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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전해드립니다-77화 (77/182)

77화

Chapter 20. 재회 (3)

인적이 드문 비상구 계단.

민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복도 건너편 강의실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잠시 후, 용진과 소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계신 거예요? 아저씨는요?’

‘후우, 바깥양반은 작년에······.’

‘죄, 죄송해요. 제가 좀 더 빨리 왔으면······.’

‘아니야. 지금 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단다. 네가 이렇게 의젓해진 걸 보면 바깥양반도 엄청 대견해할 거야.’

‘아주머니······.’

용진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묻어나왔다.

그로부터 한동안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한 5분 정도가 지났을까?

다시 들려온 용진의 목소리에는 굳은 결의가 깃들어있었다.

‘지금부턴 제가 모실게요. 저랑 같이 살아요.’

‘아이구, 괜찮아. 다 늙어서 무슨. 이렇게 오랜만에 얼굴 본 것만 해도 만족해.’

‘아니에요. 제가 무조건 모실 겁니다. 저 고집 센 거 아시죠?’

‘정말 괜찮은데······.’

‘석 비서. 1층에 차 대기시켜둬.’

‘예, 대표님. 그런데 여기 투자 건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한 걸 왜 물어? 캔슬해.’

‘알겠습니다.’

소현을 대할 때와는 다른, 차가운 목소리.

그 말을 끝으로 용진은 소현을 부축해서 함께 복도로 나갔다.

점점 멀어지는 둘의 발소리를 듣던 그때.

민호의 귓가로 비단의 음성이 들려왔다.

[임무를 완료했습니다.]

[보조 임무의 보상을 지급해드릴게요.]

곧이어 민호의 손바닥에 새하얀 빛이 맺혔다.

[공덕이 1,000만큼 상승되었습니다.]

[파마의 수호부가 지급되었습니다.]

잠시 후, 나타난 건 알록달록한 부적.

파마의 수호부였다. 부적을 품에 넣은 민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네.”

“뭐가요?”

“이번 임무의 의뢰인 말이야.”

장소현의 남편이자 이제는 고인이 된 구상진.

민호는 얼굴도 모르는 그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마치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이런 임무를 준 거 같지 않아?”

만약 곰 인형 열쇠고리를 소현에게 전달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민호가 일을 도우러 오질 않았다면 용진과 소현은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설령 용진이 어떻게든 소현을 찾아냈다고 해도, 그때는 이미 세상을 뜬 이후였으리라. 왜냐면 임무 마감 기간으로 짐작했을 때, 소현은 오늘 죽음이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민호는 놀라움 반, 신기함이 반씩 섞인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율의 대답이 이어졌다.

“아마 천기를 엿봤던 걸 거예요.”

“천기?”

“네, 생전에 선인이었던 망자들은 죽음 직전에 가끔씩 천기를 엿볼 수 있다고 들었거든요. 대신, 천기를 누설한 죄로 그간 모았던 모든 공덕이 사라지겠지만요.”

“그렇구나.”

민호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때, 율이 두 눈을 반짝였다.

“그보다 그 용진이라는 남자도 선인이네요.”

“진짜?”

“네, 기록을 보니까 기적을 전달받은 적도 있어요. 미국에서요.”

이어진 율의 말에 따르면 용진이 받은 것은 경영과 관련된 기적.

용진은 그 기적을 통해 젊은 나이에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고 했다.

“어쨌든 잘 돼서 보기 좋네요. 그쵸?”

“그러게.”

배시시 웃는 율을 마주보며 민호도 씨익 웃었다.

그러던 중 율이 뭔가를 떠올린 듯 손바닥을 마주했다.

“아참, 그런데 그 마인은 어떻게 됐을까요? 미영이라는 여자요.”

율의 질문에 민호는 계단 난간 아래를 응시했다.

“음, 아마 지금쯤······.”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민호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

성영대학교 경영대학 지하주차장.

고요하던 주차장에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림자의 주인은 잔뜩 성이 난 듯, 계단을 쾅쾅 밟으며 내려오는 중이었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문미영.

“젠장, 젠자앙!”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한 채, 연신 욕지거리를 내뱉길 되풀이했다.

“거의 다 됐는데. 조금만 더 하면 됐는데······!”

분함이 섞인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체 누구야. 어떤 놈이 날 방해하는 거야! 아아아악!”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성을 질러대는 미영.

그렇게 울분을 토해내던 그때, 그녀의 손등에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탱탱하던 피부 위에 주름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

그것도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아, 안 돼! 멈춰! 내가 어떻게 얻은 젊음인데······.”

이를 확인한 미영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는 손등의 주름을 애써 펴보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십여 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미영은 10분 전보다 대폭 늙어있었다. 팔과 다리에는 주름이 생겨났고, 얼굴은 40대 초반 정도의 외모로 변했다.

“아, 아아······.”

거울에 비친 모습에 미영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잠시 후, 미영은 이를 꽉 물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옅은 귀기가 번뜩였다.

“······웃기지 마! 내가 이렇게 무너질 거 같아?”

미영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녀는 독기를 잔뜩 품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어. 지금은 물러나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미영은 가방에서 모자를 꺼냈다.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는 모자를 뒤집어쓴 그녀는 그 길로 곧장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그 길로 곧장 학교를 떠날 심산이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문미영.”

멈칫-

인적 없는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리면 누구나 놀랄 터다.

지금 미영의 심정이 딱 그랬다.

“······어?”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다.

고개를 돌려도, 주변을 살펴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무시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문미영. 문미영.”

“······!”

다시 들려온 목소리.

미영은 깜짝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누, 누구야?! 장난치지 말고 나와!”

