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Chapter 17. 새로운 팀 (3)
“아, 맞아.”
잊고 있던 뭔가를 떠올린 듯 그의 시선이 창우에게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중국에 있는 우리 애들은 철수시켰나?”
“내일 아침 비행기로 들어오는 녀석들이 마지막이다.”
창우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남자를 쳐다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덕분에 화를 피하게 됐군. 고맙다.”
“하하, 뭘 새삼스럽게.”
남자는 됐다는 듯 손을 휙휙 내저었다.
그러던 중 그는 잊고 있던 뭔가를 떠올린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참, 그리고 이것도 말해둬야지. 난 다음 주부터 휴가다.”
“뭐? 하지만 내가 알기로 너는······.”
“크크, 백수주제에 무슨 휴가냐고?”
남자의 반문에 창우는 입을 닫았다.
그러자 남자는 피식거리며 다시 막걸리를 들이켰다.
“그 말도 틀린 건 아닌데 진짜 휴가야. 머리도 식힐 겸, 잠깐 쉬다 오려고.”
“어디서 쉴 생각이지?”
“일본.”
남자의 대답이 끝나자 창우는 얼굴을 찌푸렸다.
“거기는 위험하다. 최근 신의 대리인들의 성장률이 대폭 상승한 곳이잖나.”
“괜찮아. 내가 그렇게 쉽게 퇴치당할 거 같아?”
“······이해하기가 힘들군. 왜 하필 일본이지?”
“내 딸이 도쿄에서 공부하고 있거든.”
그 말에 창우는 입을 닫았다.
남자가 얼마나 딸 바보이자 팔불출인지 잘 알고 있던 탓이었다. 그 증거로 남자는 살짝 꼬인 혀로 딸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크, 얘가 얼마나 똑똑하냐면 최근에 장학금을······.”
“알겠다. 참고하지.”
말이 길어질 것 같아 보이자 창우는 즉각 남자의 말을 끊었다.
“하여간 정 없는 녀석이라니까.”
흥이 식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남자.
“아무튼 한 보름 정도 자리를 비울 거니까 그 전까지는 몸 사려가면서 행동하라고. 특히 너희 쪽에 잘 나대는 애 있잖아. 누구였지? 주효진?”
남자의 입에서 다시금 누군가의 실명이 흘러나오자 창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펭귄]을 말하는 건가?”
“맞아, 맞아. 걔.”
“알겠다. 전달해두지.”
창우의 대답에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주전자를 기울였다. 하지만 막걸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미 진즉에 거덜 낸 뒤였던 탓이었다.
“여기 막걸리 하나 추가!”
“예예, 갑니다!”
잠시 후, 주전자가 도착하자 남자는 창우의 잔에 술을 그득하게 따랐다. 이어 본인의 잔에도 막걸리를 채우던 그때, 별안간 남자의 미간이 가늘게 떨렸다.
멈칫-
그 탓에 막걸리가 넘쳤다.
테이블 위를 흥건하게 적셨지만, 창우는 남자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신중한 눈빛으로 남자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흠흠, 그렇군.”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남자.
잠시 후, 다시 눈을 뜬 남자는 주전자를 테이블 위에 가만히 내려놨다.
그러고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자, 마지막으로 한 잔 하지.”
“마지막?”
“네가 슬슬 일어나야할 것 같아서.”
“오늘은 아무 약속도 없다만.”
창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남자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오늘 여기서 내 후배랑 만나기로 했거든. 원래는 10시쯤에 만나기로 했는데, 하여간 쓸데없는 부분에서 성실한 녀석이라니까.”
“후배?”
창우의 미간이 좁아졌다.
문득 그의 뇌리를 스치는 존재가 있었다. 남자에게 후배라고 부를만한 이는 많았지만, 단순히 후배가 이곳에 온다는 이유로 창우를 내쫓을 만한 존재는 흔치 않았다.
“설마······.”
그때 창우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동시에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전직 관찰자 대장님을 알아볼 수 있을만한 녀석이지.”
“후, 그 녀석이군.”
한숨을 내뱉은 창우.
그 모습에 남자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20분 후에 도착할 거 같은데,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고 가던가.”
