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Chapter 20. 재회 (2)
[혜진]: 감사합니다, 선배.
[혜진]: 바로 토벌을 시작하겠습니다.
미영은 혜진에게 맡겨두면 될 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복도를 바라봤다.
남자들은 어느덧 제법 가까운 곳에 와 있었다.
민호는 계단 부근으로 이동한 뒤, 여우 귀를 통해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민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율아.”
“네, 주인님.”
“아무래도 네 추측이 맞는 거 같아.”
용진과 남자들의 대화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찾았다.
민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
성영대학교의 재무실장, 박현석.
본디 현석은 그리 좋은 성격이 아니었다. 까칠한데다가 폭언도 종종 일삼았다. 소위 말하는 더러운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오늘만큼은 성질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밝은 갈색 머리를 가진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현석의 설명을 들었다.
남자를 보며 현석은 두 눈을 강렬하게 빛냈다.
‘이건 마지막 기회야.’
현재 성영대학교의 재정 상태는 최악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좋지 못했다.
그러던 중 총장이 재계의 큰 손을 하나 물어왔다. 엄밀히 말하면 국내가 아니라 해외에서 명성을 떨치는 유명한 투자자였지만.
‘무조건 잡아야 돼!’
남자의 이름은 손용진.
막대한 자본, 거기에 기발한 아이디어와 추진력까지 겸비한 젊은 재벌이었다. 그가 손을 댄 사업은 족족 성공하기로도 유명했다.
그러던 그가, 총장과의 인연으로 성영대학교에 오게 됐다.
이건 성영대학교에게 있어 큰 기회였다. 그에게 투자를 받을 수만 있다면, 구렁텅이 속에서 벗어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현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아암.”
그러던 중 용진이 돌연 하품을 내뱉었다.
다소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현석은 재빨리 말을 걸었다.
“먼 길을 오셔서 피곤하신 거 같은데, 혹시 커피 한 잔 어떠십니까? 바로 앞에 편하게 쉴만한 카페가 있습니다만······.”
“음, 그 전에 잠깐 학교를 둘러봐도 될까요?”
“하하, 물론이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현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맺혔다.
‘준비는 완벽해.’
이럴 줄 알고 미리 계획을 짜뒀다.
간간이 시위를 하던 학생들도 모조리 내쫓았고, 청소부나 잡일을 하는 직원도 모조리 다른 곳으로 빼돌렸다.
“일단 저희 대학교의 가장 큰 자랑인 법대 건물부터······.”
그 중에서도 법대 건물은 무려 일주일 전부터 대청소를 해뒀다.
아마 지금쯤은 광이 번쩍번쩍 나리라.
그러나 현석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아니요. 일단 경영대 건물부터 보고 싶습니다.”
“······네? 경영대요?”
“제 전공도 그쪽이라 아무래도 더 관심이 가네요.”
용진의 대답에 현석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현석은 애써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말을 마친 현석은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
그러고는 용진이 나오기 전,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실장님.
“혹시 지금 경영대에 시위하는 애들 있어?”
-아마 몇 없지만 있긴 있을 겁니다.
“싹 내보내. 안 나가는 애들 있으면 쥐어 패서라도 다 내쫓아. 아, 그리고 청소하는 아줌마들도 화장실에 처박아둬. 절대 나오지 말라고 해.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그걸 끝으로 통화는 끝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용진과 그의 비서들은 현석의 뒤를 쫓아 경영대 건물로 이동했다. 사전에 연락해서 미리 정리를 해둔 덕분인지 건물 안은 쾌적했다.
현석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학교의 경영대학은 우수한 교수진들이 다수 있으며······.”
대부분 학교의 장점만을 내세운 설명이었다.
용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현석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현석의 말이 거의 끝나갈 무렵, 잠자코 그의 말을 듣던 용진이 입을 열었다.
“실장님.”
“예?”
“아까 얼핏 들었는데 실장님은 이 지역 토박이라고 하셨죠?”
“아, 네. 맞습니다.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여길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현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용진의 눈빛에 옅은 이채가 맺혔다.
“그럼 개인적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하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얼마든지요.”
개인적인 부탁.
그 말에 현석은 눈빛을 반짝였다.
그의 부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만약 들어줄 수 있다면 이후 투자를 받는 일도 훨씬 수월해질 테니까.
잠시 후, 망설이던 용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실은 사람을 하나 찾고 있습니다.”
“사람이요?”
“네, 자세한 건 이걸 봐주세요.”
그의 말이 끝나자 비서 중 하나가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용진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류였다.
“음, 총 두 분이군요. 구상진 씨와 장소현 씨······.”
현석은 빠르게 서류를 훑었다.
처음엔 친척이나 친구를 찾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대나 살았던 곳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재벌의 친척이라는 사람이 저런 못 사는 동네에 살진 않았을 테니까.
무엇보다 그가 알기로 용진은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서 자랐다.
이에 잠시 눈을 굴리던 현석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저, 실례가 아니라면 혹시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진의 무표정한 얼굴에 일순간 균열이 갔다.
눈을 살며시 감은 용진.
잠시 후, 다시 뜬 그의 눈에는 아련한 그리움이 맺혀 있었다.
“제게 있어선 부모님 같은 분들이십니다.”
그 대답에 현석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직감으로 이건 대박이었다.
