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Chapter 23. 영국의 전달자 (1)
Chapter. 23
영국의 전달자
이틀 뒤, 월요일.
민호는 오전 강의가 끝나자마자 마포구에 있는 호텔로 향했다.
임무를 시작하기에 앞서, 영국의 전달자인 메리와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죄송하지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곧 내려갈게요.
메리에게서 온 문자.
휴대폰을 덮은 민호는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중, 민호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나저나 다른 애들은 잘 하고 있을까?”
혜진과 혜성, 그리고 이안은 마인 토벌을 맡았다.
그것도 평범한 마인이 아니다. 전직 신의 대리인이었던 변절자들.
민호는 그들 중 하나인 ‘주효진’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변절자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율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괜한 걱정이에요. 하이드님이 함께 계시잖아요?”
그녀의 말은 타당했다.
셋의 곁에는 1급 토벌자와 2급 토벌자가 붙어 있으니까.
“저희는 저희 임무에나 집중하면 돼요.”
율이 방긋 웃었다.
강한 확신이 어린 대답을 듣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민호는 기지개를 짧게 편 뒤,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을 가만히 응시했다. 임무라고 하니, 불현 듯 어떤 ‘문제’하나가 떠올랐다.
“그런데 대화를 어떻게 주고받아야 되지······.”
메리는 말을 하지 못한다.
수첩을 통한 대화가 소통의 전부다.
한편 민호의 중얼거림을 들은 율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첩으로 하면 되잖아요? 손도 제법 빠른 것 같던데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영어를 못해.”
“에이, 그래도 조금은 하실 줄 알잖아요?”
“아예 못해.”
“조금도요?”
“응.”
민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율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주인님, 대체 대학은 어떻게 들어가신 거예요?”
“······군대 다녀와서 다 까먹어서 그래. 나도 수험생 때는 제법 잘 했다고.”
민호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투덜거렸다.
“아무튼 어떡하지? 아, 혹시 통역과 관련된 보물은 없어?”
“언어와 관련된 보물은 비싸요. 아무리 싸도 1만 공덕은 넘을 걸요?”
터무니없는 가격이다.
민호의 낯빛이 어둡게 물들자 율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에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 불안하면 제가 통역해드릴게요!”
“넌 영어 할 줄 알아?”
“후후, 적어도 주인님보다는 잘 할 걸요?”
의외로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는 율.
민호가 믿음직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던 그때.
딩동-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뒤이어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짙은 갈색머리카락을 질끈 올려 묶은 녹색 눈동자의 여성. 시원해 보이는 하늘색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그녀, 메리 기어드.
어제 카페에서 봤던 영국의 전달자였다.
그러던 중 민호를 발견한 메리는 옅은 눈웃음과 함께 그에게 다가왔다. 민호는 그런 메리를 쳐다보며 입가를 살짝 들어올렸다.
무척이나 굳어있는 미소였다.
“하, 하이. 헬로우. 굿 에프터 눈. 나이스 투 미츄.”
민호의 입에선 미소만큼이나 딱딱한 발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율이 혹시나 하는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다음에는 하우 아 유? 아임 파인 땡큐인가요?”
“헉, 어떻게 알았어?”
“······주인님, 그냥 제가 통역할게요.”
놀란 듯 묻는 민호를 보며 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그때, 메리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상아색으로 반짝이는 팔찌.
그녀가 팔찌를 내밀자, 민호는 반사적으로 이를 받아들었다.
이어 메리의 손짓을 따라 팔찌를 손목에 걸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안녕하세요. 제 목소리 들리시나요?’
“어, 어어?”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민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를 통해서 들렸다고 하기 보단,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것 같은 느낌. 이는 흡사 비단의 목소리를 듣는 것과 비슷했다.
그럼 남은 문제는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인데, 이를 파악하는 건 의외로 간단했다.
지금 호텔 로비에 있는 건 민호와 메리가 전부였으니까.
“설마······.”
눈을 휘둥그레 뜬 민호가 메리를 쳐다봤다.
동시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들리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실제로 써보는 건 처음이라 조금 불안했었는데······.’