“······끔찍한 농담이군. 내가 퇴치당하는 걸 보고 싶은 건가?”
창우의 격한 반응이 재밌는 걸까?
남자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휴가 잘 다녀오고, 나중에 또 보자.”
“그래, 조심히 들어가라.”
짧은 인사를 끝으로 창우는 출구로 향했다.
다시 혼자가 된 남자는 연신 술잔을 기울였다.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마치 지금 당장 취하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남자는 기계적으로 술을 들이켰다.
빈 주전자가 하나둘 씩 늘어날 때쯤.
그의 등 뒤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발소리.
동시에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리움과 씁쓸함, 그리고 옅은 후회가 담긴 미소였다.
“여전히 이런 곳을 좋아하시는군요.”
그때 중저음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남자는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그럼, 서울에서 여기만큼 싸고 맛있는 데가 없잖냐.”
그의 대답이 끝나자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외투를 입은 커다란 덩치의 청년. 30대 초중반으로 추정되는 그는 남자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장님”
“전직 반장이지. 지금은 그냥 배불뚝이 아저씨야.”
“한 번 반장님은 영원한 반장님입니다.”
“하여간 강 형사는 여전하구먼. 자, 얼른 앉아.”
남자가 손을 휘젓자 청년은 냉큼 자리에 앉았다.
눈치 좋은 주인이 술잔을 가져다주자, 남자는 막걸리를 꾹꾹 눌러 담았다.
“한 잔 하자.”
“예.”
두 남자가 잔을 들었다.
동시에 청년이 눈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뵙고 싶었습니다, 반장님.”
그 말에 남자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 나도 보고 싶었다. 진하야.”
남자의 말을 끝으로.
막걸리가 가득 담긴 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
사당역에서 시작된 광란의 파티가 끝난 뒤.
민호는 해가 중천에 걸렸을 시각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부스스한 얼굴로 몸을 일으킨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으으, 죽겠다.”
속이 뒤집어진 기분과 함께.
민호는 어제 있었던 일들을 가만히 떠올렸다.
오후 10시를 훌쩍 넘긴 뒤.
민호와 미래는 혜진을 집까지 바래다줬다.
그 다음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술 파티가 시작됐다.
사실 강하게 내치고 집에 가서 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마인을 토벌하러 가는 누나를 매정하게 버려두고 갈 참이야?’라는 미래의 말에 마음이 약해져서 차마 그러지 못했다.
“다음부턴 뭔 말을 하던 그냥 가야지.”
민호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중얼거렸다.
그로부터 진하가 합류한 건 자정이 될 무렵.
진하가 오자 술자리는 더욱 강렬하게 변했다. 다행인 건 저번과는 달리, 진하가 적당한 타이밍에 술자리를 끝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저번만큼 속이 아프진 않았다.
“많이 힘드세요?”
그때 율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주신의 가호가 없었으면 오늘 하루 종일 누워있었을지도 몰라.”
최대 450ml까지는 어떤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능력.
민호는 이를 활용해 약간의 꼼수를 부렸다.
바로 처음부터 엄청나게 강한 술만 마셔댄 것. 덕분에 미래가 취할 때까지 민호는 나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보다 지금 몇 시쯤 됐어?”
“오후 3시 14분이에요.”
율이 시계를 가리켰다.
그녀의 대답에 민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헉, 진짜? 큰일 났다. 지은이 데리러 가야되는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민호가 허둥거리던 그때.
율이 진정하라는 듯 민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주인님, 오늘은 쉬는 날이라고 했잖아요!”
“아, 맞아. 그랬었지.”
민호가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지은에게서 문자가 왔었다.
회사에서 자고 계속 연습할 거라서 오늘은 밤 10시쯤에 데리러 와달라는 문자였다.
“그리고 오늘은······.”
다른 약속이 있었다.
바로 진하에게서 새로운 관찰자를 소개받는 것.
약속시간은 오후 4시 반.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었지만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
민호는 서둘러 샤워를 한 뒤,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그러고는 곧장 방을 나섰다.
-민호 도령.
그러자 옥상에서 뛰어놀던 수박이가 민호를 반겼다.
수박이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물었다.
-어라? 오늘도 외출이야?
