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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전해드립니다-78화 (78/182)

78화

Chapter 21. 천계 행상인 (1)

Chapter. 21

천계 행상인

5월 17일 금요일.

계절상으로는 아직 봄이었지만 무더운 오후.

예종대학교 앞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주말을 앞두고 술을 마시러 가는 무리도 있었고, 다음 주에 시작될 축제 준비에 한창인 이들도 있었다. 물론 삼삼오오 무리를 짓는 이들과는 달리, 홀로 도서관이나 집에 향하는 이들도 간간이 보였다.

정문 앞 벤치에 앉은 한 여성도 마찬가지로 혼자였다.

“쩝, 앞으로 20분이나 남았네.”

두꺼운 후드티를 반쯤 풀어헤친 채, 멍하니 시계탑을 바라보는 여성.

그녀는 다름 아닌 주효진이었다.

“거참, 요즘 대학은 뭐 이리 수업이 길어?”

효진의 시선이 향한 곳은 집헌관.

주로 인문대 수업이 많은 건물이었다. 그녀는 건물 밖으로 나오는 학생들 하나하나를 면밀히 살폈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그때였다.

우우웅-!

갑작스럽게 걸려온 전화. 효진은 휴대폰을 쳐다보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쯧! 이 아저씨는 왜 또······.”

[곰]이라고 표시된 발신인.

효진은 머리를 긁적인 뒤, 전화를 받았다.

“어, 왜요?”

-철수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낮은 음성.

효진은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아니, 다짜고짜 전화해서 뭔 소리요?”

-예종대 앞에 있는 거 다 안다. 당장 철수해.

“그걸 아저씨가 어떻게······.”

깜짝 놀란 얼굴로 말을 흐리던 그때, 효진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설마 또 [오리]요? 고 계집애가 그 새를 못 참고 일러바쳤어?”

효진이 씩씩거리며 말하자 [곰]은 잠시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잠시 후, 딱딱하게 굳은 음성으로 물었다.

-문미영, 알고 있지?

“하아. 이보쇼, 아저씨.”

한숨을 푹 내쉰 효진.

그녀는 이어 얼굴을 구긴 채 으르렁거렸다.

“내가 아무리 기억력이 나빠도 미영 아줌마는 내 권속이야.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물어본 거야?”

-문미영이 당했다.

“······뭐?”

이어진 [곰]의 말에 효진은 적잖이 당황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온 몸을 휘감았던 더위를 잠깐 잊을 정도였다.

“어, 어디서? 아니, 난 분명히 몸 사리라고 했는데?”

-엊그제, 성영대학교 지하주차장에서 당했더군.

[곰]은 담담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잠시 후, 설명을 끝낸 [곰]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보다 문미영이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게 있지 않았나? 수첩이라거나.

“수첩? 아, 맞아. 그 무슨 일기였나? 그냥 습관처럼 가지고 다니는 거 있었는데 왜?”

-없어졌다. 아마 토벌자가 주워간 듯 같더군.

“염병! 누가 차미래 제자 아니랄까봐, 하는 짓도 똑같네.”

효진이 돌멩이를 거칠게 걷어찼다.

돌발행동에 주변 학생들이 그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그 안에 엄한 내용은 없었겠지?

“아마 그럴 거야. 그냥 일기라고 했으니까.”

-그럼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서 아지트를 옮기겠다. 추후 문자로 전해주지.

“알겠어. 땡큐. 아저씨”

효진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권속이 당한 책임을 묻지 않는 것에 대한 안도였다. 하지만 곧 이어진 [곰]의 말에, 효진은 다시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거기서 바로 철수해.

“아, 진짜 조금만 더 있으면 돼. 앞으로 10분만 더······.”

시계를 바라본 효진이 애원하듯 말하던 그때!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가 전화를 빼앗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곰]만큼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바보야! 괜히 얼쩡대지 말고 빨리 돌아와!

바로 [오리]의 목소리였다.

