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Chapter 26. 두 가지 소원 (3)
“그냥 서로의 생각이 다른 겁니다.”
둘 사이에 끼어든 이는 벨.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민호 전달자님처럼 생각하는 신의 대리인도 존재하고, 메리와 같은 생각을 하는 신의 대리인들도 있죠. 심각하게 토론할 주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맞아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건 당연한 거니까요.”
민호의 어깨에 있던 율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기록자들의 중재에 민호와 메리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러네. 내가 너무 흥분했어. 사과할게, 미안.’
“나도 사과할게. 그래도 내 생각에 변함은 없어.”
비단이는 시스템이 아니다.
민호는 확고한 고집을 담아 그렇게 대답했다.
이에 메리는 반박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입을 닫았다.
갑자기 어색하게 뒤바뀐 분위기.
아무도 선뜻 말을 꺼내지 않던 그때, 침묵을 깨는 목소리가 있었다.
-도령, 근데 우리 산책은 언제 가는 거야?
울상이 된 수박이가 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그 귀여운 모습에 민호와 메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
그날 저녁.
민호의 옥탑방을 찾은 손님이 있었다.
미래와 진하, 그리고 이안.
뒤늦게 학교를 마친 혜진까지 합류하자, 일행은 옥상 위에 있는 평상에 둘러앉아 고기를 구웠다.
치이이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삼겹살.
잠시 후, 고기가 다 익자 미래가 소주를 꺼냈다.
“자, 건배!”
미래의 짧은 외침을 시작으로.
네 개의 소주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소주를 단숨에 마신 미래는 기분이 좋다는 듯이 웃어댔다.
“크으! 역시 민호네 옥상이 술 마시기가 좋아.”
“엄밀히 말하면 집주인 아주머니 옥상이지만요.”
“그게 그거지!”
민호가 딴죽을 걸자 미래가 그를 흘겨봤다.
그때 묵묵히 고기를 굽던 진하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잔뜩 몰려와도 괜찮나?”
“네, 허락은 받았어요.”
미래가 가져다준 고기 일부를 뇌물로 바치긴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옥상에서 바비큐 파티를 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물론 밤 10시까지라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시험 끝났다면서? 고생했다. 한 잔 받아.”
“아, 넵. 감사합니다.”
민호가 공손히 잔을 들었다.
곧이어 두 번째 건배가 이어졌다.
소주를 맛있게 털어 넣은 미래는 별안간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큰일이네.”
새빨갛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미래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민호와 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또 마인이라도 나타났습니까?”
“아니, 술이 너무 달아서. 내일 볼일 있어서 가봐야 되는데.”
“······.”
시답잖은 고민이었다.
민호는 미래를 무시한 채, 고기를 굽는데 열중했다.
“아, 그리고 이번 임무 말인데.”
그때 진하가 입을 열었다.
“일단 조사는 해봤지만 생각보다 정보가 많이 안 모였다. 대상이 대상이다 보니.”
동물과 관련된 임무는 진하도 처음이었다.
당연히 정보를 모으는 게 어려울 수밖에.
“괜찮습니다. 어차피 내일 직접 접촉해보려고 했거든요.”
“그래? 그럼 다행이지만······.”
진하가 미안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고는 곧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건넸다.
이곳에 오기 전, 나름대로 이번 임무의 정보에 대해 정리한 서류였다.
“일단 소망이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어. 대신 그 주인에 대해선 좀 알아낸 게 있지.”
일전에 공원에서 마주친 여성.
그녀의 이름은 채은희.
올해로 스물여섯 살인 그녀는 후천적 시각장애인이었다.
병이 아닌, 불의의 사고로 인해 양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정폭력 때문이지만.”
진하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은희는 어렸을 적, 의붓아버지의 잦은 폭력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그녀가 열 살이 되던 해에 만취한 아버지가 폭력을 휘둘렀고, 우연히 눈에 들어간 유리조각이 눈을 헤집어서 시력을 잃었다.
‘아니, 세상에 무슨 그런 사람이 있어요?’
“내 말이. 지금은 감옥에 있겠죠?”
이야기를 듣던 메리와 이안이 강한 분노를 표출했다.
진하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기까진 조사하지 못했어. 그래도 지금은 다행히 같이 살지 않는 것 같아.”
현재 은희는 소망이와 둘이서만 지낸다.
