을 때 공차다가 1층 유리창을 깨먹었거든. 근데 그때 아저씨가 같이 가서 사과해줘서 무섭지 않았던 기억이 있네.”

적게는 초등학생, 많게는 사회인까지.

다들 여기서 오래 살았던 만큼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였다.

동료가 많아지자 자연스럽게 전단지를 돌리는 속도도 빨라졌다. 또 이웃과 부모를 설득하는 숫자도 대폭 늘어났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반응이 온 건 다름 아닌 인터넷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냥 반응이 온 수준이 아니었다.

아주 폭발적인 이슈가 됐다.

왜냐면 도화선이 된 뉴스보도가 있었으니까.

-얼마 전, 경기도 성남시의 한 아파트에서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약 4년 넘게 경비원으로 근무했던 이가······.

바로 민호가 실패했던 임무에 관한 것.

아파트 주민들에 대한 갑질이 보도되자 인터넷은 발칵 뒤집혔다.

아니, 억누르고 또 참아왔던 것이 폭발했다는 게 옳은 말이리라. 각종 갑질에 대한 기사가 빠르게 올라왔고, 이 중에선 민호가 커뮤니티에 올렸던 사연도 있었다.

-미쳤네. 돈 만원 아끼자고 멀쩡한 사람들을 내쫓아?

-만ㅋㅋㅋ원ㅋㅋㅋㅋ 난 또 얼마나 아끼나 했네.

-경비아저씨들도 한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입니다. 꼭 그렇게 하셔야만 했나요?

-이것도 청와대 국민청원 각이다.

-야, 아파트 주민 대표 뒷돈 받아먹었는지 조사해봐라. 우리도 작년에 이거랑 비슷하게 했는데 몇 천원 줄고 바로 무슨 특별 관리비라고 또 오름. 미친ㅋㅋㅋㅋ

SNS에서 네티즌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줄줄이 댓글과 기사가 올라가자 아파트를 찾는 기자도 있었다.

거기에 주민들 사이에서도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경비원 인원감축이 통과되면 택배를 맡아주는 서비스나 각종 혜택들이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그날 저녁, 아파트 단지 전역에 부광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 사랑하는 서남 아파트 주민 여러분. 서남아파트 주민 대표 부광철입니다.

-최근 잘못된 사실로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주민 단합에 해악을 끼치는 무리가 있어 특별히 방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내 경비원 인원감축은 용역업체와의 협의를 통해 상당부분 진행된 예정이며 사유 또한 최저임금이 대폭 인상됨에 따라 관리비를 줄이고자······.

하지만 광철은 말을 잘못했다.

경비원 인원감축이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됐다고 말해버린 것.

여기에 주민들은 투표로 결정하기로 한 일이 이미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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