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Chapter 31. 전하지 못한 기적 (2)
평범한 외모의 소녀였다.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
노란색 우의를 걸치고, 민호에게 우산을 씌워준 친절한 사람. 그녀는 민호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친숙하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민호의 기억 속에 소녀는 없었다.
“저, 죄송한데 누구신지······?”
민호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소녀는 그제야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 여기선 처음 본다고 말하는 게 맞겠지?”
“여기서는?”
그럼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있단 소린가?
민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소녀의 입술이 다시금 달싹였다.
“간단히 요약하면 네 팬이야.”
“팬이요?”
“응, 여기.”
별안간 소녀가 휴대폰을 건넸다.
화면에 떠오른 건 어느 동영상. 한 남자가 무대에서 노래를 열창하는 영상이었다. 그리고 남자의 모습은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민호가 눈을 가늘게 좁히던 그때, 문득 영상의 제목이 시야에 들어왔다.
<예종대 축제 레전드 탄생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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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영상 속의 남자가 누군지 깨달은 민호.
곧이어 그의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녀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노래 잘 부르더라. 멋있었어.”
“어, 네. 감사합니다.”
민호는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그는 이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난생 처음 보는 소녀와 왜 이런 대화를 해야 하는 걸까? 아니, 그보다 이 소녀는 뭐하는 사람일까?
그런 의문이 들어, 민호는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옆에 앉아도 될까?”
하지만 민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소녀가 대뜸 그의 곁에 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빗물이 그녀의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저 민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민호는 난처한 듯 뺨을 긁었다.
그러면서도 소녀를 힐끗거리며 쳐다봤다.
상태창을 통해, 소녀가 누군지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뭐야?’
민호는 당황했다.
‘왜 상태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힐끗거리며 봐서 그런가?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마주봤다.
3초 정도 마주봤지만 그럼에도 상태창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심안도 발동하지 않았다.
이 황당한 상황에 민호가 당황해하던 무렵.
“놀랐어.”
소녀의 발이 물웅덩이를 찰박거렸다.
눈웃음과 함께 다시 입술을 달싹거린 소녀.
“잠깐 바람 쐬러 나왔는데 네가 있어서.”
사랑하는 여인에게 들었다면 분명 설렜을 대사였으리라.
애석하게도 소녀와 민호는 생판 남에 가까웠지만.
그런데 소녀의 미소를 본 순간, 민호는 왠지 모를 감정에 사로잡혔다.
‘어?’
그리움.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이인데 뜬금없이 그리운 기분이 들다니.
“그보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그때 소녀가 다시 말을 걸었다.
상념에서 벗어난 민호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고민이 없다는 뜻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소녀에게는 조금 다르게 들린 듯했다.
“말해봐.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은근한 말투.
민호는 그런 소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만약 평소였다면 분명히 하지 않았을 거다. 그냥 웃어넘기며 고민 같은 건 없다고 말했을 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냥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민호는 민감한 부분을 제외하고 고민을 털어놨다.
아는 아저씨가 있었다. 그 아저씨의 고민을 해결해주고자 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하루아침에 잘못된 선택을 했다. 고민은 영영 해결해줄 수 없게 됐다. 그래도 아저씨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꼭 알고 싶었다.
왜냐면 그래야 아저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민호의 이야기가 끝나고 얼마 후.
소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후후, 안심했어.”
“네?”
“너는 변하지 않았구나?”
이 무슨 뜬금없는 말이란 말인가?
민호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소녀의 입술을 비집고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역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다워.”
“예? 사, 사랑이요?”
민호가 당황한 얼굴로 되묻자 소녀는 손을 내저었다.
“아, 혼잣말이니까 너무 마음에 담지는 마.”
“아니, 그게 무슨······.”
난데없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마음에 담지 않을까?
민호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소녀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오늘은 이만 일어나야겠네. 다시 볼 수 있어서 즐거웠어.”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
그녀는 민호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중에 또 만나. 아니, 이 인사는 좀 이상하네.”
소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말을 정정했다.
“왜냐면 우린 처음부터 줄곧 함께 있었으니까. 그렇지?”
비 오는 날과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끝으로.
소녀는 몸을 빙글 돌렸다.
그녀는 세찬 빗줄기 너머,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곳을 향해 점점 사라져갔다.
민호는 마치 여우에 홀린 것처럼 소녀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러던 그때였다.
“주인님!”
사라졌던 율이 돌아왔다.
비닐우산과 함께였다. 율은 자신의 몸보다 큰 비닐우산을 민호에게 건넸다.
“세상에. 벌써 엄청 젖었잖아요! 얼른 우산부터 쓰세요!”
율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민호의 머리에 맺힌 물방울을 털어냈다.
그 순간, 민호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이건······?”
그의 몸에서 실 한 줄기가 생겨났다.
소녀가 사라져간 곳으로 뻗어있는 실.
진하디 진한 보라색의 실이었다.
***
율에게서 우산을 건네받은 뒤.
민호는 그 길로 다시 동북 아파트로 향했다. 몸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율은 그런 민호가 못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주인님,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요.”
율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일단 가서 샤워부터 하시는 게······.”
“단서를 찾는 게 먼저야. 내일이 되면 소용이 없어지니까.”
