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Chapter 25. 마인 집단 (2)
사흘간의 축제가 끝난 뒤.
민호의 주변에는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우선 주된 임무였던 변절자 왕영훈의 토벌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
정작 토벌을 한 건 혜진과 이안이었지만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는 따로 있었다.
바로 영훈의 위치를 제보하고 그를 붙잡아뒀던 민호.
혜진과 이안은 이를 인정하듯, 토벌로 받은 보상을 모두 민호에게 양도했다. 하이드 또한 제자가 변절자 토벌을 완수한 것에 대해 따로 감사의 인사를 전할 정도였다.
여기까지는 민호도 예상했던 바였다.
그런데 문제는 남은 한 가지 변화.
민호에게는 썩 달갑지 않은 종류의 변화였다.
“후우.”
민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 심신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클래식 멜로디가 카페 안을 맴돌았다.
하지만 민호의 얼굴에 맺힌 심란한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재차 한숨을 내쉰 민호가 반쯤 남은 커피를 마저 들이킬 무렵.
“언니, 언니.”
맞은편에서 밝은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10대 후반의 소녀.
짧은 청반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소녀는 잔뜩 신이 난 듯, 흥분이 깃든 음성으로 재잘거렸다.
“이것 좀 봐. 벌써 30만이 넘었어.”
“정말?”
그러자 옆에 있던 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순해 보이는 스프라이트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었다.
“30만이면 대단한 거 아니야?”
“그치. 이제 3일 지났는데 이 정도면 엄청난 거지!”
흥분이 깃든 소녀의 외침에 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오빠 노래 실력이 엄청나긴 했어.”
“맞아, 맞아. 진짜 대단했지.”
그 말을 끝으로.
둘의 시선이 민호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민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한 번 한숨을 뱉어냈다.
“에휴, 내가 미쳤지. 거기서 왜 나대서는······.”
“나대는 게 아니라 그냥 다 씹어 드셨죠.”
티셔츠를 입은 소녀, 지은이 민호의 말을 정정했다.
게다가 하영도 말을 보탰다.
“맞아. 제이라고 했던가? 그 분도 엄청 놀라셨잖아요.”
“응, 엄청 놀랐대. 설마 일반인이 이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다면서······.”
지은이 맞장구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둘은 민호의 반응은 상관하지 않은 채, 연신 노래 실력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워나갔다. 이에 민호가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내쉬던 무렵.
하영이 별안간 뭔가를 떠올린 듯 손뼉을 쳤다.
“아, 오빠.”
“응?”
“외삼촌이 밥 한 번 먹자고 전해달래요.”
“대표님이? 왜?”
민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하영의 외삼촌인 성철과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지은의 운전기사로 일할 때, 2주 남짓 되는 기간 동안 얼굴 서너 번 본 게 다였다.
그런데 웬 뜬금없이 식사 제안을 한단 말인가?
“영상 보시더니 제대로 한 번 키워보고 싶다고······.”
“일 없다.”
실상을 파악한 민호는 칼처럼 대답했다.
그 대답에 지은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외쳤다.
“왜요? 그 정도 실력이면 조금만 준비하면 바로 데뷔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내 실력이 아니야. 그냥 뽀록이야, 뽀록.”
“에이, 뭐가 뽀록이에요. 그런 것치고는 엄청 쉽게 부르셨으면서.”
“맞아요. 엄청 여유로워 보이셨는데.”
지은과 하영이 민호를 빤히 쳐다봤다.
의아함이 가득 담긴 눈빛.
둘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민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선을 그었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그만. 난 평범하게 살 거야.”
그의 말에 지은이 순간적으로 묘한 표정을 지었다.
“평범한 삶은 힘들 거 같은데요.”
“뭐?”
“지금 이 상황부터가 평범하지 않잖아요?”
“······그건 또 뭔 소리야?”
민호가 묻자 지은은 싱긋 웃으며 하영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미래에 톱스타가 될 여자와 피아니스트의 정점에 오를 여자, 그 둘과 함께 데이트를 하고 있다는 시점에서요.”
“네, 데뷔 준비하는 연습생이랑 피아노학과 신입생 말씀 잘 들었습니다.”
민호는 같잖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지은의 얼굴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가 맺혀있었다.
“후후, 그 말 취소하셔야 할 거예요.”
“왜?”
민호가 심드렁하게 되묻던 그때.
별안간 지은이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데뷔가 확정됐거든요.”
“······무, 뭐?”
“정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민호와 하영.
지은은 그런 둘을 마주보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네, 앨범 작업도 이제 끝났어요.”
“진짜? 왜 그동안 말 안 했어?”
“헤헤, 언니랑 오빠한테 제일 먼저 알려드리고 싶어서······.”
뺨을 긁적인 지은이 멋쩍게 웃었다.
“두 분이 저한테는 둘도 없는 은인이거든요. 그래서 꾹꾹 참았죠.”
“지은아······.”
하영의 커다란 눈동자에 물기가 맺혔다.
민호도 괜스레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이제 막 출발선에 선 지은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뿌듯한 기분이 들었던 탓이었다.
“맞아. 데뷔가 확정됐다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케이크라도 하나 사와야 되는 거 아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민호가 하영의 말을 받아 물었다.
둘의 반응에 지은은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에이, 됐어요. 배불러요.”
“그래도······.”
“정 그러면 나중에 제 생일 때나 챙겨주세요.”
생일을 언급한 지은이 눈을 힐끗거렸다.
민호에게로 향하는 눈빛.