이를 들은 효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너 왜 아저씨랑 같이 있냐?”

-그야 아저씨가 갑자기 내 방에 쳐들어왔으니까.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말을 이어나가려던 [오리]가 돌연 입을 닫았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흥분한 마음을 다스리는 듯했다.

잠시 후, 다시 [오리]의 음성이 들려왔다.

-······채강현이 아니었어.

“뭐라고?”

-완전히 잘못 짚었다고! 걘 신의 대리인이랑 요만큼도 관련 없어. 그냥 일반인!

[오리]가 빽 소리를 질렀다. 이에 효진은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렸다.

“와씨, 신은미 이 망할 년이 날 속여?”

뿌드득-!

효진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만약 신은미를 발견하면 곱게 보내지 않을 기세였다.

-그리고 방금 확인한 건데, 서민지가 파마의 부적 들고 다니더라.

“엥? 걔가 그걸 어떻게 들고 다녀?”

효진은 깜짝 놀란 듯이 물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가설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서, 설마 서민지가 신의 대리인······?”

-멍청아, 그게 아니라 우리 쪽 행동이 전부 읽히고 있다는 소리잖아! 일부러 채강현으로 우리 관심을 끈 사이에 서민지한테 파마의 부적을 준 거라고!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했겠어?”

-가능성은 충분해. 그러니까 괜히 얽혀서 피 보지 말고 철수해! 문미영 그 아줌마도 네 말 안 듣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다가 당한 거 아니야!

“끄으응. 그래도······.”

[오리]의 말은 충분히 납득했다.

그럼에도 효진은 망설임을 버리지 못했다.

왜냐면 이제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녀가 찾는 대상, 서민지가 수업을 끝마치고 이 정문을 지날 터다.

그러자 [오리]도 효진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네가 철수해야만 하는 이유는 또 있어.

“그게 뭔데?”

-언니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녀의 대답이 떨어진 순간.

효진은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곧이어 점점 새파랗게 변하는 얼굴. 그도 그럴 것이, [오리]가 언니라고 부르는 존재는 효진이 알기로 오직 한 명뿐이었으니까.

“대, 대장이······?”

-그래. ‘새로운 신의 대리인은 어찌됐든 상관없다. 당분간은 수면 아래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때다. 모든 마인들은 활동을 멈추고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어라.’ 이렇게 말했어.

대장이 직접 지시했다.

그 한 마디에 효진은 안절부절 못했다.

“으으! 조금만 더 있으면 나올 거 같은데······.”

하지만 그럼에도 서민지를 포기하진 못한 듯,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오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 설마 언니의 지시를 어기려는 건 아니겠지?

[오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효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젠장, 알겠어. 알겠다고! 철수하면 되잖아!”

-잘 생각했어. 빨리 돌아와.

“에라, 퉤! 진짜, 내가 다시는 여기에 오나 봐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효진이 침을 뱉었다.

이에 [오리]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애초에 처음부터 그 누구도 너더러 거기 가라고 안 했어.

“알고 있으니까 닥쳐!”

얼굴을 붉힌 효진은 수화기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뒤,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

그로부터 약 5분 뒤.

집헌관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학생들 중에서는 효진이 그토록 기다렸던 민지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민호가 붙어 있었다.

민호는 묵직한 쇼핑백을 들어 보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매번 얻어먹어서 미안하네.”

“아니에요! 이렇게 예쁜 팔찌도 주셨고, 또 저번에 밥도 못 샀잖아요.”

민지에게서 받은 쇼핑백 안에는 각종 반찬들로 가득했다. 민호가 혼자 생활한다는 걸 알게 된 민지가 집에서 싸온 반찬들이었다.

“그보다 입에 안 맞으실까 그게 더 걱정이에요.”

“아냐, 엄청 맛있던데? 아까 몰래 먹어봤거든.”

“정말요? 휴우, 다행이다.”

민지가 배시시 웃었다.

함께 걷던 둘은 어느새 역 앞에 도착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 반찬은 맛있게 잘 먹을게. 고맙다.”