민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수수께끼의 소녀가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그보다 급한 것이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민호는 잡념을 지우고 눈앞의 일에만 집중했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민호는 곧장 3단지 관리실로 향했다.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지만 무시하고 들어갔다.
‘둘과 연관이 있는 단서를 찾아야 돼.’
그가 찾으려는 건 영호와 도성 사이에 있는 물건.
관리실과 그 인근을 뒤적거렸지만 단서가 될 만해 보이는 건 도통 나오지 않았다. 민호의 얼굴에 초조함이 맺히던 그때, 등 뒤에서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죄송한데······.”
“······!”
민호가 깜짝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세미 정장차림의 미남이 있었다. 강도성이었다.
“괜찮으세요? 옷이 엄청 젖었는데······.”
도성은 걱정스런 얼굴로 민호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냈다.
“저, 이거라도 좀 쓰세요.”
“······저는 괜찮, 아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손수건 모퉁이에 그려진 뱀 캐릭터를 보자 마음이 바뀌었다.
‘저건 분명히······.’
도성이 영호의 땀을 닦아줄 때 쓰던 손수건이다.
그 말은 저 손수건이 곧 단서가 될 확률이 높다는 소리였다. 민호는 물기를 닦는 둥 마는 둥하며 손수건을 몰래 빼돌렸다.
“여기 계신 분과 아는 사이셨나 봐요?”
그때 도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민호와 영호의 사이를 궁금해 하는 듯했다.
여기서 어떻게 답하는 것이 의심을 피할 수 있는 대답일까? 잠시 고민하던 민호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냥 가끔······.”
안부나 전하던 사이다.
민호는 대충 둘러댔다. 다행히 도성은 깊게 캐묻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참 안된 일이네요.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도성이 쓰게 웃었다.
그는 준비해온 새하얀 국화꽃을 바닥에 놓아두었다. 조금 시든 국화꽃이었지만 그래도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가져왔다는 건 잘 느껴졌다.
이를 잠시 바라보던 민호는 다시 도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쪽 분께서는······?”
“앗, 실례했습니다. 전 이런 사람입니다.”
지갑을 꺼낸 도성이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그곳엔 변호사 강도성이라고 적혀있었다.
“박영호씨는 의뢰인이었습니다. 아드님과 관련된 사건이 있거든요.”
아들과 어떤 사건이 관련되어 있는 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 대답을 끝으로 두 남자는 입을 꾹 닫은 채, 관리실을 바라봤다.
국화꽃이 빗물에 흠뻑 젖어, 아예 잠길 지경이 될 무렵.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도성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몸을 돌려 몇 걸음 걷던 그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손수건은 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대답을 끝으로.
도성은 세찬 빗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잠시 후, 율이 입을 열었다.
“겉보기에는 정말 선인처럼 보이네요.”
“그러게.”
민호는 율의 말에 동의했다.
“우리도 이만 돌아가자.”
“네!”
쓸 만한 단서를 건졌다.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민호는 국화꽃이 놓인 관리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발을 내딛었다.
***
그날 저녁.
민호는 오후 6시를 훌쩍 넘길 무렵이 돼서야 집에 도착했다.
씻고 간단히 저녁을 먹은 뒤, 자리에 앉은 민호.
“이렇게 하면 되나?”
한 손에는 손수건을.
다른 한 손에는 선글라스를 들었다.
“네! 그대로 쓰면 될 거 같아요.”
율의 대답에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곧장 선글라스를 썼다.
그로부터 얼마 후.
시야가 마구 일그러졌다. 그리고 별안간 방 안의 풍경이 변했다.
“여, 여기는······.”
조금 낯이 익은 풍경.
바로 3단지에 있는 관리실이었다.
창밖에 내려앉은 어둠으로 보아하니, 아무래도 밤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어젯밤이다.
원하던 사념을 정확히 추출한 것에 대해 기뻐하던 것도 잠시.
그의 두 눈에 익숙한 인물이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노력했어야 하는데······.’
‘아이구, 아닙니다.’
도성과 영호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도성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영호는 그런 도성을 만류하며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선생님께선 정말 최선을 다해주신 걸요.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영호.
그 모습에 도성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잠시 후, 도성의 입이 다시 열렸다.
‘3개월. 길어봐야 3개월입니다. 그 이상 살진 않을 거예요.’
‘저, 정말요?’
‘네. 집행유예를 받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영호는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무척이나 고마워하는 모습에 도성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제가 보여드릴 게 있다고 했었죠?’
‘아, 네.’
고개를 끄덕인 영호.
이어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 아내와 관련이 있는 일이라고 하셨죠?’
‘맞습니다. 사실 보여드려야 하나 망설였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야하는 일이라면 보고 싶습니다.’
영호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에 도성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겠습니다. 만약 도중에 보고 싶지 않으시면 말씀해주세요. 바로 중단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영호의 대답을 끝으로 도성이 꺼낸 것은 노트북.
노트북 화면에는 미리 띄워놓은 걸로 보이는 영상이 있었다.
CCTV 녹화 본으로 추정되는 영상이었다.
잠시 후, 영상 속에 나타난 이를 본 영호의 두 눈이 놀란 토끼처럼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