이를 인지한 민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그래. 초콜릿 장식 두 개 달린 거로 말이지?”
“히히, 네!”
지은이 활짝 웃었다.
오늘 본 미소 중에서 가장 밝은 미소였다.
반면 하영은 둘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지은의 시선이 하영에게로 향했다.
“아, 그러고 보니 언니도 다음 주에 연주회 있다고 했지? 어디였더라?”
“이탈리아?”
“맞아! 이탈리아였지.”
“으응, 원래는 조금 늦게 한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일정이 당겨져서······.”
하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민호가 놀란 듯이 되물었다.
“이탈리아? 거기까지 가서 연주회를 한다고?”
“당연하죠. 하영 언니는 잡지에 실린 적도 있으니까요.”
지은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하영의 업적과 재능을 칭찬했다.
칭찬에 낯선 탓인지, 하영은 귀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민호는 신기하다는 듯이 하영을 쳐다봤다.
“그렇구나. 이야, 대단한데? 전혀 몰랐어.”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잘 치긴 했다.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까 유명 피아니스트 부부가 입양을 해간 것이겠지.
그런데 세계적인 음악 잡지에 실릴 정도로 유명인일 줄은 몰랐다.
민호가 솔직히 감탄하자 지은은 다시 한 번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후후. 그렇죠? 아얏!”
“······거기까지. 이제 그만 말해.”
민망함을 견디지 못한 걸까?
하영이 지은의 옆구리를 꽉 꼬집었다.
우우웅-!
그때 테이블이 가늘게 진동했다.
누군가의 휴대폰이 울리고 있는 것이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의 주인은 곧 밝혀졌다.
“아······.”
하영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 찰나, 휴대폰 화면에 ‘어머니’라는 세 글자가 보였다. 하영은 말없이 휴대폰을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죄송한데 잠깐 전화 좀 받고 와도 될까요?”
“당연하지, 다녀와.”
민호의 대답과 함께, 하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전화를 받을 생각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그랬지.’
문득 떠오른 기억.
하영이 유명 피아니스트 부부에게 입양된 이후,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바로 하영이 지나치게 양어머니를 멀리 한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양어머니 역시, 특이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 이름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정확히 말하면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또 하영이한테도 상당히 집착이 심했지.’
통금시간이 조금이라도 지나면 어떻게든 하영을 찾아내서 데리러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하영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결국 참다못한 민호가 몇 번이고 고민을 털어놓으라고 말했지만, 그때마다 하영은 괜찮다는 듯이 웃었다.
그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민호는 하영의 고민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게 민호가 하영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민호 오빠.”
별안간 들려온 지은의 목소리.
상념에서 깨어난 민호는 고개를 돌렸다.
“응? 우왓!”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지은의 모습에 민호는 식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지은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뭐예요. 그런 표정을 지을 것까진 없잖아요.”
“깜짝 놀랐잖아!”
“그래도요. 아,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민호가 되물었다.
이에 지은은 조금 진지하게 변한 눈빛으로 질문했다.
“오빠, 하영 언니랑은 어떤 사이에요?”
“하영이?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요.”
지은의 말에 민호는 잠시 동안 고민에 잠겼다.
하영이 지은에게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감이 오질 않았던 탓이었다.
‘같은 보육원 출신이라는 걸 말했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추측한 대답은 ‘아니다.’였다. 입양을 간 아이들은 하나같이 보육원 출신이라고 밝히는 걸 꺼려했었으니까.
분명 하영도 예외는 아닐 터다.
그래서 민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내놓았다.
“음, 나랑 엄청 친한 여동생. 가족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친해.”
“여동생이요?”
“응, 거의 친동생이나 다름없지.”
민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 순간!
지은의 표정이 일순간 밝게 물들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에 민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 이걸로 대답이 된 거야?”
“히히, 네!”
지은이 씩씩하게 소리쳤다.
그 이후부터는 특별할 것이 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연습할 때 시혁 프로듀서가 얼마나 깐깐한지, 또 데뷔 준비하느라 맛있는 음식도 못 먹는다든지 같은 이야기들.
지은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그리고 하영이 돌아온 건 그로부터 약 10여분 정도가 지난 뒤였다.
그녀는 사라지기 전보다 훨씬 수척해진 얼굴로 돌아왔다.
“오빠. 죄송해서 어쩌죠. 저,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일어나야 할 거 같은데······.”
미안하다는 듯 울적한 표정을 짓는 하영.
그 모습에 민호는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같이 일어나자. 나도 슬슬 가야할 시간이라서.”
민호의 시선이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4시.
다음 약속시간이 5시라는 걸 감안하면, 지금쯤 슬슬 나가야하리라.
“힝, 이렇게 헤어지긴 아쉬운데······.”
하지만 지은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못내 아쉬운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모습에 하영은 지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미안, 나중에 또 보자. 너 데뷔하고 나서.”
“그때 파티나 하자. 동생들이랑 할머니도 모시고.”
“우와, 정말요?”
“그래, 그래.”
신이 난 듯이 묻는 지은의 모습에 민호는 씨익 웃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사이좋게 카페를 나선 셋은 각자 갈 길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
짧은 만남을 끝으로.
민호가 향한 곳은 미옥의 카페였다.
딸랑-
카페 안은 한산했다.
약속시간이 다가와서 그런지 일반 손님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다른 일행들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엥? 내가 제일 빨리 왔나?”
이제 10분만 더 지나면 오후 5시다.
그런데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민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부스럭-
그때 주방에서 들려온 소리.
잠시 후, 낯익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