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Chapter 18. 조우 (1)
Chapter 18.
조우
학생들로 가득 찬 강의실.
단상에 선 교수가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자, 그래서 이 시대에 활약했던 무장은······.”
하지만 사람이 워낙 많은 탓일까?
교수의 목소리는 책 넘기는 소리, 휴대폰 진동 소리 등, 다양한 소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뒷자리에 앉은 이들 중에선 아예 엎드려 자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민호는 예외였다.
그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칠판을 바라보며 교수의 말을 필기했다. 거의 맨 뒷좌석에 앉아있음에도 그의 귓가에는 교수의 목소리가 아주 또렷하게 들렸다.
얼마 전, 임무를 완료하고 받은 보상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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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뾰족 여우 귀]
*등급: 정(丁)
*신령한 여우의 귀. 청각 능력이 극대화된다.
*오른쪽 귀를 두 번 두드리면 발동한다.
*최대 범위: 반경 500(+250)m
*[상급 증폭] 효과가 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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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일대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이 능력에는 한 가지 특수한 효과가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정신을 집중하면 주변에 들리는 모든 소음이 차단된다. 그리고 오직 그 목소리 하나만 귀에 들렸다.
그것도 아주 또렷하게.
‘즉, 수업 듣기에 최적화된 능력이지.’
강의실은 수십여 명의 학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민호에게 있어선 인터넷으로 일대일 강의를 듣는 것과도 같았다. 주변 모든 소음을 차단하고 오직 교수의 목소리만 활성화를 시킨 상태였으니까.
‘이번엔 진짜 장학금 노려볼 수 있겠는데?’
쉬지 않고 메모를 이어나가던 민호가 씨익 웃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열띤 강의를 마친 교수가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럼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지.”
강의가 끝나자 학생들은 썰물처럼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메모를 끝마친 민호는 오른쪽 귀를 톡톡 두드렸다. 곧이어 주변의 모든 소음이 잦아들 무렵, 뱃속에서 익숙한 소음이 들려왔다.
꼬르륵-
“아.”
민호는 그제야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걸 자각했다.
“이거 뭐라도 먹어야겠네.”
그는 지은을 회사까지 데려다 준 뒤, 바로 강의에 들어왔었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으니 당연히 허기를 느낄 수밖에.
“학식이나 가야지.”
가방을 다 챙긴 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별안간 그의 휴대폰에 알림소리가 들렸다.
띠링-
[혜진]: 선배.
[혜진]: 사부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혜진에게서 온 톡이었다.
엊그제, 새로운 팀이 결성된 이후.
민호를 포함한 셋은 그룹 채팅방을 만들었다.
서로의 임무와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혜진]: 중국에 머무르는 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질 거 같다고 합니다.
[혜진]: 생각지도 못한 거물이 있다고 하네요.
[민호]: 거물?
[혜진]: 예, 자세히 듣지는 못했습니다.
[혜진]: 다만 꽤 버거운 상대라고만 들었어요.
[혜성]: ㄷㄷㄷ
[혜성]: 생각보다 일이 꽤 심각한가 봐요.
미래와 진하는 새벽 비행기를 타고 중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늘, 제자인 혜진과 막 연락이 닿은 참이리라.
[혜진]: 그래서 한국의 일은 당분간 저희에게 맡기신다고 했습니다.
[혜성]: 헉, 정말요?
[혜성]: 왠지 조금 부담스럽네요.;;
[민호]: 괜찮아.
[민호]: 아직 임무 내려온 것도 없으니까.
[혜성]: 어, 그럼 다행이지만요 ㅎㅎ
혜성의 톡을 끝으로.
다시 혜진의 말이 이어졌다.
[혜진]: 조만간 만나서 행동방침을 다시 정했으면 합니다.
[혜진]: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요.
[민호]: 그래, 편할 때 연락 줘.
[혜진]: 예, 알겠습니다.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하여간 철두철미하다니까.”
“그야 이제 막 토벌자가 됐으니까요.”
혜진은 사소한 일에도 신중을 기했다.
또 오늘처럼 변수가 등장하면 계획을 수정하길 원했다. 미래의 제자이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와 닮지 않았다.
이에 민호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별일 있겠어?”
사실 마인 문제만 아니면 미래가 있든 말든 큰 상관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없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민호는 강의실을 나섰다.
맞은편 강의실에서도 이제 막 수업이 끝났는지 학생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인파에 휩쓸려 함께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향하던 순간!
문득 민호의 귓가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앗! 민호 오빠.”
베이지색 블라우스에 스키니 진을 입은 미인.
다름 아닌 서민지였다.
“수업 끝나셨어요?”
“어, 방금. 그보다 꽤 오랜만에 보는 거 같네.”
“그러게요. 하긴 수업이 겹치는 게 없으니까요.”
민지가 멋쩍게 웃었다.
MT에 다녀온 이후, 그녀는 부쩍 밝아졌다.
뒤풀이 때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확실히 달라졌다는 게 느껴졌다.
긍정적인 변화에 민호는 옅게 미소 지었다.
“저, 오빠.”
그러던 중 민지가 입을 열었다.
“응?”
“혹시 식사 하셨어요?”
머뭇거리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민지.
이에 민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아니, 이제 먹으러 가려고.”
“정말요? 잘됐다.”
민지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두 손을 모은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민호를 쳐다봤다.
“제가 밥 살게요. 왜, 저번에 산다고 했잖아요.”
“아, 맞아. 그랬지.”
민호가 떠올랐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럼 감사히 얻어먹을게.”
“히히, 네!”
민지가 방긋 웃었다.
