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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전해드립니다-119화 (119/182)

119화

Chapter 32. 심기일전 (3)

“앗, 엄마다. 저 이만 가볼게요!”

“그려, 그려.”

“공부 열심히 하고.”

“히히, 네! 안녕히 계세요.”

허리를 숙여 인사한 수진은 냅다 엄마를 향해 달려갔다.

경비원들은 그런 수진의 뒷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봤다.

마찬가지로 미소를 짓고 있던 덕우는 돌연 몸을 풀기 시작했다.

“아이쿠, 그럼 나도 밥값 좀 해볼까.”

“밥값이요?”

민호가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덕우는 그보다 빨리 112동 입구를 향해 달려갔기 때문이었다.

“어르신!”

덕우가 향하는 곳에 있는 이는 휠체어에 탄 70대 후반의 노파.

그는 휠체어 손잡이를 붙잡았다.

수십, 수백 번도 넘게 해본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밖에 나오실 거면 인터폰 하시라니까요.”

“뭘 번거롭게 인터폰이여! 나 혼자 나올 수도 있지 뭘.”

“에이, 그래도 같이 있으면 말벗도 되고 좋잖아요? 안 그래요?”

“아이구, 거 말 하나는 잘 한다니까.”

노파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에 싫은 기색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덕우는 노파의 휠체어를 끌고 주변 공원을 산책했다. 이런저런 덕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 다른 두 경비원들도 각자 할 일을 찾아 떠났다.

홀로 남겨진 민호가 그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을 무렵.

율이 입을 열었다.

“좋은 분들이네요.”

“그러게.”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 민호.

이후, 노파의 산책이 끝날 무렵이 되자 민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시험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

“그러네요. 저도 저걸 시험으로 쳐도 상관없을 것처럼 보여요.”

율도 민호의 생각에 동의했다.

지금껏 덕우가 보여준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선인이라는 게 보였으니까. 하지만 시험이 필요 없다고 말했음에도 민호의 얼굴에 미소는 없었다.

오히려 괴로운 표정이었다.

“마음 같아선 모든 분에게 기적을 전해드리고 싶지만······.”

민호가 안개를 향수를 꽈악 움켜쥐었다.

그러자 율이 고개를 흔들었다.

“주인님, 천계에서 기적을 허락한 사람은 임무 대상인 이덕우씨 뿐이에요.”

“······그래. 나도 알고 있어.”

착잡하게 물든 얼굴로 한숨을 내쉰 민호.

그러던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모습을 드러낸 이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여성.

여성의 곁에는 아까 전, 수진과 같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있었다. 두 모녀의 등장에 덕우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어이쿠, 안녕하세요. 사모님.”

“저, 죄송하지만 저한테 택배 온 게 있을 텐데······.”

늘 쌓아두는 곳에 택배상자가 없으니 의아한 모양이었다.

“아, 냉장보관이라고 적혀 있어서 제가 지하실에 가져다 놨습니다. 금방 가져올게요.”

부리나케 지하실로 내려간 덕우. 잠시 후, 덕우는 지하실을 두 번 정도 더 왕복했다. 커다란 박스만 세 상자였기 때문이었다.

“자,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가져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덕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년 여성의 표정은 당황한 것처럼 보였던 탓이었다.

마치 이렇게 많이 올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잠시 말이 없던 여성은 얼마 후, 죄송스러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저, 죄송하지만······.”

“하하, 아닙니다. 제가 댁까지 들어드릴게요.”

덕우는 수레를 꺼내서 짐을 실었다. 하지만 수레가 작은 탓인지, 박스는 두 개까지가 한계였다. 덕우가 박스와 씨름을 하던 그때, 구원의 손길이 나타났다.

“저도 도와드릴게요.”

바로 민호였다.

박스는 꽤 무거웠지만 이삿짐을 나르는 것에 비하면 껌이었다. 민호가 박스를 들려고 하자, 덕우는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만류했다.

“아이구, 괜찮아요. 나 혼자 해도 충분한데······.”

“그래도 둘이서 하면 한 번에 다 옮길 수 있잖아요?”

민호가 씨익 웃었다.

그러자 중년 여성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죄송한데 이쪽 분은······?”

“아, 저번 주말에 이사 온 총각이에요. 113동이었나?”

“앗,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살갑게 인사를 건넨 민호.

이후, 민호와 덕우는 상자를 들고 여성의 집까지 향했다.

다행히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앞까지 짐을 옮기자, 여성은 미안한 얼굴로 재차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 음료수라도 한 잔 내올게요.”

“아이구,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제가 미안해서 그래요.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여성이 부엌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홀로 남은 여학생이 덕우에게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단발머리에 뿔테안경을 쓴 여학생.

아까 전, 수진이라는 학생과 비교하면 수수하고 조용한 성격처럼 보였다.

“인사를 못 드려서 죄송해요. 이거 때문에······.”

휴대폰을 든 여학생이 어색하게 웃었다.

인터넷 강의를 시청하고 있는 듯했다. 이에 덕우는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뭘 이제라도 인사하면 됐지. 그래, 오늘 시험 기간이라면서?”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여학생이 놀란 얼굴로 묻자, 덕우가 곧장 대답했다.

“으응, 네 또래 아이가 하나 있는데 오늘 시험이 끝나서 일찍 끝났다고 하더라고. 또 무슨 얘기를 했더라? 콜랍인가?”

“콜팝이요?”

“그래, 그거. 요즘은 떡볶이 말고 다들 그거 먹는다면서?”

“사람에 따라 달라요. 전 순대를 제일 좋아하구요. 특히 허파요.”