“응, 새로운 관찰자를 소개시켜준다고 해서.”
민호의 말에 수박이는 바로 납득했다.
-그렇구나. 그럼 올 때 메로나 좀 사와 줘!
“근데 개가 아이스크림 먹어도 돼?”
-히히, 조금만 먹으면 괜찮아.
수박이가 꼬리를 맹렬히 흔들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민호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알겠어. 사올 테니까 집 잘 지키고 있어.”
-맡겨둬! 잡귀 하나 얼씬거리지 못하게 할 테니까.
수박이의 믿음직스러운 대답을 끝으로, 민호는 집을 나섰다.
***
약속시간을 15분 정도 남겨둔 시각.
민호는 군자역에 도착했다.
진하와 이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던 탓이었다.
“어디보자, 카페 브란델이 어디지?”
“바로 저 앞에 있어요!”
그때 율이 작은 건물을 가리켰다.
카페로 걸음을 옮기던 그때, 별안간 진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네, 형.”
-민호야. 미안한데 10분 정도 늦을 거 같다. 차가 좀 많이 막히네.
“괜찮아요. 천천히 오세요. 네, 네네.”
민호가 전화를 끊자 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관찰자에요?”
“응, 10분 정도 늦으신다네. 우리 먼저 들어가 있자.”
“네!”
율의 힘찬 대답과 함께.
민호는 카페 문을 열었다.
카페 안은 꽤나 아늑하고 조용했다. 또 좋은 향기가 났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히는 향기에 민호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민호의 시야에 한 소녀가 보였다.
“아.”
교복을 입고 있는 여학생은 바로 혜진이었다.
마찬가지로 민호와 눈이 마주친 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
“그래, 안녕. 어제는 잘 들어갔어?”
“예. 덕분에 잘 들어갔습니다.”
대답을 마친 혜진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방금 전까지 안고 있던 곰 인형을 끌어 앉았다. 무표정한 얼굴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귀여움에 민호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거 마음에 들어?”
“예, 푹신해서 좋습니다.”
혜진이 곰 인형의 배를 쿡쿡 찔렀다.
“손잡이 같아서 편하기도 합니다.”
“그, 그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민호의 어색한 미소를 끝으로.
카페 안은 고요한 정적으로 물들었다.
혜진은 여전히 곰 인형을 만지며 놀고 있었고, 민호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탓이었다. 게다가 하필 오늘따라 카페 안에 손님이라곤 민호와 혜진이 전부였다.
결국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민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흠흠, 혜진아.”
“네, 선배.”
“뭐라도 마실래? 내가 사줄게.”
“감사합니다.”
공손한 대답과 함께 혜진의 시선이 메뉴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어, 그러니까······.”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하는 혜진.
잠시 후, 그녀는 메뉴판을 민호에게 돌려줬다.
“죄송합니다. 이런 곳에 와본 적이 별로 없어서요.”
“뭘 죄송할 거까지야.”
피식 웃은 민호가 메뉴판을 건네받았다.
“달콤한 게 좋아? 아니면 커피 들어간 거?”
“달고 시원한 거면 뭐든 좋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알아서 주문할게.”
민호는 카운터로 가서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잠시 후,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쟁반에 커피를 담아 내왔다.
“맛있게 드세요.”
“응, 고맙다.”
안경을 쓴 남자아이는 미소를 지으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마치 카페 사장의 가족처럼 보였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때 혜진이 커피를 집어 들었다.
휘핑크림이 듬뿍 올라간 카페모카.
크림을 한 입 먹어본 그녀는 곧장 빨대로 안에 있는 음료를 들이마셨다.
그러더니 이내 눈을 휘둥그레 떴다.
“······!”
혜진은 발로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그 귀여운 모습에 민호는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맛있어?”
“네, 굉장히.”
혜진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아무래도 카페모카가 마음에 쏙 든 것 같았다.
딸랑-
그때 누군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얇은 회색 외투를 입은 남자. 바로 진하였다.
“후우, 늦어서 미안하다.”
“괜찮아요. 저도 방금 왔습니다.”
진하는 민호와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는 이내 맞은편에 있는 혜진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네가 미래가 말했던 토벌자구나.”
혜진에게 다가간 진하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