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Chapter 29. 끝이 아닌 이별 (4)
-신의 대리인님.
“응?”
-제 손을 잡아주세요.
소망이의 말에 민호는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동시에 눈부신 빛이 민호를 감쌌다.
잠시 후, 수박이가 놀란 얼굴로 외쳤다.
-오! 도령의 얼굴이 변했어!
“엥? 진짜?”
-응응! 목소리도 달라졌잖아.
수박이의 말대로 민호는 스스로의 목소리가 변한 것을 느꼈다.
원래보다 훨씬 더 묵직한 음성.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저 모습은 누구의 것이더냐?”
-붉은 실의 인연입니다. 제 딸이 만나고 있는 사람이요.
소망이의 대답과 함께.
수박이는 다시 민호를 쳐다봤다. 좀 더 꼼꼼하게. 그러고는 이내 씨익 웃었다.
-선해 보이는 인상이네.
-후후, 그렇죠?
수박이와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린 소망이.
한편 민호는 갑작스럽게 변한 스스로의 목소리가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그야 내가 할 순 없잖아? 저 영감은 더더욱 안 되고.
“예끼, 이놈아. 나도 소싯적에는 이보다 훨씬 잘생겼다.”
-하이구, 퍽이나 그러시겠네.
수박이가 노인과 티격태격하던 그때.
소망이를 보던 민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소망아! 너 몸이······!?”
점점 옅게 물들어가는 소망이의 몸.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모습에 민호는 당황했다.
하지만 소망이는 태연해보였다.
-정해져있던 일입니다. 그보다 은희 곁에 가서 함께 있어주세요.
“지금?”
-네, 이제 작별인사를 할 시간이니까요.
그 말에 민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망이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민호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옆에 간 다음에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이름을 불러주세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알겠어.”
짧은 대답과 함께 민호와 소망이는 걸음을 옮겼다.
그때 둘의 앞을 막아선 이가 있었다.
“이놈아, 잠깐 기다려 보거라.”
소망이에게 손을 뻗은 노인.
그는 다짜고짜 소망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곧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소망이의 몸에 있던 상처가 씻은 듯이 사라진 것.
게다가 흐릿해져가는 몸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르신, 이건······.
이 놀라운 변화에 소망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시에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 가는 길이다. 멀쩡한 모습으로 인사해야 미련이 없겠지.”
-······감사합니다, 어르신.
노인이 베푼 호의에 소망이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고는 민호와 함께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은희에게로.
“큼큼!”
민호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
“은희야.”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은희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은희의 몸이 움찔 떨렸다. 민호는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그녀의 이름을 입 안에 머금었다.
“은희야.”
민호의 목소리가 끝나자 은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엔 놀람의 빛이 가득했다. 잠시 후, 은희가 떨리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여, 영훈씨? 영훈씨가 어떻게······.”
붉은 실의 인연이 영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나보다.
하지만 민호의 상념은 거기서 멈췄다.
이후부터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민호가 당황하던 그때, 그를 도와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불렀어. 할 말이 있거든.
“······어?”
소망이의 목소리와 함께.
은희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러고는 정확히 소망이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소, 소망아?”
-응.
“너야? 지금 네가 말한 거야?”
-맞아. 나야.
소망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은희는 놀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대체 어떻게······. 아, 꿈이구나. 꿈이라서 그런 거지?”
-응. 네가 매일 꾸던 꿈이랑은 조금 다르지만.
피식 웃음을 터뜨린 소망이.
그는 걸음을 옮겨 은희에게 다가갔다.
-은희야. 사랑스러운 내 딸, 우리 은희.
그녀의 품에 안긴 소망이는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넌 네 스스로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를 거야. 네가 내게 와준 순간부터 지금까지, 넌 한 번도 사랑스럽지 않은 적이 없어. 내게 있어 넌 또 다른 세상이자 기적이었으니까.
“소망아?”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걸까?
은희는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때,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딸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이제 시간이 없네.
“시간이 없다고? 왜?”
