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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전해드립니다-108화 (108/182)

108화

Chapter 29. 끝이 아닌 이별 (2)

-제가 불렀습니다.

“네가? 저승사자를?”

-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소망이.

현재 소망이는 언제 세상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저번 달 말까지였던 원래 수명을 억지로 붙잡고 있었으니까.

소망이가 생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오직 하나.

홀로 남겨진 은희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겠지요. 곁에 있어줄 붉은 실의 인연도 있고, 또 마인과 관련된 문제도 해결됐으니까요.

미소를 지은 채, 소망이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인사를 하려고 합니다.

인사? 민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민호는 그가 말하는 인사가 어떤 인사인지 깨달았다.

“설마 작별인사를 말하는 거야?”

-네, 제 사인(死因)이 사인인지라 딸에게는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거든요.

소망이의 사인은 심장마비.

팔다리를 바들거리며 떨다가 서서히 죽어간다.

물론 은희는 소망이의 모습을 볼 순 없지만 소리로 이상증상은 알아차리리라.

그럼 또 걱정을 안길 테고, 그건 소망이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전 사자님을 초대한 겁니다. 꿈을 통해서 인사를 하려고 말이지요.

소망이의 대답이 끝나고.

수박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마음엔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지. 이것도 소원 중 하나니까.

“나도 마찬가지다. 원래라면 예의를 모르는 놈들과는 상종하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두도록 하마. 넌 특별한 아이니까.”

노인이 소망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민호는 의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특별한 아이요?”

“넌 그것도 모르고 의뢰를 받아들였느냐?”

“어, 네. 그냥 임무가 내려와서······.”

민호가 멋쩍게 웃자 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삼백년이다.”

“······네?”

“자그마치 삼백년 동안 모은 영력과 공덕을 모두 소모해서 소원을 빌었다.”

소망이의 이야기였다.

노인은 소망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가장 간절한 소원은 빌지 못했지만, 그래도 두 가지 소원이 하늘에 닿았다. 그리고 두 소원 모두, 스스로를 위한 소원이 아닌 타인을 위한 소원이니 어찌 특별하지 아니하더냐.”

300년 동안 쌓은 모든 공덕을 바친다.

그 말에 민호는 절로 고개를 숙였다.

소망이가 소원을 빈 대가가 얼마나 큰지 새삼스레 깨달은 탓이었다.

“나는 영물과 신의 대리인, 둘 다 싫어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다. 네게 협력하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어르신.

소망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공손한 모습에 노인은 흡족한 듯 웃었다.

“걱정 말거라. 내가 끝까지 함께 있어주마. 네가 삼도천(三途川)을 건너는 날까지.”

-하하, 아직은 강을 건널 생각이 없지만요.

노인과 마주하며 웃음을 터뜨리는 소망이.

그때 수박이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그보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벌써 30분이나 지났다고!

“서두르지 좀 말거라. 모든 일은 다 때가 있는 법이거늘.”

노인이 수박이를 타박했다.

하지만 그도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 동의하는 듯, 곰방대를 품에 넣었다.

“아, 맞아. 그런데 아까 말하려고 했던 게 뭐야?”

갑자기 나타난 노인 탓에 듣지 못했던 대답.

은희의 꿈속에 들어오면서까지 해야만 하는 일.

민호의 질문에 소망이는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염원을 입에 담았다.

-딸아이의 악몽을 부수는 일입니다.

은희는 꽤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려왔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편하게 잠들어 본적을 숫자로 셀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은 다 한 셈이리라.

잠에서 깨어날 때면 늘 땀범벅으로 일어나는 은희를 보며, 소망이는 강하게 염원했다.

언젠가 이승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저 악몽에서 벗어나게 만들겠다고.

그리고 그 염원은 소원이라는 형태로 변해 지금 이곳에 나타났다.

“그렇구나. 그럼 나도 도울 일이 있을까?”

-물론입니다. 신의 대리인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있거든요.

고개를 끄덕거린 소망이.

-다만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지금은······.

소망이가 말을 흐리던 그 순간!

사아아아-

사방을 뿌옇게 물들였던 안개가 걷혔다.

곧이어 풍경이 변했다.

크고 작은 건물들이 보였고 새파란 하늘과 녹색 산이 보였다. 길가에는 서로 손을 잡은 가족들이 오순도순 길을 걸었으며 그들의 얼굴에는 모두 미소가 맺혀있었다.

“여기는······.”

민호가 입술을 달싹이던 그때.

수박이가 담담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꿈 주인의 기억처럼 보이네.

-맞습니다. 절 만나기 이전의 기억이죠.

소망이의 대답과 함께 다시 풍경이 변했다.

이번에는 어느 방 안이다.

부엌이 달린 조그마한 방.

촌스러운 벽지와 누런 얼룩이 묻은 천장이 보였다.

그러던 그때, 갑자기 들린 날카로운 파열음.

쨍그랑-

“뭐, 뭐야?”

민호가 깜짝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파열음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그릇이 깨지는 소리.

컵과 유리가 박살나는 소리.

옷이 찢기고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 등등.

온갖 소음과 함께 누군가의 고함소리와 비명소리,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짜악-!

뺨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들려온 사나운 목소리.

‘야, 시끄러워! 입 안 다물어?!’

동시에 검은 형상 하나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형상은 성큼성큼 걸어가 그대로 문을 부쉈다. 그러자 자그마한 방 안에 어린아이 하나가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어린아이는 은희였다.

어린 은희는 계속해서 울음을 터뜨렸다.

슬퍼서 내뱉는 울음이 아니었다.

두려워서, 무서워서 지르는 비명이었다.

안쓰러운 모습에 민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이가 있었다.