메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민호의 손목에 걸린 팔찌를 가리켰다.
‘그건 제 사념을 전달하는 보물이에요. 설령 언어가 달라도 자동으로 번역이 되죠. 사념에 언어는 필요 없으니까요.’
메리의 설명에 민호는 신기하다는 듯이 팔찌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그냥 평범하게 말하시면 돼요. 말씀하신 내용은 제게 자동으로 번역이 돼서 들리거든요.’
“그건 다행이네요. 사실 제가 영어를 잘 못해서······.”
‘그런 것 치고는 인사가 능숙하시던데요?’
“딱 거기까지만 가능해요. 아임 파인 땡큐까지요.”
민호가 머리를 긁적이자 메리는 입을 가린 채 웃었다.
소통이 해결되자 이제 망설일 건 없었다. 민호는 휴대폰을 꺼내들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임무에 대해 공유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리고 그 전에 말을 편하게 하죠. 민호와 저는 동갑이잖아요?’
메리의 제안에 민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후후, 이제 좀 편하네. 아, 혹시 점심 먹었어?’
“아니, 아직.”
‘그럼 나랑 같이 먹자. 임무 이야기는 그 다음에. 어때?’
마침 배도 고픈 참이었다.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민호는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민호는 메리와 인근 카페로 향했다. 차가운 얼음이 담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던 중, 별안간 메리의 목소리가 뇌리를 울렸다.
‘사실 나는 덤이야.’
“덤?”
뜬금없는 말에 민호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응, 그냥 따라온 사람. 게스트라고 하면 이해돼?’
“아아······.”
이어진 말에 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자하는지 눈치를 챈 탓이었다.
하이드가 한국을 찾은 이유는 제자인 이안의 성장을 위해서다. 한국에만 있는 변절자를 토벌하고 경험을 쌓는 게 주된 목적.
반면, 메리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함께 협력해서 임무를 하는 이유나 목적도 알려주지 않았다.
민호가 보기엔 그냥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이안과 관련해서는 삼십 분도 넘게 떠들던 하이드가, 메리와 관련해서 한 말은 고작 ‘메리를 잘 부탁하네.’라는 한 마디 뿐이었으니.
‘그러니까 임무는 민호 혼자서 해도 괜찮아. 난 그냥 호텔에 있어도 돼.’
메리도 스스로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지, 쓰게 웃었다.
그녀의 낯빛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때 민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뭔 소리야? 당연히 너도 도와야지.”
‘어?’
“이건 공동임무잖아. 설마 호텔에서 쉬면서 보상만 받을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 그럴 생각은······.’
“그럴 생각이 아니라면 뭐라도 도와. 정 도울 게 없으면 따라와서 한국의 전달자가 일하는 방법이라도 구경해.”
민호가 씨익 웃었다.
“호텔에 있는 것보단 훨씬 재밌을 걸?”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탓일까?
메리는 멍한 얼굴로 민호를 응시했다.
잠시 후, 메리는 얼굴에 떠오른 온갖 감정을 추스른 뒤,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민호는 상냥한 사람이구나.’
“맞아. 거기에 잘생기기까지 했지.”
민호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장 피드백이 돌아왔다.
‘그건 아니야.’
“주인님, 그건 아니에요.”
메리와 율이 동시에 대답했다.
단호한 표정은 덤이었다.
“······분위기 좀 풀어보려고 농담해본 건데, 둘 다 너무한 거 아냐?”
민호의 대답에 두 여성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민호의 농담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메리의 낯빛에 걸려있던 어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메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동행할게.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
“잘 생각했어.”
민호가 씨익 웃었다.
이어 민호는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럼 이제 임무에 대해 설명해줄게.”
그러고는 진하에게서 받은 문자를 화면에 띄웠다.
-대상의 이름은 박창현.
-마포구 일대에서 일하는 택배 기사다.
-주변 평판은 상당히 좋은 편이야.
-추가 정보는 첨부파일에 적어뒀으니 확인해둬.
민호는 진하의 문자를 육성으로 말해줬다.
잠시 후, 메리는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
‘한국은 이런 식으로 정보를 전해 받는구나.’