만약 그가 이 서류에 있는 이들을 찾을 수 있다면, 투자를 받는 건 문제도 아니리라.
현석은 의욕이 가득 찬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서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하하, 제가 또 이 지역에서 발이 넓기로 유명한······. 커헉!”
하지만 현석은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걸음을 옮기던 중, 갑자기 튀어나온 누군가와 부딪쳤던 탓이었다.
“아이쿠!”
그리고 현석과 부딪친 이도 충격으로 인해 바닥으로 쓰러졌다.
청소부 복장을 한 여성.
이어 그녀의 주머니에서 나온 낡은 열쇠고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
열쇠고리를 본 용진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곰 인형을 매달은 열쇠고리.
“이건······.”
용진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열쇠고리를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열쇠고리의 주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청소부 여성.
가만히 보니 어딘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용진이 기억을 더듬어나가던 그때!
그의 시선이 여성의 명찰에게로 가 닿았다.
“······!”
용진의 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때가 묻은 명찰에는 그가 그토록 찾던 ‘장소현’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으니까.
“끄응, 뭐야?”
한편 현석은 비틀거리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소현을 보고는 대뜸 얼굴을 와락 구겼다.
“아이씨, 재수가 없으려니까.”
현석의 중얼거림과 함께 소현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소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고는 이내 낯빛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죄, 죄송합니다. 다친 곳은 없으세요?”
탁-!
“쓰읍! 이 손 치워요. 더러운 손으로 어딜······.”
그때, 현석이 소현이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는 여전히 구겨진 얼굴로 소현을 노려봤다.
“아줌마. 지금 여기서 뭐해요? 우리랑 마주치지 말라는 말, 못 들었나?”
“그, 그게 저, 그러니까······.”
날카로운 말투에 주눅이 든 탓일까?
소현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 모습에 현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업체를 바꾸던가 해야지, 진짜.”
업체를 바꾼다는 말에 소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정말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제가 아무것도 몰라서······.”
“답답하게 굴지 말고 빨리 비켜요. 짜증나니까.”
현석이 손을 휙휙 내저었다.
그러던 그때, 용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장님.”
차갑게 굳어진 목소리.
하지만 이를 눈치재지 못한 걸까?
현석은 넉살좋게 웃으며 소현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하하, 죄송합니다. 바로 치우겠습니다.”
마치 물건을 치우듯, 그녀를 계단 쪽을 밀어버리려던 찰나!
용진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손 놓으세요.”
“네? 지금 뭐라고······.”
“그 손 치우라고. 당장.”
용진은 사납게 일그러진 눈빛으로 현석을 노려봤다.
“어, 어어. 아, 알겠습니다.”
현석도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듯, 머뭇거리며 소현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소현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아이구,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소현.
목이 부러질 정도로 사과를 이어나가는 그녀의 모습에 용진은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는 소현과 비슷한 눈높이에서,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 채 입을 열었다.
용진의 입술을 비집고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아주머니. 혹시 저 알아보시겠어요······?”
“네, 네에?”
그의 말에 소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용진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얼굴처럼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소현은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데 그때, 용진이 들고 있는 열쇠고리에 시선이 닿았다. 뒤이어 다시 용진을 쳐다보자, 문득 소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고마워요, 아주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이십여 년도 더 된 옛날.
마음으로 키웠던 아들에게서 받았던 가장 기쁜 선물.
그와 함께, 용진의 얼굴이 그 아들과 겹쳐 보였다.
“어, 어어······.”
소현의 눈이 점점 휘둥그레 떠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용진의 볼을 어루만졌다.
“요, 용진이? 설마 용진이니?”
“크흑! 아주머니!”
소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진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은 이미 깨진지 오래였다.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요.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해요.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용진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자 소현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 용진이, 얼굴이나 한 번 다시 보자.”
소현의 시선이 용진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용진의 얼굴 구석구석을 훑었다. 잠시 후, 소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장하다, 장해. 벌써 이렇게 훌쩍 커버려 가지고는······.”
그녀의 주름진 눈가에 맑은 눈물이 맺혔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랐어.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거야? 잠은 잘 자고?”
소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이를 들은 용진은 결국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고, 눈물만 흘러나왔다.
“아이쿠, 괜찮아. 괜찮아. 울지 마.”
이에 소현은 깜짝 놀란 얼굴로 용진을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익숙한 손길이었다.
하지만 이십여 년 전보다 힘없는 손길에 용진은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우리 용진이, 이렇게 커서도 눈물 많은 건 여전하네.”
소현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던 중 소현은 뭔가가 떠올랐는지 말을 이었다.
“아, 그래. 이거 기억나니? 예전에는 울 때마다 이것만 주면 뚝 그쳤었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꺼낸 것은 초코파이.
그러나 애석하게도 용진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더욱 커다란 소리로, 울음을 뱉어낼 뿐이었다.
한편 그 무렵.
현석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이 광경을 바라봤다.
정확히 말하면 용진이 울음을 터뜨리기 전, 소현의 명찰을 본 순간부터였다.
‘망했다.’
장소현. 용진이 부모님 같은 분들이라고 말한 이들 중 하나였다.
그 순간부터 투자를 받는 건 물 건너갔다고 확신했다.
‘······사표 쓸까?’
용진의 분노를 감당하는 것보단 차라리 그게 현명한 선택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