은희에 대한 설명을 마친 진하는 술을 들이 킨 뒤, 다음 정보를 전했다.
“그리고 소원에 대해서도 조금 알아봤는데.”
진하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잠시 후,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 여성에게 마인이 하나 붙은 거 같다.”
마인이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이안이 흉흉한 눈빛을 빛내기 시작한 것.
“마인에 대한 정보는 없어. 하지만 얼마 전부터 수상한 남자가 근처를 맴돈다는 얘기가 있다. 실제로 신고가 접수된 적도 있고.”
신고한 이는 가끔씩 은희네 집을 방문하는 봉사자.
그녀의 말에 따르면 비정기적으로 은희의 뒤를 쫓는 남자가 있다고 했다. 어떨 때는 은희의 집 앞에서 그녀의 방을 빤히 쳐다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 말에 메리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그냥 가서 체포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진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단순히 지켜보기만 해서 우리로썬 손을 쓸 수가 없어. 뭔가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니고 가끔씩 나타나서 그냥 바라보기만 하거든.”
진하도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아무튼 이 부분은 내가 좀 더 알아볼게.”
“예, 부탁할게요. 형.”
“그래,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얘기하고.”
“넵!”
진하의 말에 민호는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이내 맞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혜진이 있는 곳.
그녀는 적잖이 배가 고팠던지, 아까부터 아무런 말없이 고기를 흡입하는 중이었다.
이에 피식 웃은 민호는 그녀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혜진아.”
“에, 언애.”
“······입에 있는 건 삼키고 말해도 돼.”
민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혜진은 우물거리던 고기를 그대로 삼켰다.
꿀꺽-
“후, 이제 괜찮습니다. 선배.”
왜 불렀냐는 듯이 쳐다보는 혜진.
그러면서도 젓가락은 놓지 않는 그녀를 바라보며, 민호가 입을 열었다.
“다른 게 아니라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서.”
“부탁이요?”
“응,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임무에 마인이 관련되어 있거든.”
마인이라는 단어가 들리자마자.
혜진이 두 눈을 반짝였다.
“토벌입니까?”
“일단 토벌인 거 같아.”
“협력하겠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그때 이안도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도 동행해도 될까요?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승급할 거 같아서······.”
“그럼. 물론이지.”
민호가 당연하다는 듯이 웃었다.
토벌자 두 명이 도와준다는 말에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중 다시 임무창을 살피던 메리가 홀연히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몽중간섭이라는 건 뭘까?’
몽중간섭(夢中干涉).
생소한 용어에 메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미래가 대답을 대신했다.
“그거? 간단해. 타인의 꿈에 들어가는 거야.”
‘꿈에 들어간다고?’
“응. 임무 받을 때, 보물 하나 받지 않았어? 향초 같은 거.”
‘아, 그러고 보니······.’
메리가 민호를 돌아봤다.
그 시선에 민호는 방에 놔뒀던 향초를 꺼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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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롱한 꿈의 향초]
*등급: 을(乙)
*종류: 소모품
*타인의 꿈속에 들어갈 수 있는 향초.
*불을 피우면 10초 이내에 잠에 빠진다.
*타인의 이름을 적고 향초를 피우면 타인의 꿈속에 들어갈 수 있다.
*다른 이와 손을 잡고 자면, 함께 타인의 꿈속으로 진입한다.
*유효범위: 사용자를 중심으로 반경 10미터
*지속시간: 3시간
*경고: 혼자 있을 때는 결코 사용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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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초는 미래가 말한 것처럼 타인의 꿈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말이 붙어있었다.
“혼자 있을 때는 사용하지 말라고?”
민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자 미래가 부연설명을 했다.
“아, 지속시간 때문에 그래. 향초가 전부 타들어가기 전에 꿈에서 깨야 되니까.”
‘만약에 초가 다 꺼지면 어떻게 되는데?’
메리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간단해. 대상과 함께 꿈속에 갇혀.”
‘뭐? 설마 영원히······?’
“에이, 설마. 그러진 않아. 내 경우에는 한 일주일 정도 갇혀 있었나?”
미래의 말에도 메리의 얼굴에 맺힌 심각한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영원히 갇혀있진 않는 건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일주일이란 시간은 길었으니까.
“괜찮아. 메리가 깨워주면 돼. 정 불안하면 날 불러.”