짜악-!

‘이런 쌍년이, 시끄럽다고 했지!’

검은 형상이 솥뚜껑만한 손으로 은희를 후려쳤다.

은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방 안을 뒹굴었다.

곧이어 무자비한 폭력이 시작됐다.

검은 형상은 은희를 때리고 짓밟고 넘어뜨렸다. 저항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은희가 내뱉은 말은 오직 하나.

‘잘못했어요.’라는 말 뿐이었다.

“그만해!”

그 끔찍한 광경에 민호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달려들었다.

검은 형상을 제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민호의 행동은 허사로 돌아갔다.

후웅-

“어?”

민호의 손이 형상의 몸을 그대로 관통한 것.

그의 손은 검은 형상에게 닿지 않았다. 물론 어린 은희에게도 닿지 않았다.

“어째서······.”

-소용없어. 이건 은희의 기억이니까. 바꿀 수도, 간섭할 수도 없어.

그때 수박이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옳았다. 이미 엎지른 물을 주워 담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그럼 계속 저런 악몽에 시달려왔다는 거야?”

민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무 잔혹했다.

더 잔혹한 것은 은희가 앞으로도 저런 악몽에 시달릴 거라는 사실이었다.

상혁에게 학대를 당한 기억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끔찍한 기억이자, 절대 잊히지 않을 악몽이었으니까.

그러던 중 소망이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악몽의 근원을 없애면,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근원? 그건 또 뭐야?”

-그건······.

소망이가 민호의 말에 대답하려던 찰나.

콰득!

별안간 노인이 곰방대를 부러뜨렸다.

“저런 천인공노할 놈을 봤나! 저런 놈은 당장 끓는 똥통 속에 처박아야 하거늘!”

분노로 의해 시뻘겋게 물든 얼굴.

노인은 검은 형상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그러자 민호가 입을 열었다.

“아마 곧 그렇게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잡아놨거든요.”

정황으로 보건대, 검은 형상은 분명 채상혁이리라.

은희는 의붓아버지인 상혁에게 지속적으로 가정폭력을 당해왔다고 했으니까.

“그래? 잘했다. 이번 신의 대리인은 꽤 마음에 드는 짓을 하는구나.”

민호의 말을 들은 노인이 싸늘하게 웃었다.

당장이라도 상혁의 멱을 잡고 연옥으로 끌고 갈 기세였다.

그러던 그때였다.

‘꺄아아아악!’

은희의 비명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수많은 유리조각이 그녀의 눈에 박혔다. 은희의 눈에선 붉은 피와 눈물이 섞여 비처럼 흘러내렸다. 그 참혹한 광경에 민호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쏴아아아아-

꿈의 세계에 비가 내렸다.

진달래처럼 선홍색으로 물든 비였다.

예쁘고도 몽환적인 풍경이었지만 민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은희의 기억을 엿봤기 때문에 이 비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어두워지고 있구나.”

비를 맞던 노인이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은희의 꿈은 점점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새파랗던 하늘도, 숲도, 거리를 지나는 가족들도 어둠에 휘감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꿈은 어둠 그 자체로 변했다.

쏴아아아아아-!

더욱 거세진 빗줄기.

선홍색의 빗방울은 한데 모여 천을 이루고 강으로 변했다. 삽시간에 불어나기 시작한 물에 민호가 허우적거리자 수박이가 냉큼 민호에게 소리쳤다.

-도령! 내 위로 올라타!

민호는 순순히 수박이의 말에 따랐다.

그러자 한결 나았다. 뒤이어 민호의 눈에 은희가 보였다.

“······!”

은희는 물속에 잠겨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에게서 계속해서 물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인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한이 쌓여 강을 이루었구나. 쯔쯧! 불쌍한 것······.”

혀를 낮게 찬 노인.

은희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은 연민으로 가득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세차게 내리던 비가 그쳤다. 턱 끝까지 차오르던 강물도 서서히 빠졌다. 홀로 남겨진 은희는 조금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게 뭐지?”

민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멀리, 은희의 곁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방에서 피어오른 검은 연기는 차츰 인간의 형상을 갖췄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민호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채상혁!”

민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동시에 상혁의 모습을 한 검은 형체들은 은희를 향해 다가갔다.

그 모습은 흡사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좀비와도 같았다.

그들의 등장에 은희는 창백하게 변한 얼굴로 도망쳤다. 하지만 아무리 도망쳐도 검은 형체들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도와주세요! 누가, 누가 좀 도와······!’

스멀스멀 다가오는 검은 형체들을 바라보며.

은희가 토해내듯 비명을 질렀다.

-이제 제가 나설 차례군요.

그 순간, 잠자코 있던 소망이가 천천히 일어났다.

마치 이런 일을 자주 겪어본 듯 익숙해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소망이의 다리가 지면을 박찼다.

벼락처럼 빠르게 쇄도한 소망이는 은희와 제일 가까이에 있던 형체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콰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형상은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그러자 이를 본 은희의 얼굴에 화색이 깃들었다.

‘소망아!’

달려온 은희가 소망이에게 안겼다.

소망이는 그녀를 업은 채, 연신 검은 형체들을 공격했다. 물어뜯고 갈가리 찢었다. 얼마 가지 못해 검은 형체들은 모두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해, 해치운 거야?”

민호가 묻자 소망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시작인 걸요.

소망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파스스스스-

사방에서 검은 연기가 마구 솟구쳤다.

아까보다 배는 많아 보이는 숫자.

은희의 얼굴은 다시 새파랗게 질렸지만, 소망이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이를 본 수박이가 그의 곁에 다가가 섰다.

동시에 그의 입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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