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Chapter 25. 마인 집단 (4)
“아니, 아예 마주치지도 마.”
“네?”
“만약에 운 없게 맞닥뜨리면 나한테 꼭 연락하고.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그 정도로 위험한 마인입니까?”
혜진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미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이었다.
“무력도 무력이지만 성격과 능력이 최악이거든.”
“어, 성격이 안 좋나요?”
“안 좋은 걸 떠나서 끔찍한 수준이지. 살인을 저지르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으니까.”
“그 말은······.”
“과거에 살인도 몇 번 저질렀다. 공식화되진 않았지만.”
진하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대답과 함께 주변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용], 강태진은 단순한 변절자를 넘어선 살인자였다.
그런 이를 과연 우리가 상대할 수 있을까?
혜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던 그때.
미래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능력은 천무(天武)라는 건데, 이것도 골치 아파.”
“어떤 능력인데요?”
“평범하다가도 전투에 돌입하면 그냥 살육기계로 변하는 능력.”
“······정말 마주치면 안 되겠네요.”
“맞아. 절대로 마주치면 안 돼. 절대로.”
미래가 진지한 얼굴로 신신당부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민호와 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그러던 중 구석에 있던 혜성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냈다.
혜성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하이드를 쳐다봤다.
“그 강태진이라는 마인이랑 하이드 할아버지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그 질문이 터져 나오기가 무섭게.
“하이드 아저씨.”
“당연히 하이드씨지.”
“아마 30초도 못 버티고 썰릴 걸?”
미래와 미옥, 진하가 차례대로 말했다.
하이드가 이긴다는 것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대답이었다.
한편 하이드는 머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요즘은 기력이 쇠해서 그래도 1분은 걸릴 것 같아.”
“에이, 1분이나 30초나 그게 그거죠.”
미래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혜성은 두 눈을 반짝이며 하이드를 올려다봤다.
“우와! 그럼 하이드 할아버지가 계시면 절대 못 쳐들어오겠네요?”
“당연하지. 그래서 다들 쥐도 새도 모르게 숨어 있잖아.”
미래의 말은 사실이었다.
왕영훈이 토벌된 이후, 마인들의 활동은 일제히 멈췄다. 천계에서 마인 토벌 관련 임무도 내려오지 않았고 변절자의 흔적도 완전히 끊겼다.
전부 하이드의 존재 때문이었다.
“뭐, 그것도 오늘로 끝이지만 말이야.”
“네?”
혜성이 이해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벽시계를 쳐다본 미래가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난 탓이었다.
“하이드 아저씨, 이제 슬슬 일어날 시간이에요.”
“어이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 말에 하이드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 민호의 시야에 들어온 것들이 있었다.
카페 출입문 근처에 놓인 수많은 짐과 캐리어들.
이를 본 민호는 그제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깨달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오늘이······.”
오늘은 하이드가 영국으로 돌아가는 날.
이를 떠올린 민호가 하이드를 쳐다보던 순간, 혜성도 이를 알아차렸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국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그래, 협회의 늙은이들이 작은 사고를 하나 쳐서 수습하러 간단다.”
인자한 미소와 함께 하이드가 대답했다.
그러자 혜상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 그럼 이안 형이랑 메리 누나도 오늘 가는 거예요?”
그간 많은 정이 든 탓일까?
혜성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허, 아니다. 나만 돌아가는 거야.”
너털웃음을 터뜨린 하이드가 혜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안은 아직 할 일이 남았거든.”
이어진 하이드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이안에게 향했다.
멋쩍게 웃으며 뺨을 긁적이는 이안.
“아하하, 스승님께서 숙제를 내주셨거든요.”
“어떤 숙제?”
“5급 토벌자로 승급할 것. 그리고······.”
이안이 말을 마저 이으려던 그때.
하이드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변절자를 셋 이상 토벌할 것.”
“······네?”
“변절자를 셋이나요?”
민호와 혜진이 놀란 듯 물었다.
그러나 하이드는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말을 보탰다.
“물론 여력이 된다면 더 쓰러뜨려도 된단다.”
여유로움이 가득한 모습에 민호가 입을 벌리고 있던 그때.
이안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그 이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저는 하이드 제르코펜의 제자니까요.”
“그래, 기대하마.”
하이드가 만족한 듯이 웃었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다.
“그럼 메리 누나도 숙제가 있나요?”
그때 혜성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에 하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이안만 내주면 불공평하니까.”
‘저는 괜찮습니다만······.’
다이어리에 대답을 적은 메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대답과는 달리, 그녀의 기분은 다소 좋아보였다. 숙제를 내준다는 것 자체가 곧 하이드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뜻이었으니까.
6급 전달자로 승급할 것.
혼자 힘으로 임무를 셋 이상 완수할 것.
이것이 메리의 숙제였다.
1급 토벌자가 내는 숙제답게 만만치만은 않았다.
“와, 메리 누나도 힘들겠네요. 여기까지 와서 임무를······.”
‘어쩔 수 없지.’
메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펜을 놀려 수첩에 뭔가를 적어나갔다.
‘그리고 여기에 머무르는 건 개인적인 이유 때문도 있어.’
“네? 개인적인 이유요?”
‘응, 민호랑 약속을 했거든.’
“나랑?”
자기의 이름이 언급되자 민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
메리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볼을 크게 부풀렸다.
‘뭐야? 벌써 잊었어? 둘이서 술 마시기 했잖아.’
“······아.”
뒤늦게 지난 약속을 떠올린 민호.
그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미안한데 그건······.”
‘설마 한입 가지고 두말하는 건 아니겠지?’