말을 마친 미래는 소주병을 거꾸로 쥐었다.
후웅-!
바람을 가르는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미래가 씨익 웃었다.
“내가 확실하게 깨워줄게.”
“······잠에서 깨는 게 아니라 뚝배기가 깨질 거 같은데요.”
민호가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던 중 잠자코 고기를 탐하던 혜진이 입을 열었다.
“사부, 고기는 이게 전부입니까?”
어느새 텅 비어버린 불판.
이에 미래는 뭔 소리를 하냐는 듯이 봉지를 들었다.
“설마.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맘껏 먹어. 술도 많으니까 한잔씩 마시고.”
그녀의 말과 함께.
잠시 멈췄던 바비큐 파티에 다시 불이 붙었다.
***
바비큐 파티는 밤 9시쯤 끝이 났다.
혜진이 슬슬 귀가할 시각이 다가왔던 탓이었다.
미래는 내일 일이 있어 일찍 들어갔고, 진하도 추가로 정보를 모으기 위해 서로 돌아갔다. 이안은 그런 진하를 돕는다며 동행했다.
그리고 민호는 공원으로 향했다.
낮에 하지 못했던 산책을 하기 위해서였다.
-히히, 밤 산책은 오랜만이네!
잔뜩 신난 얼굴로 꼬리를 살랑거리는 수박이.
민호는 피식 웃으며 한적한 공원을 걸었다.
그러던 중 그의 곁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이제는 밤에도 제법 덥네.’
티셔츠에 짧은 반자리를 입은 메리.
그녀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민호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완전히 여름이야.”
스멀스멀 시작되는 열대야를 느끼며 공원을 거닐던 중.
별안간 메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응?”
‘아까 네가 말했던 거. 시스템에게 동료라고 했던 거 말이야.’
낮에 옥상에서 말했던 주제를 다시 꺼낸 메리.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그녀는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생각해보니 나부터가 시스템을 인격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단 한 번도.’
메리는 전달자가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협회에 의지해왔다.
임무와 관련된 조언이나 정보도 협회를 통해서 받았고, 그래서 선인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시스템, 즉 선녀도 마찬가지였다.
협회는 선녀를 단순한 시스템으로 규정했고 메리는 이를 충실히 따랐다.
‘이걸 왜 지금 깨달았을까? 협회의 말이 무조건 정답은 아닌데······.’
메리가 제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그러고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먼저 말을 좀 걸어보려고.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잖아?’
설령 반응이 없다고 해도 잃을 건 없었다.
메리의 밝은 모습에 민호는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한 번 해봐. 혹시 알아? 친해져서 나중에 도움이 될지.”
‘맞아. 그래서 나도 미미 스프레이를 꼭 얻고 말거야.’
다소 불순한 목적이 추가로 붙어있었지만 말이다.
피식 웃은 민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민호가 다시 메리를 돌아봤다.
“······근데 넌 집에 안 가냐?”
‘어차피 바로 옆인데 뭐.’
메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광진 유원지 후문에 있는 4성급 호텔로 거처를 옮겼다.
집결지인 미옥의 카페와 가깝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지금 가봐야 할 것도 없어. 심심해.’
현재 메리와 놀아줄만한 이는 없었다.
그나마 민호가 유일했다.
다른 이들은 제각기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으니까.
‘날도 더운데 맥주나 한 잔 더 어때?’
손부채로 바람을 일으키던 메리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민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거절이었다.
“한국에선 개를 데리고 갈 수 있는 술집이 거의 없단다.”
‘뭐 술집까지 가. 그냥 저기 편의점에서 마시면 되잖아.’
메리가 멀리 있는 편의점을 가리켰다.
일전에 미래를 처음 소개받은 편의점이었다. 저기라면 수박이와 함께 가도 상관없으리라.
“으음, 어떻게 할까······.”
‘딱 한 캔만 마시자. 한 캔만.’
계속되는 제안에 민호는 피식 웃었다.
이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어?
별안간 수박이가 자리에 멈춰 섰다.
곧이어 수박이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소리쳤다.
-민호 도령! 저기 봐봐!
“뭐? 어디?”
-저기 의자 쪽!
수박이의 외침에 민호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잠시 후, 민호와 메리의 눈도 수박이와 비슷하게 변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있는 건 여자와 대형견.
바로 임무 대상인 은희와 소망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