민호는 민지와 마주본 채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민지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민호의 눈치를 살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쉽네요. 오빠랑 영화 볼까 했는데 가족 행사가 있다고 하시니······.”

“그러게. 대신 다음에 꼭 보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정말요?”

민지가 반색하며 묻자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반찬의 보답 정도는 해야지.”

“히히, 네! 기대할게요.”

그 말을 끝으로 민지는 역 안으로 사라졌다.

민호는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돌렸다.

“오늘도 무사히 지나갔네.”

“이쯤이면 마인도 이제 그냥 포기한 거 같은데요?”

어느새 나타난 율이 의견을 피력했다.

민호도 그렇게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같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음 주까지만 챙기자.”

“네! 철저해서 나쁜 건 없으니까요.”

율이 방긋 웃었다.

그러던 중 민호의 휴대폰이 한 차례 진동했다. 미래에게서 온 문자였다.

-내일 만나는 거 잊지 마!!

-특별한 손님도 모시고 가니까!

-아, 공항으로 마중 나올 필요는 없어. 진하가 차 가져 왔으니까.

민지에게 둘러댔던 ‘가족 모임’이란 바로 미래와 만나기로한 약속이었다.

그녀와 함께 했던 음주가무를 떠올리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후우, 이번엔 무조건 빠지려고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에요. 무조건 가셔야죠!”

그때 주먹을 움켜쥔 율이 의욕적인 얼굴로 소리쳤다.

“무려 하이드님이에요. 하이드님! 전설적인 토벌자를 만나볼 수 있는 기회라구요!”

두 눈을 별처럼 반짝이는 율.

그 귀여운 모습에 민호는 피식 웃었다.

그녀가 말한 ‘하이드’라는 인물은 미래가 말한 특별한 손님이었다. 그리고 율이 이렇게 열성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1급 토벌자라······.’

하이드 제르코펜.

영국의 1급 토벌자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토벌자.

‘그런 대단한 사람이 왜 여길 오는 거지?’

얼핏 듣기로는 미래와 친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듯했다.

그냥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민호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으헤헤, 내일이 정말 기대돼요!”

몸을 배배 꼰 율이 헤벌쭉 미소를 지었다.

***

다음날.

민호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어제 일찍 잔 탓도 있었지만 오늘따라 잠을 푹 잤기 때문이었다. 이불을 정리한 민호는 그간 임무를 하느라 밀려있던 집안일을 처리했다.

이후 민지가 준 반찬으로 아침을 해결한 뒤, 지은에게서 선물받은 레몬청으로 차도 한 잔 만들어 먹었다.

그렇게 여유로운 오전을 보내고 있을 무렵.

별안간 비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전달자님.]

[좋은 토요일 아침이네요.]

비단의 인사에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따가 미래 누나를 봐야한다는 게 슬프지만 말이지.”

한숨을 푹 내쉬는 민호.

그 모습에 비단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혹시 임무라도 내려왔어?”

민호가 눈을 반짝였다.

임무가 내려왔다면 이를 핑계로 모임을 불참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앗, 아니요.]

[혹시 시간 괜찮으실까 해서요.]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민호는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민호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시간이야 남아돌지. 약속은 오후 4시니까.”

현재 시각은 오전 11시 30분.

심지어 약속 장소는 군자역에 있는 미옥의 카페였다.

그 정도 거리라면 3시부터 준비해도 늦지 않는다.

민호의 대답이 끝나자, 비단은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요?]

[그럼 혹시 공덕 상점에 들러주실 수 있으신가요?]

갑자기 공덕 상점에 들르라고?

민호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뭔가를 깨달은 듯 물었다.

“오, 무슨 좋은 물건이라도 들어왔어?”

[우음, 네. 아마도요.]

[정확히 말하면 미시(未時)무렵에 행상인이 들릴 예정이거든요.]

이어진 비단의 대답에 민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소한 단어가 함께 들려온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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