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Chapter 23. 영국의 전달자 (4)
“후우, 후우우!”
짧은 호흡을 몇 마디 내뱉은 창현.
한편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탓일까?
아이의 낯빛은 도화지처럼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괘, 괜찮니?”
창현은 걱정스런 얼굴로 아이를 쳐다봤다.
그러자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인 아이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으, 으아아앙! 엄마아아!”
정신이 돌아오자 울음이 터졌다.
창현은 안절부절 못하며 아이를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금세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주부가 달려왔다.
“석민아, 괜찮아. 엄마 여기 있으니까 이제 괜찮아.”
“아니, 지금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
“와, 진짜 큰일 날 뻔했네. 다치지 않은 게 다행이여.”
상황이 마무리되자 이를 지켜보던 주민들이 뒷수습을 위해 다가왔다.
금세 부산스러워진 현장.
이 광경에 메리는 굳게 닫았던 입술을 달싹였다.
‘아이가 놀랄 만도 해. 그래, 저 상황에선 아이를 달래는 게 최우선이지. 하지만······.’
메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도로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창현을 응시했다.
‘그래도 누구 한 명 정도는 저 사람을 챙겨줘도 괜찮지 않아?’
엄마와 주부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남자아이.
몇몇 주민들은 오토바이 라이더를 향해 성토를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창현에게 선뜻 손을 내미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주저 없이 달려 나가 아이를 구한 그를 신경 쓰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메리는 성을 냈다.
그때 민호가 돌연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가 하면 돼.”
‘뭐?’
메리가 되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민호는 걸음을 옮겨 창현에게 다가갔다.
“괜찮은가?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창현에게 손을 뻗은 민호.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창현은 이내 씨익 웃었다.
“그럼요. 멀쩡합니다. 윽!”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창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빨갛게 부어오른 왼쪽 발목.
곤란한 듯이 웃는 창현의 모습에 민호는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미안하네. 괜히 우리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 정도면 하루면 나을 겁니다.”
“그래도 내 너무 미안해서······. 그래, 이거라도 가져가게.”
말을 잇던 민호는 주머니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창현에게 전달할 기적, ‘만년설 크림’이었다.
“저, 이건······?”
“우리 아들도 총각처럼 흉터가 있거든. 아들 주려고 몇 개 챙겨왔는데, 총각한테도 하나 줄게. 제법 효과가 좋으니까 꼭 바르게나.”
민호가 미리 준비한 멘트를 술술 내뱉었다.
그러던 중 상황을 지켜보던 메리가 그의 허리를 콕 찔렀다.
‘이것도 전해줘.’
메리가 건네준 건 만년설 크림과 비슷한 연고.
분홍색 뚜껑을 열자 복숭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목에 바르면 금방 나을 거야.’
아무래도 공덕 상점에서 구매한 보물인 것 같아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민호는 짧게 헛기침을 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크흠! 그리고 이건 발목에 바르면 좀 괜찮아 질 걸세.”
“하지만 제가 이걸 받아도······.”
“괜찮으니까 어여 받아. 우리는 많이 있으니까.”
민호는 창현의 손에 억지로 보물을 쥐어주었다.
그때 멀리서 남자아이와 엄마가 창현에게 다가왔다. 감사인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이를 발견한 민호는 뒤로 살짝 물러섰다.
“착하게 살아줘서 고맙네. 복 많이 받고, 앞으로도 행복하시게.”
마음속에서 우러난 한 마디.
진심이 담긴 덕담과 함께 민호는 몸을 돌렸다.
창현은 감사인사를 하기 위해 민호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곧이어 도착한 남자아이와 엄마에게 붙들려 감사인사를 듣는 탓에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사이.
민호와 메리는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처럼.
***
끼이익-
현관문이 낡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무도 없는 방 안.
걸음을 들여놓은 이는 바로 창현이었다.
이어 신발을 벗던 중, 창현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윽!”
왼쪽 발목이 시큰거리며 아팠다.