-너도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을 거야. 우리 저번 주에도 함께 병원에 다녀왔잖아?
소망이가 최근의 기억을 되살렸다.
잠시 후, 은희의 낯빛이 조금씩 하얗게 물들었다.
“서, 설마······.”
-응, 이제 잠들 시간이야.
소망이가 미소를 지었다. 온갖 감정이 가득 담긴 미소.
그런데 그 순간!
“안 돼!”
은희가 벼락처럼 소리를 질렀다.
찢어지는 목소리로, 마치 비명처럼 내지르는 외침.
그녀는 소망이를 찾듯 팔을 허우적거렸다.
“나, 나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조금만 더 같이 있자. 응? 소망아.”
-미안해, 은희야.
“싫어. 가지 마. 가지 마, 소망아! 네가 없으면 나는······!”
콰당!
균형을 잃은 은희가 앞으로 넘어졌다.
소망이는 일순간 몸을 움찔거렸지만 움직이진 않았다.
대신 민호가 은희를 부축했다.
이를 물끄러미 보며 소망이는 재차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없어도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있잖아?
“······아니야.”
은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흐느꼈다.
“네가 아니면 안 돼. 다 필요 없어. 너만 있어주면 돼. 그러니까······.”
-은희야.
그때 소망이가 은희의 말을 끊었다.
그는 서글픈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잠깐만, 우리는 아주 잠깐만 떨어져 있는 거야.
“잠깐이 아니잖아. 영원히 못 보는 거잖아!”
은희는 지금 이 자리가 작별의 순간이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질끈 감긴 눈에서 눈물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조용히 흐느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잘 해줄걸. 산책도 자주가고 간식도 더 좋은 걸로 줄걸. 미안해, 소망아. 흑! 미안해······.”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공포를 앞에 두고.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헤어질 거라는 걸 알았다면 좀 더 잘 해줬을 텐데.
은희는 후회하고 또 자책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건지, 소망이는 그녀에게 다가가 얼굴을 비볐다.
-은희야. 난 네 곁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어. 산책도, 맛있는 간식도 부수적인 일일 뿐이야. 너와 함께 했기 때문에 좋았던 거야.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흑! 흐윽······.”
-그리고 이 이별은 정말로 끝이 아니야. 왜냐면 난 아직 강을 건널 생각이 없거든.
소망이가 씨익 웃었다.
그는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은희를 바라봤다.
-네 산책이 전부 끝나는 날까지, 강 앞에서 내가 널 기다릴게. 다행히 강을 건널 때까지 곁에 있어준다는 분도 있으니 안심해.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딸이었는지 이야기하면서 기다리다보면 분명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소망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푸흐흐! 이런 영악한 아이를 보았나.”
별안간 뒤에 있던 노인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넌 처음부터 강을 건널 생각이 없었구나!”
-멍청한 영감, 소망이는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었잖아.
“하하하! 그래, 졌다. 내가 졌어!”
노인이 유쾌하게 웃었다.
“언제까지고 네 곁에 있어주마. 네 딸과 함께 강을 건널 때까지!”
저승사자의 확답이 들려오자 소망이는 씨익 웃었다.
노인의 대답으로 인해 재회의 가능성이 생겼으니까.
그래서 소망이는 마지막 남은 한 톨의 걱정까지 모조리 털어버린 채 웃었다.
-그러니까 후회가 남지 않을 만큼 멋진 산책을 하고 와.
소망이의 시선이 은희에게로 향했다.
그의 입을 비집고 눈빛만큼이나 따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 내가 없었던 날들의 이야기를 말해줘. 아, 될 수 있다면 행복한 이야기가 좋겠네. 같이 산책하면서 웃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
“소망아······.”
은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제는 안다. 지금 이 자리가 소망이를 보내는 자리라는 걸.
그래서 은희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언젠가 이별의 순간이 오면 꼭 해주고 싶었던 게 있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소망이가 있는 곳으로 양팔을 벌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한 번만 안아 봐도 될까?”