“응? 원래 다들 이런 거 아니야?”
‘우리는 조금 달라.’
메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머금은 뒤, 말을 이어나갔다.
‘관찰자는 협회에 정보를 공유하고, 협회가 전달자에게 정보를 전해.’
“협회? 그게 뭐야?”
‘신의 대리인들이 모인 집단. 음, 여기로 말하면 그 카페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야.’
메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미국 등의 서양 국가에는 협회라는 게 존재했다.
일명 신의 대리인 협회.
협회는 은퇴한 신의 대리인들이 운영하는 사조직이자 교류 모임이다.
각 협회에 소속된 신의 대리인들은 협회를 통해 임무와 정보를 주고받는다. 가끔 임무에 문제가 생기면, 협회가 다른 직군의 신의 대리인들에게 협력을 요청하기도 한다.
메리의 설명에 민호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꽤 체계적이네.”
‘맞아. 하지만 불편한 점도 있어. 한 다리 걸쳐서 정보가 전달되다보니, 가끔 누락이 되기도 하는 거지. 그래서 임무도 한 번 실패할 뻔했고.’
하지만 메리는 협회에 대해 부정적인 듯했다.
실제로 그녀는 이후로도 협회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임무 보상인 공덕의 3할 가량을 수수료로 가져간다는 것과, 정기적으로 모여 친목을 다지는 게 귀찮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메리의 수다를 듣던 중, 민호는 시계를 힐끗 쳐다봤다.
“다 마셨으면 슬슬 일어나자.”
‘응? 어디를?’
“당연한 걸 뭘 물어? 임무하러 가야지.”
‘벌써?’
메리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 임무는 마감 기간이 없잖아? 서두르지 않아도 되지 않아?’
“마감이 없더라도 대상은 하루빨리 기적을 원하고 있을 테니까.”
민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는 그간 수많은 임무를 해오면서 많은 걸 느꼈다.
그 중에서 가장 절실하게 깨달은 건, 설령 마감이 없더라도 임무를 미뤄선 안 된다는 것. 선인들에게 기적을 얼마나 빨리 전해주느냐에 따라 그들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메리는 민호의 태도를 다른 방향으로 이해한 듯했다.
‘한국인들은 일에 중독됐다고 하는데, 전달자까지도 그럴 줄은 몰랐네. 하긴 그러니까 차미래 같은 토벌자가 탄생할 수 있는 거려나?’
메리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악의는 없어 보이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기분이 나쁘게 들렸기에 민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튼 난 임무하러 간다. 피곤하면 안 따라와도 돼.”
‘아냐, 나도 따라갈래. 여기 있는 것보단 덜 심심하겠지.’
메리가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민호와 함께 카페를 나섰다.
***
민호와 메리가 도착한 곳은 마포구에 있는 아파트 단지.
대상이 자주 택배를 배달하러 곳이었다. 민호는 아파트 입구에 선 채,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을 면밀하게 살폈다. 그 행동에 메리는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혹시 여기서 계속 기다릴 생각은 아니지?’
“응? 맞는데?”
‘진짜? 대상이 올 때까지 여기 있을 거라고?’
메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의 반응에 민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제일 마주칠 확률이 높으니까.”
하지만 민호의 대답은 메리를 납득시키지 못했다.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냥 관찰자한테 좀 더 알아보라고 하면 되잖아. 아니, 애초에 대상의 위치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게 관찰자가 할 일이야. 이건 네가 할 일이 아니라고.’
“뭐 바쁘면 서로 돕고 사는 거지.”
민호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설령 이게 관찰자가 할 일이라고 해도, 민호는 굳이 따질 생각이 없었다.
진하에게는 신세를 많이 졌기 때문이었다.
수박이를 맡아주기도 했고, 종종 식료품이나 고기를 사들고 자취방을 찾기도 했으니까.
그러던 그때였다.
“주인님! 저기 저 사람 같은데요?”
두 눈을 반짝인 율이 손가락을 뻗었다.
곧이어 민호와 메리의 시선이 그녀의 앙증맞은 손가락을 따라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