메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잠시 후, 민호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가 먼저 술을 마셔주겠다고 말한 것도 있고, 또 이제 와서 약속을 취소하는 건 매너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잘 마시는 줄 알았으면 그런 말은 안 했지.’
속으로 푸념을 내뱉은 민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중 다시 들려온 메리의 목소리.
‘기대된다. 죽을 때까지 마셔보자. 알겠지?’
오싹-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이라도 약속을 취소하는 게 좋을지에 대해 진지하고 고민하고 있던 그때.
진하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진하는 곧장 하이를 돌아봤다.
“택시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짐을 실어 놓을까요?”
“고맙네, 부탁 좀 하지.”
“네. 민호야. 미안한데 좀 도와줄래?”
“넵, 알겠습니다.”
짐의 양이 꽤 많았기에 민호는 흔쾌히 진하의 요청을 수락했다.
잠시 후, 짐을 정리한 둘이 카페를 나설 무렵.
하이드는 카페에 남은 일행들을 돌아보며 작별 인사를 전했다.
“다시 봐서 즐거웠네, 제인.”
옛 동료이자 전우인 미옥.
그녀를 보며 하이드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미옥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변함없이 건강해보여서 안심했어. 하이드씨.”
“은퇴하고 한 번 더 놀러올 테니 카페 문 닫지 말고 기다리게.”
“후후, 걱정 마. 여기 내 건물이야.”
파격적인 대답을 끝으로.
하이드의 시선은 미래에게 향했다.
“제자를 잘 부탁하네.”
“맡겨둬. 아, 대신 저번에 말했던 대로 좀 험하게 굴릴지도 몰라.”
“기대했던 바입니다. 얼마든지 굴려주시죠.”
이안이 호기롭게 대답했다.
그러자 미래의 눈이 먹잇감을 찾은 고양이처럼 반짝였다.
“정말? 좋아, 그럼 오늘 밤에 당장 술파티를······.”
이어진 미래의 말에 이안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리던 그때.
그를 구원해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찰싹-!
“몸 축나! 작작 좀 마셔, 작작!”
미옥이 미래의 등을 후려치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히잉, 아직 젊어서 괜찮은데······.”
“그렇다고 막 마시면 나중에 훅 가!”
“아, 혹시 아줌마 경험담이에요? 꺅! 아, 아파요!”
미옥의 손바닥이 벽력장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로부터 얼마 후.
모든 일행과 작별 인사를 나눴을 무렵이 되자, 하이드의 짐을 실은 택시가 카페 앞에 도착했다.
이제 정말로 떠날 시간이다.
하이드는 아직 인사를 하지 못한 진하와 민호를 쳐다봤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네.”
“저도 즐거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진하와의 인사는 짧고 굵었다.
서로를 가볍게 끌어안은 둘은 더 이상의 인사를 필요하지 않다는 듯 씨익 웃었다.
뒤이어 하이드의 시선은 민호에게로 가 닿았다.
“미스터 공.”
“네?”
“이안과 메리를 도와줘서 고맙네.”
하이드가 민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런 행동에 민호가 당황할 무렵, 그가 말을 이었다.
“특히 메리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네. 기계적으로 임무만 하던 아이여서 걱정했는데, 자네 덕분에 전달자로서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한 것 같아.”
“에이, 뭘요. 전 딱히 한 게 없는걸요.”
“그래도 고맙다는 말을 해두고 싶었네.”
하이드가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그러고는 민호의 귓가에 대고 살며시 속삭였다.
“그리고 사례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보게.”
“예?”
“지금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줄 테니까.”
인자한 미소를 지은 하이드.
그 모습에 민호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저는 괜찮······.”
“1급 토벌자가 소원을 들어주는 경우는 흔치 않아. 한 번 더 생각해보게.”
전 세계에 단 한 명뿐인 1급 토벌자.
그런 존재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어지간한 소원은 전부 들어줄 수 있으리라.
이에 민호는 입을 닫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로부터 얼마 후.
민호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럼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하이드가 씨익 웃었다.
“무엇을 원하나? 능력? 보물? 아니면 돈? 뭐든 원하는 만큼 주지.”
이어진 그의 말에 민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이드라면 그토록 바랐던 능력, [전귀]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히 욕심이 나긴 했다.
하지만 민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소원이다.
또 그가 지금 들어줄 수 있는 종류의 소원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민호는 지금 이 순간, 하이드가 확실히 대답할 수 있는 소원을 떠올렸다.
“아뇨. 제가 원하는 건······.”
민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곧이어 하이드의 귓속을 파고든 한 마디.
이에 하이드는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정말 그것만으로 만족하나? 후회하지 않겠어?”
“예, 그거면 충분합니다.”
“허허, 특이하군. 난 당연히 돈을 바랄 줄 알았는데······.”
하이드는 미래에게서 민호의 형편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보상의 일부를 돈으로 환전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이드는 저런 대답을 한 것이리라. 이에 민호는 장난스러운 표정과 함께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돈을 원했다면 주실 생각이셨습니까?”
“그야 물론이지. 지금 있는 돈은 전부 주고 갈 생각이었네.”
“엑, 정말요?”
“어차피 100달러밖에 안 되지만 말일세.”
하이드의 대답에 민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조금 흔들리긴 했는데, 그래도 다른 소원을 빌어서 다행이었다.
그가 빈 소원은 적어도 100달러보다는 수십 배 이상의 값어치가 있었으니까.
“알겠네. 자네의 소원은 똑똑히 기억해두고 있지.”
“감사합니다.”
“그럼 건강히 잘 지내게. 다치지 말고.”
하이드의 덕담에 민호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날 밤.
1급 토벌자, 하이드가 한국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