“허허, 그건 내가 훨씬 잘 알지.”

“맞아요. 엄마랑 아빠 빼면 아저씨만큼 저를 잘 아시는 분이 없죠.”

덕우와 여학생이 서로를 마주보며 씨익 웃었다.

무척이나 친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던 중 중년 여성이 주스를 들고 왔다. 민호와 덕우는 단숨에 주스를 들이마신 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러던 그때였다.

툭-

민호의 주머니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앗, 저기 이거 떨어뜨리신 거······.”

여학생이 이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어?”

그녀가 집어든 것은 종이.

바로 인원감축이 명시된 공문이었다. 멍하니 공문을 읽던 그녀는 넋이 조금 나간 얼굴로 덕우를 바라봤다.

“아, 아저씨. 이거 뭐예요? 여기 왜 인원 감축이라고······.”

“별 거 아니야. 그냥 어른들끼리 좀 협의된 게 있어.”

하지만 대답은 여학생의 엄마가 대신했다.

그녀는 종이를 빼앗은 뒤, 민호와 덕우를 마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딩동-

그때 도착한 엘리베이터.

민호와 덕우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하하, 주스 잘 마셨습니다.”

“뭘요. 짐 옮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엘리베이터는 1층까지 내려갔다.

“고맙네. 덕분에 한 번에 옮겼어.”

“에이, 뭘요. 다들 돕고 사는 거죠.”

민호가 머쓱한 얼굴로 웃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방금 전에 만났던 여학생이었다.

단숨에 코앞까지 당도한 그녀는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킬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질문을 던졌다.

“이게 뭐예요? 왜 인원 감축을 하는 거예요?”

“어, 그게······.”

덕우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모르는 모습에 결국 민호가 대신 나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민호는 최대한 단순하게 설명했다.

그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여학생의 얼굴은 점점 핏기가 가셨다.

잠시 후, 모든 설명이 끝나자 그녀의 낯빛은 아예 새파랗게 변해버렸다.

“······그, 그럼 투표가 통과되면······.”

“절반이 해고되겠지. 나이가 많은 순서부터 차례대로.”

민호가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여학생은 꽤나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녀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고, 이거 괜히 말한 게 아닌지 몰라. 공부해야할 학생한테······.”

위태로워 보이는 발걸음에 덕우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한편 민호는 여학생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가 보인 반응을 떠올리자 뭔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 같기도 했다.

***

다음날.

“주인님.”

서남아파트에 막 도착했을 무렵.

율이 민호를 불렀다. 허공을 유영하듯 날아다니던 그녀는 이내 민호의 코앞에 멈췄다.

“오늘 기적을 전달하실 건가요?”

“응, 그래야지. 하지만······.”

민호가 말을 흐렸다.

잠시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를 도울 순 없는 걸까?”

원래대로였다면 망설임 없이 기적을 전하고 임무를 완료했겠지만 그렇게 되면 덕우만 구원을 받는다.

다른 경비원들의 해고는 막을 수가 없게 된다.

이에 민호는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기적을 원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매정했다.

“주인님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불가능해요.”

율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안타깝다는 눈빛과 함께 말을 이었다.

“천계는 오직 선인에게만 기적을 주니까요. 저 분들도 좋은 분들은 맞지만, 아직 기적을 받을 정도의 공덕은 쌓지 못했어요. 대상이라도 구하는 게 나아요.”

“네 말은 맞지만 그래도······. 응?”

민호가 율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던 그때.

문득 그의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소녀.

그녀는 교복을 입은 채, 주민 게시판에 전단지 같은 걸 붙이는 중이었다.

“쟤는······.”

“어제 봤던 아이네요.”

율의 말대로 소녀는 어제 봤던 여학생이었다.

덕우와 유독 친해보였던 아이.

잠시 후, 전단지를 붙인 여학생은 다른 동에 있는 게시판으로 향했다.

그녀가 사라지고 얼마 뒤.

민호는 여학생이 머물렀던 게시판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그녀가 붙인 것처럼 보이는 전단지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전단지에는 경비원들의 인원감축을 반대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그냥 무턱대고 반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름대로 인원감축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논리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하루 만에 이렇게까지 했다고?”

민호가 놀란 듯이 중얼거리던 그때.

별안간 저 멀리서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렸다.

“야! 너 거기서 뭐해?”

바로 옆 동에서 들려온 소리.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처럼 들리는 소리에 민호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 있는 건 산만한 덩치를 가진 중년 남성과 전단지를 손에 든 여학생이었다.

“아니, 다 큰 학생이 다섯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이야? 여기 이런 거 붙이면 안 되는 거 몰라?”

겁을 주듯 윽박지르는 남성.

그의 태도는 꽤나 효과적이었다.

여학생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쩔쩔매고 있었으니까.

“저, 저는······.”

“여기 말고 또 어디에 붙였어? 엉?”

“그게, 그러니까······.”

“빨리 말 안 해? 어디다 붙였냐고!”

성난 외침으로 여학생을 밀어붙이는 남성의 모습.

민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

==

*이름: 부광철

*나이: 49세

*공덕: 194

*악덕: 101

*성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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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남자는 마인이 아니었다.

다만 이름이 조금 낯이 익었다.

“잠깐, 부광철이라면 어디선가······.”

“여기 적혀 있는데요?”

그때 율이 게시판을 가리켰다. 인원감축의 내용을 담은 공문. 그 최하단에 ‘주민 대표 부광철’이라고 적힌 글귀가 보였다.

그리고 이를 본 민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말은 곧 저 남자가 바로 경비원 인원감축을 생각해낸 장본인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때 광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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