이후 둘은 강의실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왔다. 민호가 무의식적으로 학생식당을 향해 몸을 틀던 그때, 돌연 민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오빠, 우리 학식 말고 더 맛있는 거 먹어요.”
“더 맛있는 거? 뭔데?”
“헤헤, 그건 이제부터 찾아봐야죠. 따로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민지의 질문에 민호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음, 네가 좋아하는 걸로 먹자.”
상대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모른다면 선택을 상대에게 맡기면 그만이다. 무엇보다 민호는 지금 딱히 먹고 싶은 음식이 없었다.
그러자 민지는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뭔가를 떠올린 듯 손뼉을 마주쳤다.
“아! 그럼 즉석 떡볶이 어떠세요? 최근에 진짜 맛있는 집을 찾아냈거든요.”
“좋지. 여기서 멀어?”
“금방이에요. 후문 쪽으로 나가서······.”
민지가 앞장서며 설명을 이어나가던 그때.
우뚝-
순간적으로 민호의 걸음이 멈췄다.
곧이어 밀려드는 오한.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어지러운 현기증.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
민호는 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방금 전, 스치듯 지나간 여성에게로 가 닿았다.
훤칠한 체구를 가진 이십대 후반의 여성.
그녀에게는 눈에 띄는 특징 하나가 있었다.
바로 두툼한 후드티를 입고 있다는 점이었다.
덩치가 큰 펭귄 캐릭터가 그려진 후드티를 입은 채,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여성.
민호는 곧장 그녀의 상태창을 눈앞에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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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주효진
*나이: 만 28세
*공덕: 1,418
*악덕: 981
*성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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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의 수치는 범상치 않았다.
민호의 눈가가 가느다랗게 좁아졌다.
‘저건······.’
최근에 저것과 비슷한 수치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광진 유원지에서 만났던 조련사 정환.
그리고 MT에서 기적을 회수한 신은미.
그 둘의 수치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둘과 비교했을 때 악덕이 더 높은 축에 속했다.
‘설마 마인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민호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듯 쳐다봤다.
그러던 그때였다.
“오빠?”
별안간 들려온 민지의 목소리.
앞장서서 걸어가던 그녀는 어느새 민호의 곁에 와있었다.
“아시는 분이에요? 계속 보고 계시길래······.”
“······으응, 아니야. 잘못 본 거 같아.”
민호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여성의 정체가 마인이 맞더라도 지금 민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전달자이지, 토벌자가 아니었으니까.
‘일단 애들한테 연락해둬야겠어.’
민호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예종대 후문 앞에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훤칠한 키와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진 여성은 다소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상의는 겨울에나 입을 법한 두꺼운 후드티를 입었으면서, 하의는 짧은 반바지를 입은 것.
언밸런스한 패션 감각을 선보이며 예종대 건물을 올려다보는 여성.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달싹거렸다.
“후우, 망할.”
효진의 입술을 비집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얼굴을 구긴 채 중얼거렸다.
“금방일 줄 알았는데 더럽게 멀잖아.”
효진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효진은 햇볕을 피해 그늘로 걸음을 옮겼다. 이어 능숙하게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다시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젠장.”
담배가 하나도 없었다.
그제야 효진은 이곳에 도착하기 30분 전, 돛대를 피웠다는 걸 떠올렸다.
그러던 중 그녀의 눈에 편의점이 들어왔다.
딸랑-
편의점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효진은 알바생에게 빈 담뱃갑을 휙 던졌다.
“똑같은 걸로 하나.”
“······.”
무례한 태도에 알바생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괜한 트러블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탓일까? 그녀는 효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어요?”
“······하아. 진짜 가지가지 하네.”
한숨을 내쉰 효진은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던졌다.
이름: 임하나
주민등록번호: 970801-2······.
신분증을 받아든 알바생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아무리 좋게 봐도 97년생으로 보이진 않은 탓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효진의 얼굴 자체가 주민등록증 사진과 완전 딴판이었다.
그냥 다른 사람이라고 보는 게 맞으리라.
“저, 이거 본인 신분증 맞으신······.”
“뭘 봐? 빨리 계산 안 해?”
그때 효진이 눈을 매섭게 번뜩였다.
귀기가 서린 눈빛에 알바생은 순간적으로 겁을 집어먹었다.
“그, 그러니까 4,500원입니다.”
딸랑-
계산을 끝마친 뒤.
효진은 편의점에서 나오자마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후우우.”
희뿌연 담배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꽁초를 길에 내던진 그녀는 다시 예종대 건물을 올려다봤다.
“자, 그럼 어디부터 뒤져볼까.”
나른한 중얼거림과 함께, 효진은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 무렵.
길을 걷던 효진이 별안간 자리에 멈춰 섰다.
멈칫-
“어라?”
고개를 갸웃거린 효진.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잠깐, 저 녀석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효진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녀의 눈에 비친 이는 후문으로 향하고 있는 두 남녀.
그 중에서도 효진의 눈은 여자 쪽을 향했다.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스키니 진을 입고 있는 이십대 초반의 여성.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뒤를 보면서 효진이 다시 중얼거렸다.
“흐음, 어디서 봤더라?”
효진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 뭐야?”
전화가 온 것이었다.
발신인은 그저 ‘오리’라고만 적혀 있었다.
“쯧.”
낮게 혀를 찬 효진.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전화를 받았다.
“왜 전화했어?”
효진은 전화를 받자마자 퉁명스런 말투를 내뱉었다.
그러자 수화기 건너편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어?
“어, 방금. 으아, 더워죽겠네.”
효진은 그늘 아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며 덥다는 말을 연발하는 그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귀물(鬼物), 너무 거추장스러운데······.”
효진의 시선이 후드티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