신발을 벗고 자세히 보니 퉁퉁 부어있는 발목.
창현은 절뚝거리며 침대까지 몸을 옮겼다.
“후우.”
침대에 몸을 기대자 그제야 좀 나아진 것 같았다.
짧게 한숨을 뱉어낸 창현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새하얗게 빛나는 형광등을 멍하니 보고 있노라니,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유영했다.
“어제랑 똑같은 하루라고 생각했는데······.”
하루 사이에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왠지 모르게 시선이 가는 노부부를 도와준 일부터 오토바이에 치일 뻔한 남자아이를 구한 일까지. 비록 발목을 심하게 삐긴 했지만 이 정도면 값싼 대가였다.
“아이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감사하다고 말했던 아이와 엄마.
둘의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금 안도의 미소가 맺혔다.
잘됐다. 그렇게 생각할 무렵, 창현의 휴대폰이 가늘게 떨렸다.
[수진]: 나 이제 퇴근 ㅠㅠ
[수진]: 집에는 잘 들어갔어??
화면에 떠오른 수진이라는 이름.
이를 본 창현의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박수진. 흔하다면 흔한 이름을 가진 그녀는 창현의 어릴 적 친구였다.
그리고 단순한 친구사이는 아니었다.
“좋아했었지. 아주 많이.”
그는 수진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좋아한다는 한 마디를 하지 못했는지.
창현은 피식 웃었다.
당시 그녀에게 고백을 하지 못한 건 창현이 가진 유일한 후회였다. 왜냐면 수진은 중학교를 졸업하기 몇 달 전, 외국으로 이사를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우연히 소식이 닿아, 다시 연락을 하게 됐다.
그리고 놀랍게도 수진은 3년 전부터 한국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창현은 순간적으로 밥이나 한 끼 먹자고 제안을 했고, 수진은 흔쾌히 이에 응했다.
수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창현은 분주히 손가락을 놀렸다.
[창현]: 응, 나도 방금 퇴근했어 ㅋㅋ
[수진]: 헉, 진짜?
[수진]: 근데 택배기사들은 좀 더 일찍 퇴근하지 않아?
[수진]: 오후 6시 이후에 배달받아본 적이 없는데······.
[창현]: 아니야, 평소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창현]: 그리고 오늘은 유독 바쁘더라고 ㅎㅎ
[수진]: 그랬구나.
[수진]: 너도 고생이 많다 ㅠㅠ
시답잖은 대화.
그래도 수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만으로 발목의 통증이 잊혀졌다.
창현은 연신 미소를 띤 채 손가락을 놀렸다.
그러던 중 돌연 그의 손가락이 멈췄다.
[수진]: 와, 진짜 너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다.
[수진]: 중학교 때 엄청 훈남이었는데 ㅋㅋㅋ
창현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잠시 후, 그의 손가락이 뺨을 긁었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화상 흉터. 이게 생긴 지 벌써 10년도 넘게 지났다. 그래서 아이들이 괴물이라고 놀려도 웃으며 털어버렸다.
하지만 수진과 만나기로 한 날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금이라도 말하는 게 좋을까.”
그러나 선뜻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만약 말했다가 약속 자체가 취소된다면?
물론 그가 기억하는 수진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었다.
창현은 씁쓸한 표정으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의 입술을 비집고 두려움으로 휩싸인 본심이 흘러나왔다.
창현의 얼굴에 화상 흉터가 생기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십여 년 전.
그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였다.
초겨울 정도로 기억했는데, 당시 창현의 옆집에서 큰 불이 났다.
창현은 무사히 집에서 빠져나왔지만 거동이 불편했던 아버지는 아직 나오지 못한 상태. 이에 창현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창현의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
그 결과, 창현은 아버지를 구하는데 성공했다.
그가 나오자마자 집은 폭삭 무너져 내렸고, 이웃들은 모두 기적이라며 입을 모았다.
하지만 기적의 대가는 잔혹했다.