하지만 주차장에 울려 퍼지는 건 미영의 목소리뿐이었다. 이에 미영이 긴장한 얼굴로 다시 발을 옮기려던 그 순간!

꽈악-!

“컥!”

누군가가 그녀의 목을 졸랐다.

미영의 배후에 나타난 이는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진 소녀. 원숭이 가면 너머로 황금색 눈빛을 반짝인 소녀는 다름 아닌 혜진이었다.

혜진은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인외의 길에 발을 내딛은 죄, 연옥에서 억만년 동안 반성해라.”

“컥! 자, 잠깐만······! 끄륵!”

미영이 몸을 버둥거렸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목을 조이는 힘이 느슨해졌다. 이에 미영은 혜진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있는 힘껏 앞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게 미영이 기억하는 마지막 기억이었다.

퍼억-!

혜진은 몸을 빠르게 반쯤 돌리며 발꿈치로 미영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미영은 그 자리에 철퍼덕 엎어졌다.

그러자 혜진은 품속에서 부적 한 장을 꺼내 미영의 머리에 붙였다.

파스스스-

잠시 후, 검은 재로 변해 허공에 흩날리는 부적.

이를 가만히 보던 혜진은 이번엔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음, 이렇게 하는 거였지?”

짝!

손뼉을 한 번 치자, 그녀에게만 들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성난 까마귀의 울음소리] 발동

-반경 10m내의 모든 기기에 간섭합니다.

-토벌자님의 기록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토벌 임무를 완료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후우.”

임무 완료 알림을 끝으로 혜진은 나직한 한숨을 뱉어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잠시 후, 혜진의 시선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미영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물들었다.

“마인을 쓰러뜨리면······.”

부적을 붙이는 것 외에도 할 일이 하나 있었다.

혜진은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미영에게 손을 뻗었다.

“······일단 품을 뒤져보라고 했었지.”

마인들은 귀물이나 다른 마인에 관한 물건을 들고 다니는 경우가 종종 있다.

5급 이상의 토벌자들은 투시 및 감지 능력이 있어서 직접 품을 뒤적일 필요는 없었지만, 이제 막 토벌자가 된 혜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얘기였다.

그러던 중 혜진의 손이 멈칫거렸다.

미영의 배 부근이었다.

“우선 귀물 하나 찾았고.”

혜진의 시선에 잡힌 것은 검은색 복대.

귀물을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했다. 손에 닿았을 때, 왠지 모르게 찝찝한 느낌이 들면 십중팔구는 귀물이었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녀의 사부, 미래를 떠올린 혜진이 옅게 웃었다.

이후로도 미영의 품을 뒤적였지만 귀물 이외의 소득은 없었다. 이에 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오른쪽 소매에서 뭔가가 툭 떨어졌다.

“이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수첩.

혹시나 싶어서 수첩을 펼쳤지만 워낙 악필이라 뭐라고 썼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메모된 게 많은 걸로 봐선, 뭔가 중요한 정보도 있을 거 같았다.

“이것도 혹시 모르니까 가져가야겠다.”

수첩을 주머니에 넣은 혜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더 이상 얻을 건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혜진은 빠른 보폭으로 지하주차장을 벗어났다.

***

그날 이후.

토벌 임무와 보조 임무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일단 민호의 아르바이트는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끝났다. 소현이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알아본 용진이 분노에 가득 차 대대적인 소송을 진행한 것.

이후 태민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그렇게 민호도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됐다. 물론 받지 못한 보수는 노동부에 신고해서 전부 받아낼 예정이었다.

“어쨌든 다 잘 풀려서 다행이네요.”

“그러게 말이야.”

민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어 스스로의 상태창을 확인한 그가 말을 이었다.

“졸지에 공덕이 엄청 쌓였네.”

이번 임무로 민호가 획득한 공덕은 총 1,200.

보조 임무로 받은 보상과 추가로 협동 임무를 통해 받은 보상을 합친 양이었다. 율에게 지급할 1할의 공덕을 제외하더라도 무려 1천이 넘는 공덕이 쌓였다.

“공덕 상점에서 쇼핑할 맛 좀 나시겠어요!”

“음, 그러고 싶어도 거긴 매번 애매모한 보물만 있어서······.”

민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던 그때, 그의 시야에 한 여성이 들어왔다.

서민지였다.

민지는 이제 막 수업을 마친 듯, 가방을 메고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민지야.”

“앗, 오빠. 안녕하세요.”

민호를 발견한 민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녀는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오빠 분명 오늘 수업이······.”

“오전에 끝났지. 여기 있던 건 너 기다렸던 거야.”

“저, 저요?”

민지가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줄게 있어서. 자, 이거 받아.”

민호가 건넨 것은 심플한 디자인을 한 팔찌.

바로 팔찌의 형상을 한 파마의 부적이었다. 한편 얼떨결에 이를 받아든 민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웬 팔찌에요?”

“그냥 뭐 저번에 얻어먹은 것도 있고, 네 손목도 좀 허전해보이고 해서.”

부적을 전해줘야 한다는 것까진 생각했지만 그 이유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던 탓에, 민호는 멋쩍게 웃었다.

대답을 대충 얼버무린 민호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말을 이었다.

“대신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마. 너한테만 주는 거니까.”

“저, 저한테만요?”

민지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변했다.

파마의 부적이 변절자급 마인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 진 모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터다. 그렇게 생각한 민호는 민지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래. 그러니까 잘 차고 다녀. 알겠지?”

“헤헤, 네!”

민지는 팔찌를 소중히 쥔 채, 배시시 웃었다.

햇살처럼 밝아 보이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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