-응, 얼마든지.
은희의 말에 소망이가 걸어와 안겼다.
그녀는 소망이를 와락 껴안은 채,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언젠가 헤어지는 순간이 올 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소망이의 목을 감싸 안은 은희의 팔이 떨렸다.
스스로의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며.
은희는 목소리에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내게 와줘서 고마워, 소망아. 넌 내게 있어서 하나뿐인 가족이었어. 든든한 아빠이자, 상냥한 엄마였고 사랑스러운 동생이었어. 고마워.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울컥 치미는 감정을 참지 못한 걸까.
은희는 또다시 울음을 토해냈다. 소망이는 그런 그녀를 보며 활짝 웃었다.
-나야말로 함께해서 고마웠어. 다음 산책을 할 때도 꼭 네 곁으로 갈게. 약속해.
“응, 응. 알겠어. 나도 너랑 다시 만날 거야. 꼭, 꼭 다시 만날 거야.”
흐느끼는 와중에도 은희는 주문을 외우듯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어?”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민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 놀라운 것을 본 것처럼.
“저건······.”
민호의 시선이 닿은 곳.
그곳은 소망이와 은희의 사이였다.
정확히 말하면 둘의 사이에서 새싹 하나가 돋아났다.
새싹은 실처럼 변해 둘 사이를 이었다.
피처럼 붉디붉은 색의 실이었다.
“인연이 이어진 게다. 억겁의 세월이 지나도 결코 끊어지지 않을, 강하고 질긴 붉은 실의 인연이.”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동시에 저 멀리 보이는 소망이의 몸이 점점 흐릿하게 변했다. 이제 정말 헤어질 때가 됐다. 그렇게 판단한 소망이는 마지막으로 은희의 품으로 들어가 안겼다.
그러고는 따뜻한 목소리로 작별의 속삭임을 건넸다.
-그럼 잘 있어, 은희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딸.
마지막 속삭임과 함께 소망이는 연기로 변했다.
“잘 가, 소망아. 잘······. 흐윽!”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흐느끼는 은희.
혼자가 된 그녀는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툭- 투두두둑-
쏴아아아아!
은희의 꿈에 비가 내렸다. 세찬 장대비였다.
비는 그녀의 감정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세차게 메마른 꿈의 세계를 적셨다.
그러던 중 노인의 곁에 구슬 하나가 나타났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망이의 목소리.
구슬로 변한 소망이는 노인이 내민 손 위에 살포시 앉았다. 노인은 그런 소망이를 바라보고는 끌끌거리며 웃었다.
“오래 걸릴 텐데, 괜찮겠느냐?”
-무엇이 말인가요?
“저기 있는 네 딸아이 말이다.”
은희를 가리킨 노인이 히죽 웃었다.
“명부를 보면 백 살이 넘어서까지 장수한다고 적혀있는데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있겠느냐?”
-물론이지요. 오히려 기쁩니다. 산책은 길수록 즐겁거든요.
“미련은 없고?”
-괜찮습니다. 못 다한 이야기는 나중에 만나서 나누면 되니까요.
소망이는 충분히 만족한 것 같았다.
노인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다. 그럼 가자꾸나. 날이 밝기 전에 데려갈 놈이 하나 더 있어서 바쁘구나.”
-네, 어르신.
소망이의 대답을 끝으로.
노인과 소망이는 검은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쩍! 쩌적-
동시에 세계가 갈라졌다.
은희가 꿈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로부터 얼마 후.
‘민호야!’
뇌리를 강하게 울리는 한 마디.
메리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떡해. 소망이가, 소망이가······!’
메리가 가리킨 곳에는 소망이가 웅크린 채 누워있었다.
민호도, 수박이도 모두 잠에서 깨어났지만 그만은 깨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민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괜찮아.”
민호가 손을 뻗어 소망이를 쓰다듬었다.
동시에 민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인사는 제대로 했으니까.”
눈을 감은 소망이는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
혹은 긴 산책을 끝내고 올 주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