창현의 얼굴 절반, 그리고 어깨까지 흉측한 화상 흉터를 남긴 것.
그래도 창현은 당시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흉터와 맞바꿔서 아버지를 구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진]: 나도 집 도착!
[수진]: 씻고 올 테니까 자지 마.
[수진]: 이따 전화나 하자.
그 톡을 끝으로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대화.
휴대폰을 멍하니 쳐다보던 창현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씨익 웃었다.
“그래. 뭐 그냥 밥이나 한 끼 먹고 헤어지면 되지.”
솔직히 말하면 수진에게 아직 마음이 좀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고백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에서 나온 감정.
창현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워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워낙 많은 생각을 한 탓일까?
창현은 본인이 다리를 삐끗했다는 사실조차 깜박한 듯했다.
“으윽!”
발목의 통증과 함께 다시 침대에 주저앉은 창현.
한동안 침대를 구르던 중,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저건······.”
은은한 복숭아 향이 맴도는 연고.
오늘 도와준 노부부에게서 받은 약이었다.
“저거라도 좀 발라볼까?”
집에는 마땅히 발에 바를만한 약이 없었다.
연고를 집어든 창현은 뚜껑을 열었다.
곧이어 잘 익은 복숭아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아직 저녁을 먹지 않은 탓인지, 냄새만 맡았을 뿐인데 군침이 돌 정도다.
“어? 꽤 차갑네.”
창현이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연고가 냉장고에 넣어둔 것처럼 차가웠던 탓이었다. 창현은 손가락으로 연고를 살짝 덜어낸 뒤, 왼쪽 발목에 발랐다. 그러자 시원한 감각과 함께 발목이 후끈거리기 시작했다.
“크, 이거 효과 끝내주네. 무슨 파스 같은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때.
발목을 감싼 후끈거림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사라진 건 열기뿐만이 아니었다.
“어?”
통증이 사라졌다.
거기에 붓기마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말이다. 창현은 놀람을 넘어 당혹스럽게 물든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빨리 낫는다고? 진짜로?”
용기를 내어 바닥에 발을 내딛었지만 통증은 없었다.
창현이 두 눈을 호기심으로 빛내던 그때.
문득 그의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자, 잠깐. 그럼 혹시······.”
노부부에게서 받은 건 하나가 더 있었다.
화상에 좋다는 연고. 이를 떠올린 창현은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찾았다!”
만년설 크림.
조금 촌스러운 궁서체로 적힌 연고의 이름이었다.
뚜껑을 열자 곧 눈처럼 흰 연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창현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뒤, 손가락으로 연고를 덜어냈다.
손끝을 간질이는 차디찬 냉기.
창현은 조심스럽게 연고를 화상 부위에 펴서 발랐다.
“윽!”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 창현.
그도 그럴 것이, 이건 발목에 바른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차가웠다.
하지만 한 가지, 신기한 점이 있었다.
그냥 슥슥 발랐을 뿐인데 화상 흉터 부위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는 것.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발목처럼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그저 흉터 부위에 조금 개운한 기분이 느껴졌을 뿐.
“하긴 이것까지 효과가 좋을 리는 없겠지.”
피식 웃음을 터뜨린 창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진은 한 번 전화하면 말이 꽤 많은 편이다. 조금이라도 더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두려면 얼른 씻어야만 했다.
곧이어 샤워실의 문이 닫히고, 뜨거운 물줄기가 그의 몸을 적셨다.
***
다음날, 새벽 5시.
삐비비빗- 삐비비빗-
알람소리가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이제 막 세 번째 울음소리를 내뱉으려던 찰나, 창현의 커다란 손이 휴대폰을 덮쳤다.
툭-!
정적만이 맴도는 방 안.
잠시 후, 창현의 하품소리가 울려 퍼졌다.
“흐아아아암.”
늘어지게 하품을 내뱉은 창현이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할 일이 많았다. 늑장을 부릴 시간은 없었다.
창현은 기지개를 피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침대 위에 이상한 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